분노의 도시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 이성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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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절이라는 사건을 소재로 해서 한 지역사회의 권력층과 그들을 둘러싼 더러운 고리들을 파헤치고 있는 이 작품은 <지놈 프로젝트>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생명이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 <에이리언4>에서 끔찍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시고니 위버의 복재실패작들을 지켜보자면 이런 참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생명체에겐 차라리 죽음이 훨씬 자비스런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옛날 의학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을 땐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 지 또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도 알 수 없기에 아이를 미리 죽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낙태는 그외 다른 이유때문에 행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기술의 발달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우리의 경우엔 아들과 딸의 감별도 가능케 해줌으로써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게 된다.

즉 새로운 기술의 발달은 그 기술에 걸맞는 새로운 가치관 형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놈 프로젝트가 가져올 또다른 가치의 강요는 과연 무엇이 될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SF영화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가치의 혼동은 결코 먼 이야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생명의 정의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처리가 사회마다 다를 뿐더러 그것이 과학이나 의술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냥 가볍게 넘겨버리지 못 할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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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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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심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일까?

소설은 노인이 복수심으로 뱀을 죽인 이야기와 사냥꾼들의 무자비한 살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복수심에 사람을 죽이는 살쾡이를 보여준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복수라는 감정의 들끓음으로 나타나는 치열한 피의 향연들.

<노자>에선 자연이란 어질지 않은 존재로 그려진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 그러한 존재로서 아무 사심없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자연의 모습이 워낙 큰데다 작은 사물 하나하나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감정없는 그들의 움직임이 인간에겐 때론 이익이 되기도 해를 끼치기도 한다. 어떤 의도가 가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인간에게 할큄을 당하는 자연들의 분노를 느낄 수가 있다. 우리의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은혜갚은 호랑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수컷의 고통을 끝내준 주인공 노인에게 암컷은 정정당당한 한판승부를 요구한다. 노인은 이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그들의 분노가 뼈속에 사무쳐옴을 느낀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밀림이 점차 없어지고 온통 사막화되어가는 속에서 자연은 이제 그 복수의 본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상 기온현상이란 이상한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복수심에 불탄 자연의 당연한 보복일 따름일련지도 모른다.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는 식의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그들의 저항이 과연 인간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분노에 슬피 우는 자연의 울음을 이 책은 섬세하게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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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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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 홍세화씨가 생존을 위해 택시운전을 하게 된 이야기를 직접 쓰고 있다. 파리의 고단한 생활을 일기장 써내려가듯 써가면서 간간히 한국에서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그의 현재 생활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면서도 결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세화씨는 프랑스 삶 속에서 그들의 똘레랑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 똘레랑스란 타인의 다른 의견을 용납하는 자세, 법과 탈법사이의 허용되는 반법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가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평등적으로 대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똘레랑스라는 것이 바로 이성적 사유의 확장으로 가능한 것임을 우리의 정적 관념과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똘레랑스라는 것이 어찌보면 공자의 말씀중의 한대목과 똑같은 사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즉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정신은 똘레랑스와 같은 자리에 놓아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의 이 똘레랑스 정신에 대한 찬가외에 독자의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는 바로 개똥 3개에 대한 우화. 서당 선생님과 3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바른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땐 자신이 개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나의 양심을 찌른다. 침묵도 저항의 한 수단일 수 있음을 주장하며 외치지 않고 지나온 지난 세월에 대한 부끄러움이 문득 내가 개똥 처먹는 인생을 살아왔지 않나 하는 자성의 시간을 갖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이 자성을 요구하는 개똥이야기는 앞으로도 나에게 그 개똥을 계속 처먹고 살것인지 끊임없이 물어볼 것이다.

침묵과 개똥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책장을 덮으며 새로운 물음이 내 몸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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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풍차
시드니 셀던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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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거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드니 셀던에게 있어 지구는 부처님 손바닥 안인가 보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적을 지닌 사랑에게 있어 세상은 세계경찰인 자신의 나라가 지키고 있는 하나의 마을일뿐일련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루마니아의 새 대사로 촌 구석의 여교수를 임명한다. 여교수는 처음엔 가족들 때문에 고사했지만 뜻하지 않은 남편의 사고사로 대사직을 응낙한다. 루마니아로 떠난 새 대사는 아무추어적 신선한 바람으로 새로운 변혁을 조금씩 이루어낸다.

한편 미국의 새 프로젝트는 좌, 우 이데올로기의 유지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는 부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루마니아 대사를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전문 킬러는 이 일에 실패하고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바로 아깝게 대통령직에 오르지 못했던 대통령의 친구임이 밝혀진다.

이 소설은 전문 킬러가 누구일까? 루마니아 대사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해 흥미를 자아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을 읽어가는데 있어 조금 부담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루마니아 대사의 인간 대 인간 프로젝트라는 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본 법칙 중 하나인 교환의 법칙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 과연 교환이라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라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동서를 넘어서 하나의 인간세계로 나가자는 데 있어 그 기본은 바로 무역에 있으며 이 무역이 그들간의 전쟁을 예방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본주의적 물물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평화는 없다라는 생각은 왠지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 오만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반면 이 소설의 장점 중의 하나는 조직과 개인에 있어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루마니아 대사직을 수행케 하기 위해 그 남편을 사고사로 위장시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소름이 돋는다. 주변의 사고라는 것도 어찌보면 위장된 우연일뿐일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 갓 인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또 기득권의 세력 집단을 구성하던 구성원들이 사라진다 해도 또 다시 그 집단은 새로운 구성원을 만들어간다는 암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그 벽을 깨뜨리려 해도 그것을 허물어뜨릴 수 없는 두꺼운 벽인지를 실감케 한다. 아무튼 세계를 배경으로 호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 추리물은 미국적 색채를 조금 벗겨내고 읽는다면 흠뻑 빠질만한 재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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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얼굴 - 시드니셀던시리즈 8
시드니 셀던 지음 / 청목(청목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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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의 매력은 독자가 그 범인을 알아챌 수 있는 충분한 힌트를 주지만 결코 쉽게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을 때 갖게되는 흥분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범인이 쉽게 드러나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하지도 않은 정도로 그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을 때 추리소설은 그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힌트주기와 딴청피우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적절한 힌트를 줌으로써 범인을 추적하게 만들다가도 갑자기 딴청을 피움으로써 확신이 가던 범인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추리소설이 지녀야 할 미덕인 것이다. 만약 어느 한 쪽이 더 강하게 소설 속에 드러난다면 그 소설은 매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드니 셀던의 <벌거벗은 얼굴>은 그런 점에서 조금은 추리소설로서의 빛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힌트주기가 딴청피우기보다 과다해 쉽게 범인을 짐작케 하고 게다가 그 결말까지 일사천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읽는 재미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또한 딴청피우기란 정말로 엄격한 계산하에 이루어져 그 딴청에 독자가 놀아나도록 해야하는 엄밀함이 필요한 것인데 이번 소설 속에선 그 딴청을 딴청으로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긴장의 강도가 떨어지고 말았다.

즉 범인은 바로 환자와 관계된 가족일 수 있다는 힌트는 금새 누구의 가족인지 알게 만들어버리기에 딴청은 도저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이 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을 걸 하며 딴청피우는 것은 도리어 딴청피우고 있군 하며 바로 이 놈이 범인이야 하고 가르쳐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게 만든건 아마도 주인공과 환자 앤과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기대는 그냥 기대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하는 것, 아마도 그게 바로 시드니 셀던이 가지고 있는 글쓰기의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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