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건즈 아킴보]를 보고 있자면 정신이 산만해진다. 할리우드식 액션과는 다른 느낌이다. 몰입감이나 압도감보다는 자유분방함이 물씬 풍긴다. 게다가 피가 튀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잔혹함마저도 게임하듯 가볍게 다룬다. 그야말로 B급 정서가 한가득이다. 이런 정서를 좋아한다면 강추. 하지만 정공법이나 정통 액션을 좋아한다면 글쎄...

 

2. 제목 [건즈 아킴보]에서 아킴보는 두 손으로 권총을 쏘는 자세를 말한다고 한다. 주인공은 어느날 술에 취해 실제 생명을 건 전투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내는 온라인 채널 '스키즘'에 욕 한바가지를 퍼붓는다. 이탓에 스키즘 무리가 찾아와 두 손에 권총을 박고 다음 대결의 주인공으로 선택한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3. [건즈 아킴보]라는 영화가 생사를 건 전투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그저 게임을 영화로 옮겨온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죽거나 죽이거나의 선택을 뛰어넘는 계략과 등장인물들의 뜻하지 않은 관계들이 이야기의 재미를 준다. 게다가 두 손이 총과 붙어있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곳곳에서 웃음을 폭발시킨다. 

 

4. [건즈 아킴보]를 이끌어가는 핵심은 스키즘이라는 온라인 채널이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열광한다. 사업은 규모를 키워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가 프랜차이즈를 만들 계획이다. 잔인한 살상 게임을 응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없다면 스키즘은 오직 그들만의 리그로 끝났을 것이다. n번방 사건도 스키즘과 다를바 없다. 제작하고 만든 이들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만, 그것을 소비하고 응원하는 사람들 또한 주동자인 것이다.

 

5. 스키즘을 소비하는 이들에겐 오직 자극만이 최고의 가치다.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목숨마저도 재미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들에겐 후회나 반성도 없다. 오직 새로운 자극만을 쫓을 뿐이다. 좀더 큰 자극만 얻을 수 있다면 누가 됐든 무엇이 됐든 상관없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욕과 비판마저도 자극의 소재가 된다. 감각만을 쫓는 인권과 생명에 대한 무감각의 소치. 이들에게 '아킴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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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1도 ~21도

 

벌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 벌레들을 먹고 사는 천적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청개구리가 펄쩍! 다른 개구리들도 겨울잠에서 벗어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큰 벌레들은 개구리들이 많이 잡아먹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개구리를 먹고사는 뱀이 나타날까봐서다. 2년 전에는 꽃뱀이 집 안으로까지 들어올뻔해서 까무라칠뻔했다. 그 이후로는 뱀을 보지 못했지만, 개구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은근히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이제 작업을 할 때면 긴 장화를 신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블루베리 나무 1그루당 최소 거미가 1마리씩은 살고 있는 것 같다. 물을 주다보면 물을 피해 거미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열심히 벌레를 잡아먹으라고 응원한다. 물론 이 거미들이 집밖에 거미줄을 치는 것은 사양하지만.

 

제비꽃이 예쁘다. 주위 나무와 풀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생태계의 균형을 통해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고자 한다. 거미와 개구리는 큰 응원군이다. 건강한 생태 속에서 나무도 건강하게 자라리라 믿는다.

 

하지만 날이 따뜻해지면서 집 지붕 밑에 자꾸 집을 지으려는 말벌은 쫓아내고 있다. 제발, 멀리 멀리 가줘~ 시골살이 또한 결코 방심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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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스님 지음 / 정토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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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만들어진 것을 따라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다. 삶도 마찬가지일까. 본보기가 있다면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 될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까.

 

본보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인을 추앙한다. 하지만 성인은 추앙의 대상이 아니라, 즉 모심의 대상이 아니라, 따라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경우가 많다.

 

받들어 모시는 행위가 치우치면 종교의 극단적 측면이 될 수 있다. 그들의 행위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자신의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든,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복을 비는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본받아 살 것을 다짐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법륜 스님이 쓴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은 왜 우리가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 때까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수행서이다.

 

이 책은 싯다르타가 왕자로서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버리고 출가를 선택한 과정,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을 서슴치않다가 중도를 깨닫는 과정, 삶이 고통임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설교하는 과정, 그리고 열반에 드는 과정을 이야기 들려주듯 재미있고 쉽게 전달한다.  

 

싯다르타의 삶의 궤적 속에서 우리가 탐, 진, 치 즉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알게되고, 그 방법적 측면으로 사성제(고집멸도)와 팔정도를 접하게 된다. 일체가 무상함을 알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로 접어들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의 길이 바로 붓다의 길인 것이다.

 

실상 성인이 되는 길은 어렵고 힘들며, 궂이 꼭 성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는 다른 대안이 있을까. 붓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곰곰히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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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1도 ~ 19도

 

 

도라지 씨앗을 뿌려두었던 곳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싹이 도라지인지 다른 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도라지씨앗을 한줄로 길게 심어놨으니, 싹이 튼 것들이 선을 이루어 난 것이라면 도라지일 것이요, 흩트러져 난다면 다른 풀일 가능성이 높다. 

 

질서다. 줄을 이루어 나는 질서. 질서는 관리와 통제의 수단이다. 하지만 이 질서가 없다면 도라지는 풀과 뒤엉켜 생존투쟁을 벌여야하고, 살아남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질서를 이룸으로써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줄이고, 성장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꼭 질서가 최선인 것은 아니다.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져 온힘을 다해 자라나 자신의 생명력을 싹틔울 수도 있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격리를 잘 지켜줌으로써 점차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거리두기도 자가격리도 지키지않는, 즉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 탓에 위태로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초기 자유분방함을 누렸던 유럽과 미국은 코로나19룰 헤쳐나가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질서가 비록 관리와 통제라는 모습을 지닐지라도, 우리에겐 필요한 덕목이다. 물론 적절함이 관건일 것이다. 도라지싹인지의 여부는 조금만 기다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질서를 지키는 도라지싹들을 위해 농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더덕 씨앗도 뿌렸다. 열매 속에 씨앗을 선별해놓지 않았던 탓에 열매를 으깨가며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얼마만큼 뿌려졌는지 구별이 안간다. 일단 심어놓고 보자, 라는 심산으로 뿌려놓은 것이다. 시간이 흘러보면 알 수 있겠지. 

 

도라지는 싹을 틔우는 것 같은데, 비슷한 시기 심었던 상추는 아직 기별도 없다. 좀 더 지켜보다 싹이 트지 않는다면 새로 싹을 뿌릴 생각이다. 지난번에 뿌렸던 것은 묵힌 씨앗이었다. 몇일 전 토종 담배상추라는 씨앗을 얻었다. 상추가 나지 않는다면 토종상추씨앗을 뿌려볼 심산이다. 

 

 

날이 따듯해지니 벌레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온전치 않기에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레가 떠~억 하니 자리를 잡았다. 돌배나무에 유독 노랑쐐기나방고치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 몇개가 부화한듯하다. 눈에 보이는대로 없앤다고 없앴지만, 물리적 방제에는 한계가 있다. 꼼꼼하게 살펴봐야하는 예찰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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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새로운 촬영, 편집 기법으로 관객의 눈길을 끈다. 마치 단 한 번의 촬영으로 영화 전체를 찍은듯하여, 관객은 주인공들과 함께 영화속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중간에 딱 한 번 암전을 제외하곤 컷팅된 흔적없이 화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현장에 함께 있는듯한 몰입감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원 컨티뉴어스 숏은 영화 촬영과 편집 기술의 과도기적 출연으로 보아야 할듯하다. 돔 형태의 거대한 세트장을 짓고 천장에 수십대에서 수백대의 카메라를 설치한 후 촬영을 하는 볼류메트릭 기법이 곧 도입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볼류메트릭 기법이 일반화된다면 3D 영상은 물론 주인공 각각의 시선이나 심지어 말이나 자동차 등의 관점에서 끊기지 않는 화면을 얻을 수 있게된다. 초점은 연기자들이 어떻게 연기할 것이냐와, 수많은 정보데이터를 어떻게 편집하느냐로 옮겨갈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이런 촬영에 동영상정보데이터를 수집할 슈퍼컴퓨터 등 비용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엔 카메라 1대와 컴퓨터 1대로도 이런 촬영이 가능한 기술이 개발됐다고 한다. 머지않아 영화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숏의 고전이 되거나, 또는 원시인의 돌도끼 정도의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2. 영화는 1917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의 함정을 알아채고 멀리 떨어진 부대의 공격명령을 취소하도록 두 병사를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이 두 병사의 동선을 따라가며 일어나는 사건과 심리적 변화를 보여준다.

전투 중에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군을 살리려는 양심과, 두려움이 그 양심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호의를 살의로 되갚는 모습 속에서 전쟁의 참상을 비치고 있다. 또 함정 속으로 들어가는 작전을 말류하는 상관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오직 적군을 없애겠다는 맹목적 목표아래 전진을 외칠 지 모르는 장교가 등장한다. 반대로 지금이 절호의 기회임을 모르고 후퇴를 외쳤다가, 불리한 조건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지 모르는 공격을 외치는 지휘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사람과 사람간의 신뢰를 죽이는 행위인 것이다.

 

3. 영화 [1917]은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 스코필드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또한 나무에 기대어 쉬는 스코필드의 모습으로 끝난다. 영화 중간에선 폐허가 된 마을 언덕에 체리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열매를 수확할 수는 없지만 내년엔 더 크고 튼튼하게 자라나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한자 휴休는 나무에 기대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휴식이란 스코필드처럼 나무에 기대어 숨을 내쉬는 것이다. 휴식 속에서 평화를 느낀다. 생명이 자신의 생명력을 온전하게 쏟아붓고 나서의 평온한 휴식. 우리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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