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규꽃이 한창이다. 한 줄기에 두세송이씩 피기도 한다. 금화규를 10주 심었는데, 날마다 10송이 이상씩 핀다. 금화규꽃은 아침 일찍 피었다가 오후 늦게면 진다. 진 꽃은 다시 피지 않는다. 즉 겨우 한나절 피는 것이다. 그래서 금화규꽃을 이용하려면 아침 일찍 따야한다. 



금화규꽃을 말려서 차로 이용해보려 했지만, 건조기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햇볕에도 말려보고 응달에도 말려봤지만, 하루가 지나면 금세 꽃이 오므라들면서 말리는게 힘들다. 

꽃을 그대로 두면 씨방이 생겨 씨를 맺는다. 이렇게 씨방과 씨를 이용해도 되지만 꽃이 많이 피다보니 적절하게 나누어 이용하면 좋을성싶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금화규꽃밥. 밥을 할 때 금화규꽃을 두세송이 함께 넣는 것이다. 



그러면 밥 위에 노랗게 비단처럼 스며드는게 보인다. 



주걱으로 저어서 공기에 퍼 담으면 금화규꽃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기분탓인지는 모르지만 밥에 윤기가 더 흘러보인다. 맛은 크게 차이가 없는듯하다. 



라면에도 금화규꽃을 넣어봤다. 라면물을 끓일 때 금화규꽃을 넣는 것이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쯤이면 꽃에서 우러난 물이 노랗게 보인다. 



라면을 넣고 끓이면 꽃이 흐물흐물해져서 면과 섞인다. 식물성콜라겐이 많다고 해서인지 면이 쫄깃쫄깃한듯한 느낌이다. 라면국물의 맛은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이번에는 금화규꽃으로 담금주를 만들어보았다. 금화규꽃 일부는 설탕에 재었다. 반나절만 지나도 물이 생긴다. 



여기에 금화규꽃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뒤 병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리고 소주를 붓는다. 



과연 금화규꽃주는 어떤 맛일까. 콜라겐의 끈적함이 묻어나는 술이란 어떨지 기대가 된다. 금화규꽃주의 맛 평가는 내년 이맘때로 미루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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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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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천물류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40명이나 되는 인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2020년, 올 여름에도 용인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사람의 잘못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특히 12년전 사고로 배운 것이 없이 똑같은 사고로 똑같이 사람을 잃었다.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된 큰 원인중의 하나는 소위 샌드위치 패널이라는 단열재, 가연성의 우레탄 폼을 이용한 마감 자재다. 불에 잘 타는데다 유독성 연기를 내뿜어 치명적이다. 그런데 왜 물류창고에 이런 위험한(?) 단열재, 마감재를 쓰는 것일까. 비용때문이다. 물류창고를 짓는 비용을 낮추기 위한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2008년 이천 화재가 분명 이것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목숨보다는 비용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악당이어서 비용을 중시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분명 이들도 누군가에게는 따듯한, 인정넘치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약탈적' 자본주의에 물들어져/길들어져 있기에 아무런 고뇌없이 비용만을 고려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생명보다 효율, 또는 돈이라는 것을 더 중시하게 됐을까. 


자신이 속해있는 일상 속에 묻혀살고 있을 때는 그 일상의 문제점을 잘 파악할 수가 없다. 일상은 당연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럴 땐 외부의 시선으로, 또는 외부를 기준점으로 삼아 우리의 일상을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독일을 준거로 삼아 대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당연한 일상이 왜 우리의 불행이 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된다.


대한민국은 이번 코로나19를 대처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세계에 내놓을만한 자랑스러운 것들을 많이 갖고 있다. 더군다나 5천만 이상의 인구를 갖춘 나라에서 3만 달러 이상의 GDP를 올리는 7개 국가 중의 하나이다. 또한 촛불혁명이 보여주듯 정치적 민주주의는 세계로부터 탄사를 받을만큼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일상의 민주주의로 스며들지 못했다. 즉 정치적 현장에서는 민주주의를 달성했지만, 일상에서는 권위주의가 만연해있는 것이다. 게다가 경제, 문화 등에서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요원하다. 소위 꼰대라고 말하는 권위주의적 행태가 만연해 있다. 또한 경쟁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찬양할 정도다. 경쟁 없이는 모든게 도태될거라는 엄포와, 경쟁을 이겨냈을 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승자독식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이런 가치관이 우리를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모른채 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마음가짐을 체화했을까. 그 원인을 쫓아가보면 분단이라는 조건이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을 수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행을 당연시하지 않고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을 전쟁이 없는 평화적 상태, 나아가서는 통일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아도르노가 말한 "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는 것을 잊지않은 강한 자아가 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김누리 교수의 책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게되면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불행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에서의 행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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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자평 - 5분 초능력자들과의 액션신은 황홀하지만, 상투적 결말은 아쉽다.


2. 5분간 초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알약 '파워'가 암시장에 나오면서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전직군인, 그리고 10대 흑인여자딜러의 활약을 그린 SF액션영화.


3. '파워' 알약을 먹는 순간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초능력은 5분간만 발휘된다. 만약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폭발해버린다. 이 초능력이라는 것은 동물들의 능력을 모사한다. 카멜레온의 위장력, 도마뱀의 재생력 등등. 이런 초능력을 보여주는 CG의 화려함을 무장으로 알약을 먹은 범죄자와 전직 군인 아트의 격투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 그런데 짧은 액션 장면이 몇 개 나열되면서 스~윽 스쳐 지나가버린 느낌. 영화 중간에 클럽에서 싸우는 장면은 그 시점이 유리관에 갇힌 피해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독특하다. 이 장면은 강력추천.

   

3. 그런데 당신도 5분간이지만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면 알약을 먹을 것인가? 알약을 먹겠다고 선택했다면 왜 초능력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영화 [프로젝트 파워] 속에서는 그 힘으로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다. 힘에 대한 갈망이 범죄를 불러오는 것이다. 

반면 전직군인 아트는 10대 흑인소녀 마약딜러인 로빈에게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 생존의 도구로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로빈은 랩에 자신있다. 아트는 로빈의 랩 실력에 엄지 척 해주며, 그 실력을 쌓아서 살아가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온전한 실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인가? 영화[프로젝트 파워]는 어찌보면 초능력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랐던 것은 아니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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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인도 영화를 좋아한다면 강추. 다만 영화 중간 뜬금없이 나오는 군무 형태의 발리우드식 영화는 아니다(그렇지만 영화가 끝나고 타이틀이 올라가면 군무가 등장한다^^). 악질 경찰의 모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된 연인의 통쾌한 복수극.   


2. 여주인공 사라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탈출해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그녀의 팔목엔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매듭으로 만든 팔찌가 있다. 억압된 것을 하나하나 벗어날 때마다 매듭을 풀어낸다. 남주인공 아드바이트는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와 끈끈한 관계를 맺기 전에 헤어짐을 선택한다. 두 주인공이 인도를 여행하다 우연히 마주치면서 사랑을 나눈다. 사라는 임신을 하고 아드바이트는 관계맺기의 두려움에 그녀를 떠나간다. 하지만 이윽고 진정한 사랑이란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됨을 깨우치고 그녀에게 돌아온다. 그런데 하필 돌아온 그 시각 못된 경찰의 오해로 인해 사라가 죽음에 내몰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라는 죽고 아드바이트는 감옥에 갇혀 5년을 옥살이한다. 아드바이트는 출소날 사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경찰들을 찾아가 복수를 실행한다. 


3. 아드바이트의 액션은 리얼함과 판타지 그 어디쯤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격투의 현실성은 떨어지고, 그렇다고 중국 무협같은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도 아닌, 무적의 액션장면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4. 영화 [말랑]의 사랑과 복수는 마치 뮤직비디오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잠깐 쉬었다가 노래가 나오고 그 노래에 맞추어 화려한 영상이 시작된다. 뮤직비디오 예닐곱편이 이어지면서 영화는 극적 구성을 갖춘 듯한 모양새다. 짧은 영상에 빠져있는 현대인의 집중력에 딱 들어맞는 구성이라 해야 할까.


5.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허술한 것은 아니다. 영화 [말랑]은 끊임없는 교차편집으로 복수의 장면과 왜 이런 복수를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교차편집이 이어지다보니 다소 흐름이 끊기는 기분도 들지만, 나름 사건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측면도 있다. 그리고 사건의 단서가 되는 것들을 교차편집 속에 드러내면서 허술할 것 같은 이야기의 전개가 나름 반전을 갖추는 정교함도 보여준다. 


6. 영화 [말랑]의 말랑은(영화 속에서 '마랑'으로 들리는데) '방랑자'라는 뜻이다. 사라와 아드바이트는 자유를 찾아 거처없는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억압에서 벗어나면 매듭을 풀어나간다.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이 대부분 익스트림스포츠와 마약이다. 히피의 자유정신보다는 신자유주의의 쾌락적 소비에 가까워보인다. 그래서일까. 마약공급자이면서 이들 연인을 도와주는 인물은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 선배로서 그 여행의 끝이 불행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유란 결코 방종이 아니다. 사라와 아드바이트는 매듭을 풀어내며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배울 수 있으리라.  


7. 영화 [말랑]속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악질경찰뿐만 아니라 주인공 연인을 결국 돕게되는 경찰마저도 상대를 향해 총을 쉽게 쏜다. 자유를 말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경찰의 모습 속에서 인권은 저 멀리 있다. 

악질 경찰인 마이클은 초반 정의의 사도처럼 보여졌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남성성을 거세당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 트라우마 탓에 잃어버린 남성성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그 집착이 온갖 악행을 일삼게 만든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경찰의 무지막지한 공권력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듯하다.  

영화 [말랑]이 말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 그 자유를 느끼는 방랑자의 표상이 위태롭게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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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일 22도~33도 맑음 폭염주의보


올봄 칡이 한창 새순을 내기 시작할 때 칡순을 따서 칡잎차를 만들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맛을 보라고 조금씩 나눠주기도 했는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구수한 잎차의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새순이 나고 조금 지난 후 칡이 한창 자랄 때는 칡을 잘라서 줄기를 말려 칡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칡차는 햇볕에 잘 말린다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곰팡이가 생겨서 보관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엔 칡은 보이는대로 없애는데 치중했다. 칡은 워낙 빨리 성장하는데다 덩굴성이라 다른 작물을 감싸 재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숲을 빠르게 점령하는 탓에 지자체들이 칡을 없애기 위해 들이는 비용도 만만치않다. 


칡은 약재로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뿌리에서 꽃, 잎까지 다양하게 쓸 수 있는데다, 야생에서 생존력이 강해 최고의 재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내몰기에 최악의 식물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칡은 극과 극의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일단 블루베리와 체리나무가 있는 곳의 칡은 최대한 없애는데 치중하고, 뽕나무 근처에 있는 칡은 놔두었다. 칡꽃이 피면 말려 차로 만들어보기 위해서다. 



드디어 칡꽃이 피기 시작했다. 칡꽃도 바라보고 있으면 꽤 예쁘다. 



다만 다른 꽃들과는 달리 무리를 지어 필 때 예쁜 정도가 훨씬 커지는 것은 아닌듯하다. 



하지만 꽃을 따서 한 그릇에 담아보니 색다른 매력을 풍긴다. 



칡꽃은 갈화라고 해서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한다. 이때 갈화는 자주색의 꽃이 활짝 피기전 봉우리가 맺혀있을 때 채취해 말린 걸 이용한다. 갈화는 칡 하면 떠오르는 술독 해독에 좋고, 갈증 해소에도 도움을 준다. 식욕이 부진하거나 복부팽만일 때도 갈화를 달인 물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만 모든 약재가 그렇듯 자신의 체질과 궁합이 맞는지를 잘 따져야만 한다. 


칡꽃이 다소 피긴 했지만, 꽃봉오리들을 채취해서 햇볕에 말리고 있다. 꽃봉오리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떼어서 말려야 하지만, 꽃 전체 모습이 예뻐서 일단 다 말리고 있다. 꽃이 핀 것들도 잘 말리면 차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칡을 보고 있자니, 좋고 나쁨이란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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