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폴란의 다큐 <COOKED 요리를 욕망하다> 첫 편의 '불'에 이어 '물' '공기' '흙' 2~4편을 모두 보았다. 


인류가 불을 이용해 음식을 먹게 됨으로써 뇌의 발달과 음식 소화시간을 절약해 문화생활에 쓰이게 되었다는 내용의 1편에 이어 2편에 등장한 것은 '물'이다.

불로 고기를 굽는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펴져 있는 가장 간단한 요리 양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이 요리의 맛은 세계 어디에서나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어떤 고기를 어느 정도의 불의 세기로 얼마만큼 구웠느냐에 따라 맛은 다르겠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요리를 확장시키게 된 용기의 발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요리'의 발달을 가져온다. 용기를 사용함으로써 요리에 사용되는 식자재 간의 섞임으로 전혀 새로운 맛이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고기라 하더라도 그 고기에 어떤 향신료 또는 다른 고기 등등을 집어 넣는지에 따라 요리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자재의 섞임에는 물이 큰 역할을 한다. 식자재를 조화롭게 섞도록 도와주는 요소로써 물이 작용하는 것이다. 요리란 섞임의 미학이며, 이 섞임이 가능토록 한 것은 바로 용기와 물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요리에서는 이 식자재의 섞임 이외에도 다양한 화학적 조미료와 화학제품 등이 뒤범벅되고 있다. 정말 전혀 알지 못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재료가 등장해 가공식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등장은 진정 요리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의 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3편은 '공기'다. 요리에 공기라고? 3편을 보고나서도 고개가 약간 갸우뚱거리는 것은 4편의 '흙'과 혼동되어서다. 3편 공기라는 요소의 핵심 음식은 빵이다. 곡물을 갈아 물과 소금 정도만 섞어 두어도 공기 중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반죽은 부풀어 오른다. 이 반죽을 구우면 크기는 더욱 커지고, 그 안에는 기포, 즉 공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공기로 인해 빵의 맛은 다양해진다. 그 양 또한 증가한다. 공기가 가져오는 맛과 양의 풍부함은 절대 끊을 수 없는 빵의 매력이 된다. 하지만 이 빵의 매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반죽이 발효가 되어 공기가 차기 위한 시간 말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스트를 빵에 넣는다. 또한 자연 그대로 주어지는 다양한 맛이 아니라 인위적인 맛을 위해 밀, 물, 소금 이외에 다른 식자재나 첨가물을 이것저것 집어넣기 시작했다. 현대적 빵은 전통적 빵의 건강함을 잃어버리고 효율이라는 이름 하에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건강함의 상실을 글루텐에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다. 


4편은 '흙'이다. 흙 속에는 다양한 미생물이 살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마이크로바이옴의 세상이다. 이 미생물들이 음식을 발효시켜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만들어 준다. 저장할 방법이 없었던 과거에 음식을 오랫동안 먹을 수 있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발효는 영양성분의 풍부함과 맛의 다양성까지 가져왔다. 음식물의 미생물은 우리 사람의 몸 속 미생물과 어우러져 건강함을 유지시켜 준다. 하지만 잘 발효되지 않은 음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현대의 가공식품이나 초가공식품들은 발효식품이라 하더라도 이런 독성을 없애기 위해 살균의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위험을 없앤 대신 천연의 발효가 가져다 준 깊은 맛과 풍부함을 상실했다. 

발효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술이다. 인류가 곡물을 키운 것은 굶주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술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점차 호응을 얻고 있다. 


마이클 폴란이 살펴본 진정한 요리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슬로푸드인 듯하다. 이것은 요리의 속성 차원이고, 요리를 하는 이유는 더불어 나누기 위한 것이라는 사회적 차원에도 큰 의미가 있다. 요리하지 않는 현대인, 부엌이 필요없는 집. 이는 요리가 노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가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을 회복한다면 요리는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유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집마다 요리하는 냄새와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가 퍼져나오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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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예능 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가 장안의 화제다. 요리라는 콘텐츠에 대한 인기는 시들지 몰라, 시기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레시피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먹방으로, 이어 여행의 주요 목적으로서의 맛집 탐방에 이어 이젠 경연의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그나마 요리라고 해봤자 반조리가 된 간편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왜 요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거운 것일까. 이런 똑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욕망하는 식물> 등의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폴란이다. 마이클 폴란의 이런 의문을 가지고, 요리의 기원과 문화,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요리를 욕망하다>라는 책을 2014년에 냈고, 2년 후 다큐멘터리로 영상화하는 작업을 했다. 


책과 다큐는 모두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가지 주제를 챕터로 구성했다. 1부는 불로, 요리의 시작이 불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인간이 유인원과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요리하는 인간부터라는 리처드 랭엄의 '요리 가설'을 소개한다. 랭엄은 <요리 본능>이라는 책을 쓴 학자로, 인류가 음식을 불로 익혀 먹음으로써 먹고 소화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 그 남은 에너지를 뇌로 보내어 뇌가 발달하고, 또 남는 시간에 문화 등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불로 익혀 먹는 요리의 시작은 원재료를 그대로 굽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동물의 사체를 우리가 먹는 행위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해체된 고기가 아니라 통으로 된 사체를 구워서 나누는 과정을 통해 문화가 형성되어진다. 즉 고기를 굽는 동안 불 주위에 모여 앉은 이들이 사냥의 과정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 익은 고기를 서로 나누어 먹음으로써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바비큐를 먹는 행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께 먹는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불멍을 통한 치유와 나눔을 통한 연대가 불로 구워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요리의 시초는 불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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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스릴러 영화. 131분. 대의명분으로 포장한 부패가 도려내질 때의 쾌감. 화려하지 않아도 짧고 간결하게 화끈함을 선물하는 액션. 8점/10점(별 넷)


2. 사촌동생의 보석금을 내기 위해 한갓진 마을을 찾은 전직 해병대원 교관. 돈가방을 실은 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경찰차가 들이받는다.(그러기에 자전거를 탈 때는 외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을 너무 크게 듣지 맙시다 ^^;;) 보석금을 포함해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계획해 둔 자동차 살 돈까지 경찰에 뺏긴 주인공이 몸을 추스리고 경찰서로 돈을 찾아 나선다. 이래저래 합법적인 모양새로 돈을 가로챌 것 같은 지역 경찰들에게 협상을 시도하지만, 끝내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쫓겨난다. 이대로 물러나면 사촌동생의 목숨까지도 위험한 상황, 주짓수 해병대 교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부패한 세력들을 응징하러 나선다.


3. 꽤 그럴듯하게 현실에서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부패상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자립이 힘들어 진 지자체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법원과 경찰 등이 합세해서 아주 가벼운 범죄마저도 보석금을 지불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돈을 만들어낸다. 마을의 자립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기에 섣불리 대항하기도 쉽지 않다. 공권력이 작심하고 못된 짓을 꾸미면 당해 낼 재간이 좀처럼 없다. 다만 영화처럼 이 부패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우린 이런 부패를 도려내는 칼날같은 사람이 되고 싶거나, 그들을 지지한다. 그래서 영화 <레블 리지>는 보통의 소시민들에게 통쾌함을 선물한다.  


4. 부패한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선 조력자가 필요하다. 영화 속에서도 법원에서 일하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일종의 '두 번째 펭귄'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펭귄이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얻기 위해 물에 뛰어들 때, 이를 지켜보고 안전을 확인한 두 번째 펭귄이 물에 뛰어들면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 이런 두 번째 펭귄으로 인해 나머지 무리들도 물에 뛰어들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일종의 임계치에 이르도록 만드는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는 첫 번째 도전자와 함께 두 번째 펭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영화 <레블 리지>에서도 조력자가 있음으로 인해 한 마을에 도사리고 있던 부패를 도려낼 수 있었다. 첫 번째 도전은 못할 지라도 두 번째 조력은 할 수 있는 용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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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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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 이해하기 3탄으로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을 선택했다. 1,2탄으로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와 <자본의 미스터리>를 읽었는데, 두 책은 상반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반면 두 책이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체제다. 즉 자본주의의 폐해로써 가난이 발생한다는 의견과,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음으로써 가난하다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이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접근보다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마디로 사람들의 몸값이다.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매일 8억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제 3 세계 국가의 누군가는 평생을 모아도 전혀 만질 수 없는 금액을 하루에 버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호날두의 몸값은 일당 8억 원의 가치를 지니게 됐을까. 그의 축구 실력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8억 원의 가치를 지닌 활동을 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능력이 탁월하다고는 하지만 이 능력이라는 것도 축구라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시대적 운과 맞아 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리라. 호날두 못지않게 운동 신경이 뛰어난 세계적 핸드볼 선수가 있다. 니콜라 카라바티치라는 선수인데, 연봉이 약 20억 원 가량이다. 이 연봉 또한 웬만한 사람들이 평생 모아야 할 금액 수준이지만 호날두에 비하면 그야말로 '껌값'이다. 똑같이 타고난 또는 탁월한 운동신경을 지녔지만, 어떤 종목에서 뛰는, 어떤 종목과 어울리는 운동 신경을 가졌느냐에 따라 몸값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발생한 것이다. 단순히 능력 만으로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호날두나 카라바티치 만큼의 운동 신경을 가졌다 할 지라도 이런 능력을 발굴해서 키워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환경을 만나지 못하면 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즉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 역량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 호날두나 카라바티치가 타고난 운동신경만으로 자신의 종목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룬 것은 아니다. 이들도 엄청난 노력을 통해 이런 성과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호날두의 행운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의 능력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반대로 당신은 능력이 부족해서 그 수준에 있다는 좌절감을 안겨준다는 것에 문제점이 도사린다. 또한 축구와 핸드볼 처럼 단순히 어떤 종목이냐에 따라 연봉의 수준이 달라지듯,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 수입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 또한 능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입이 적은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멸시, 반대로 수입이 높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자칫 노동에 대한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문제라 할 수 있다.(최근 한 의사가 간호사들을 향해 '장기말'이라거나 '건방진'이라는 표현을 한 것도 이런 능력주의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능력주의라는 이름 하에 차별은 정당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 능력이라는 것이 순전히 개인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이 정당한 지를 살펴봐야 한다. 애당초 이런 극심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속성에 의해 이런 차별이 발생한다면, 또는 이런 차별이 성장의 동력이 된다할 지라도 어떻게 이런 차별의 극대화를 줄여갈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차원에서 소득세를 폐지하는 대신, 소비세와 부유세를 제안한다. 즉 우리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입에 세금을 부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고 보유하는 것에 세금을 부여해, 그 세금으로 소득차로 인한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기를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금융거래세를 통해 투기적 거래, 즉 돈이 돈을 버는 거래를 억제하고 이 세수를 사회적 복지에 사용하도록 하자는 의견이다.(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투세에 대한 갈라진 의견도 샌델이 주장하고 있는 그 취지에 부합한지를 따져서 결정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연간 수조원씩 벌어들이는 투자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면,또는 똘똘한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연간 수 억원을 벌어들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또는 코인이나 주식에 투자(투기?)해서 원금의 몇 배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반대로 하루종일 돌을 깨뜨리고 몇 천원을 버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통해 겨우 몇 만원을 버는 노동자들을 보고 있자면, 세상이 능력 껏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허울 좋은 속임수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세상은 능력에 따라 얻어간다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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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판타지 액션 영화. 108분. 용의 둥지에 갇힌 공주가 스스로의 지략과 힘으로 빠져 나가는 이야기. 단순 명료하다. 5점/10점(별2개반)


2. 가난한 백성을 위해 부유한 나라의 왕자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공주 엘오디. 하지만 이 결혼은 용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한 함정이었다. 동굴에 빠진 엘오디는 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 제목 댐즐은 Damsel in distress 의 댐즐로 보인다. 곤경에  빠진 아가씨라는 뜻으로, 문학 작품의 주 모티프이기도 하다.


3. 엘오디는 동굴에 갇혀 용에게 잡아 먹힐 위기에 처했다. 그녀는 그녀를 구해 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자포자기해 용에게 먹힐 생각도 아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필코 살아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의지를 다진다. 이 동굴엔 자신 말고도 그 이전에 제물로 바쳐졌던 여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일종의 동굴 지도도 남겨져 있다. 엘오디는 이 곤궁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4. 영화의 재미는 엘오디와 용의 싸움일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싸움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극박함이나 반전 또는 지혜 싸움이 크게 도드라지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용이 나오는 판타지인 만큼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터인데, 동굴 속에선 치유하는 벌레 정도만 나오는 단순함도 재미를 떨어뜨린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여 주인공 엘오디 만의 의지만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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