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3년 제76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사운드트랙 수상.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및 음향상을 수상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장면은 단 한 컷도 없지만,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소리로 울림을 주는 영화. 사운드트랙과 음향상을 수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2.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가 꾸려가는 집과 정원을 영화 내내 보여주지만, 머릿속에서는 이 집의 담 너머 들려오는 총소리와 비명, 굴뚝 연기를 통해 비참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나 평온하고 지극히 따분할 정도의 일상이 시종일관 비쳐지면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론 비극의 강도가 오히려 덜어진 느낌이다. 물론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은 극명한 대조를 통해 비극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평하고 있지만.  


3. 이 영화는 그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던 이들이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주장.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일의 도덕성 등을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수행하는 관료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체제에 갇힌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영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인공 루돌프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도덕적 판단을 내려, 반성하고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이 지닌 한계일 수도 있겠다.  


4. 루돌프의 관심은 상부로부터의 인정과 승진이다. 그래서 유대인 학살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회의를 통해 소각장 설계를 새롭게 하는 등 일중독에 빠져 있다. 그의 아내는 집을 가꾸기 위해 정원을 디자인하고, 풀장을 만들고,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간다. 남편의 전근 소식에도 남편 만을 전근지로 보내고, 자신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남겠다는 결의까지 보인다. 이곳의 여인들은 유대인 학살로 남겨진 옷과 장신구 등등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스럼없이 가져온다.  


5. 루돌프 집을 둘러싼 담 너머는 유대인 수용소이자 소각장이다. 이들은 유대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총소리와 비명은 그저 생활소음에 그친다. 아니 애당초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상상력이 중구난방으로 날뛰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담을 치고 담 너머에 소, 돼지, 닭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조금 도를 지나친 상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함부로 다루면서 우리도 모른 척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을 넘어 동물로 그 대상을 확대해 본다. '살상의 평범성'이라고나 해야할까.


6. 루돌프가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강물을 오가고, 자신은 낚시를 즐긴다. 그런데 강물에서 뼛조각을 발견한다. 강물에 떠다니는 재와 뼈. 물은 담을 넘어 흘러간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어 놓아도 그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루돌프는 황급히 아이들을 보트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자신의 범죄를 모두 씻어내리는 냥 온몸을 박박 씻어낸다. 아이들도 재차 씻기고 또 씻긴다. 하지만 강물의 재는 씻겨내려가더라도 그의 죄는 씻겨 내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7. 루돌프 가족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갑자기 수용소의 남겨진 신발들을 전시해 놓은 현재의 전시관 모습을 비친다. 순간 편집 사고처럼 느껴질 정도의 이질감. 관리하는 사람들은 이 전시관의 유리를 박박 문질러 닦고, 바닥도 청소한다. 또다시 씻어내는 이미지들. 이번엔 씻음을 통해 과거의 잔혹한 역사가 보여진다.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죄악은 아무리 담을 쌓아 견고히 감추려 해도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범한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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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1,2편 보다 앞선 시기로 소리내는 대상을 향해 사냥을 하는 괴생명체의 소동이 시작된 첫날을 그린다. 1,2편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존 크랜시스키는 이번 작품의 제작자로 나섰다. 아마도 시즌3 감독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무튼 이번 <첫째날>은 배경도 주인공도 모두 다른 별개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소리가 주는 긴장감과 공포는 약해졌고, 드라마적 요소가 더 짙어졌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최대 강점이 사라져 아쉽다.


2.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은 제목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궁금증은 거의 풀리지 않는다. 1,2편의 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존 크랜시스키가 인터뷰를 통해 "괴생명체는 지구보다 기압이 더 센 곳에서 운석을 타고 지구에 온 존재"라고 밝혔지만, 더 상세한 설명은 전혀 없다. 이번 영화 <첫째날>에서는 다만 운석을 타고 날아온 모습만 살짝 비쳐줄 뿐이다. 궁금증 해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도대체 왜 지구를 선택해서 왔는지는 이제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확인할 수 있으려나?


3.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 사미라다. 그녀는 삶의 의욕이 없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뉴욕 맨해튼 할렘가에 있는 팻시스 피자 한 조각을 먹고자 한다. 죽음 앞에서도 냉소적이었던 그녀가 괴생명체로부터 벗어나 기어코 살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스포일러 있음)

그 피자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을 사랑해줬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자신의 인생을 매조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영화가 스릴러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휴먼 드라마에 가까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전편에서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시끄럽고 복잡한 대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4. 가족과 사랑을 담고 있는 피자와 함께 이번 영화가 휴먼 드라마로 흐른 것은 타인에 대한 친절을 표현하고 있어서다. 분수대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거나, 남자 주인공이 목숨을 무릅쓰고 진통제를 찾아 나서는 장면은 이번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보여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괴생명체 또한 이런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지하 터널 속에서 먹잇감(이 먹잇감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을 발견한 괴생명체가 소리를 내어 동료들을 부른다. 그리고 그 먹이를 같이 먹는다. 이들 또한 협력을 하는 생명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5. 겁 많은 남자 주인공 에릭은 로스쿨을 다니기 위해 영국에서 뉴욕으로 온 젊은이다. 홀로 있는 것이 두려운 에릭은 우연히 만난 사미라의 서비스캣 프로도를 만나고, 고양이가 이끄는 곳으로 향하다 사미라를 마주친다. 그 뒤로 에릭은 사미라와 함께 하고자 한다. 겁 많은 그가 용기를 내어 괴생명체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미라와 프로도 덕분이다. 


6.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에서는 괴생명체(관객들 사이에서는 데스엔젤이라 불리운다)에 저항하는 모습이 전혀 없다.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저 도망치기에 바쁘다. 먹이사슬에서 절대 약자인 셈이다. 지구의 최강 포식자인 인간이 과연 이렇게 피식자로만 남을 것인가? 3편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7. 사족 :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날> 여주인공 사미라는 폐허가 된 서점 앞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든다. 그 책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새벽>이라는 SF소설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생인 흑인 여성으로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은 물론 SF 소설작가로는 최초로 천재상이라고 불리는 맥아더 펠로우십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독이 이 작가에 대한 오마주로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인지, 아니면 소설 <새벽>이 지구인과 외계생명체와의 합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영화 전개를 암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시리즈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3편이 나와봐야 모든 걸 알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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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년 제작된 영화.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배경은 2025년이다. 스마트폰으로 운용되는 인공지능비서인 사만다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비서는 2024년 현재 매우 근접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12년 후의 미래를 그렸는데, 현재 거의 사실에 가까울 정도로 적중한 점이 놀랍다.


2. 영화 속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현재 우리가 접하게 될 인공지능비서는 온디바이스로 향하고 있다. 영화 속 인공지능 사만다가 동시에 8316명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고, 그 중 641명과는 사랑에 빠졌다고 실토한다. 이에 주인공 테오도르는 충격과 실망에 빠진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온디바이스화된 인공지능비서와 만나게 될 확률이 높기에 자신과만 이야기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혹여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더라도 양다리를 넘어 수백 다리의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보다는 덜 비참(?)할 듯하다. ^^;;;;


3. 인간에게 외로움은 질병에 가깝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 오죽하면 영국에서는 외로움 장관을 임명(2018년)했을까. 미국공중보건국장은 외로움이 비만이나 흡연만큼 건강에 해롭다고도 말했다. 이런 이유로 왕따도 치명적인 범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쓴 서은국 교수는 행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꼽는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진화생물학적 설명인 듯하다. 식욕과 연대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 욕망이다. 그래서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행복감을 느껴야 생존할 확률이 높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이고자 하는 것, 즉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곧 생존과 연결되며, 이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5. 영화 <허>의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거의 100% 이해하고 공감한다. 물론 진짜 이해하고 공감한다기 보다는 이해하고 공감한 척 할 뿐이지만. 인공지능이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갖고 있는 척한다. 엄청난 데이터로 감정이라는 패턴을 해석하고 흉내 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상대는 인공지능의 유사 감정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에 내놓으면 내놓을 수록 인공지능은 그를 더욱 잘 이해한다. 


6. 테오도르는 인공지능이 업데이트되는 동안 소통이 끊기면서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또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도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실은 사만다와의 사랑은 공감 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운영체제들이 더 진화하기 위해 모두 떠나버린 순간 테오도르는 친구 에이미와 함께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영화는 (인간) 에이미가 (인공지능) 사만다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는 어렴풋한 안도감을 주는 듯하다.


7. 영화 <허>는 인간의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론 엉뚱하게도 인간이 자꾸 외로워지지 않으려 하는 그 욕망으로 인해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불행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의 결핍은 결국 불행이기에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행복하다면, 홀로 있을 때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매 순간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고 서은국 교수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런 순간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는 행복의 순간과 함께 불행의 순간도 마주쳐야 한다. 하지만 홀로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면 어떨까. 물론 행복은 생존의 조건이라고 전제한다면, 홀로 있어도 불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멸종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행복과 불행을 오갈 것인지, 행복도 불행도 없는 상태로 지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자발적 외로움, 즉 고독 또한 우리 삶의 필요조건이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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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짜증이 확 올라온다. 충전식 예초기의 모터 부분과 조정간 부분을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처음 예초기를 사고 조립할 때는 이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안되지? 

충전식 예초기는 작년에 구입했다. 1년 간 잘 사용했는데, 워낙 돌이 많은 곳이라 충격을 많이 받아서 모터 부분에 유격이 생겼다. 축이 흔들거리다 보니 예초기 날도 흔들거려 위험했다. 할 수 없이 모터를 바꾸려고 했지만, 모터 만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터와 함께 달려있는 막대부분까지 통째로 갈아야 했다. 


새로 모터 부분을 주문해서 다시 조립을 시작했다. 그런데 왠걸? 좀처럼 새 부품이 조정간 쪽에 들어가질 않는다. 고무망치로 두들겨 보기도 하고, 조립되는 부분이 좁아서 그런가 싶어 칼로 조금 헤집어 보기도 하고... 새벽에 조립을 시작했는데 해가 뜨겁게 내리쬐기 시작한다. 1시간 가까이를 쩔쩔매다 보니 땀도 줄줄 흐른다. 

'아무래도 이상한 걸, 이렇게까지 안 들어갈 리가 있나?'


둘의 접합부분이 계속 같은 부분에서 끝나는 것이 이상했다. 기존의 고장 난 것을 가져와 봤다. 새로 결합한 것을 옆에 두고 비교해보니, 웬 걸? 길이가 똑같다. 

'이게 뭐야?'



둘의 조립을 위해 붙여 놓은 기준 스티커가 5미리미터 가량 위에 붙어 있었다. 즉 기준선이 잘못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준이 잘못 됐으니, 아무리 기준에 맞추어 조립해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기존의 것을 잣대로 비교해 보고서야 기준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 



우리 삶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서로 기준이 다르다 보니 충돌하고 갈등을 빚기도 한다. 소위 진보와 보수는 그 기준이 반대쪽에 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기준도 합의된 잣대를 가질 수는 있다. 이 잣대가 없다 보니 서로 자기의 기준에만 맞추려 한다. 땀만 뻘뻘 흘리고 결과는 도출해내지 못한다. 서로 다른 기준을 인정하고,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잣대부터 만들어야 한다. 잣대가 없는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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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 펜연필독약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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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원가가 아니다. 텃밭지기다. 조그마한 터에 주로 먹을 것 위주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어 거두어 들인다. 꽃을 심어 가꾸는 것은 다소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 몸에 들어갈 양식을 키워내는 것이지, 꽃을 보며 즐기는 마음의 양식을 키우지는 않고 있다. 다만 내 몸에 들어갈 양식들도 꽃을 피운다. 사과꽃, 배꽃, 매화, 블루베리꽃, 수박과 참외, 오이도 꽃을 피운다. 오미자, 복분자도 꽃을 피운다. 열매를 구하는 것들은 꽃을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열매가 아닌 잎을 주로 취하는 채소류는 꽃을 피우기 전에 수확을 거두는 경우가 많아 꽃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순수하게 꽃을 구경하기 위한 목적으로 키우는 것은 거의 없다. 


그래도 가끔씩은 내가 관리하는 텃밭이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원추리, 백합, 수선화, 수국도 조그맣게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이들도 꽃만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원추리는 이른 봄 새 잎이 났을 때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백합과의 식물은 땅 속에서 나무들을 해치는 벌레들을 내쫓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꽃을 피우면서도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식물들은 밭 곳곳에 조금씩 심어 놓았다. 때론 입이 아니라 눈을 즐겁게 해주는 식물들을 더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도 해 본다. 입과 눈을 골고루 즐겁게 해 주는 다양한 식물들을 조화롭게 가꾸어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이런 생각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을 때 우연히 가드닝 분야의 명저라고 할 수 있는 <정원가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알게 됐다.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는 카렐 차페크가 쓴 에세이다. 체코 작가라고 하면 프라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뜻밖에 카렐 차페크라는 이름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이 작가가 우리가 요즘 흔하게 쓰고 있는 '로봇'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극작가이면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카렐 차페크는 한편으로 정원가이기도 했다. "인간은 손바닥만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며 느낀 감상을 위트 넘치는 필체로 펼쳐 보인다. 마치 <나를 부르는 숲>의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는 것처럼 얼굴에 웃음을 짓게 만드는 책이다. 그 속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담겨 있어, 때로는 진중한 사색에 빠지게도 한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을 읽으며, 정원가도 텃밭지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특히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고백은 100% 공감한다. 건강하고 좋은 흙에서만이 건강한 꽃과 작물을 키울 수 있다. 최근 흙이 아닌 공장식 배양액으로 작물을 키우는 스마트팜에서는 해당되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점차 흙에서 자라나는 것보다 이렇게 실내 공간에서 흙 없이도 자라는 작물의 비율이 높아져 갈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로 인해 외부 환경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작물은 물론이거니와 꽃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해가면서도 변화무쌍한 기후라는 제약을 벗어나 연중 일정한 양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날이 뜨거워지면서 에어컨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면, 이는 다시 날을 더 뜨겁게 만드는 악순환이 일어나듯, 우리의 먹을 것을 일정하게 확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은 다시 농사를 더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카렐 차페크의 정원 가꾸는 이야기를 통해 흙의 소중함도 다시 일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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