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인간은 왜 필요할까?

먼저 이 질문을 던져본다. 복제동물에 대한 연구로 개와 고양이를 비롯해 다양한 동물들이 복제되고 있다. 이 복제의 최종 목적지는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 왜? 복제를 하겠다는 것일까. 노동력이 필요해서? 그건 자동화 로봇이 대신 할텐데... 그럼 영화 <아일랜드>에서처럼 장기 이식이나 대리출산을 위해서? 하지만 복제를 통한 것보다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보다 더 안전하게 출산과 장수를 누리지 않을까? 영화 <AI>처럼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리가족의 역할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터미네이터>처럼 전쟁도구로...

뭐, 어떤 것이 됐든 복제인간은 도구로서의 역할일 뿐, 복제인간 자체가 주체적 인격을 가진 생명체로 대접받지는 못할 것 같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한다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사냥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 <레플리카>는 복제인간에 대한 욕망이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고로 아내와 아이들 셋을 모두 잃은 주인공(키아누 리브스). 그는 가족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복제인간기술을 이용한다.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복제기술을 이용해 당장 복제 가능한 수는 셋뿐. 네 명의 가족 중 3명만을 복제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어떤 1명을 제외하도록 선택을 할 것인가? 

하지만 여기까지. 굉장히 철학적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며 출발한 영화는 점차 오락영화로서의 길을 걸어간다. 그렇다고 CG나 액션이 눈길을 끌만큼 화려하거나 멋지게 펼쳐지진 않는다. 다만 복제된 가족을 지키려는 주인공과 이 기술을 이용하려는 세력간의 추격전이 긴장감을 주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다소 아쉽긴 하지만 킬링타임용으론 그럭저럭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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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하다보면 신기하게 느껴질 수도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어디에선가 관심이 있어서 클릭 한 번 해본 상품이 어느 사이트를 가든 주위에서 알랑알랑 거리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데이터 수집을 통한 인공지능으로 관심이 가는 상품을 알려주는 서비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유기농 녹차에 관심을 갖고 오픈마켓에서 검색을 한 이후에는 다른 사이트에서도 유기농 녹차와 관련된 광고들이 따라붙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런 서비스가 우리나라에선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수준은 아닌듯하다. 일단 내가 관심을 갖은 그 상품을 구매했는지 여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광고가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이미 구입했다면 별로 소용이 없는 정보가 될텐데 말이다. 게다가 이 광고에서 나온 상품이 나에게 만족을 줄 정도의 것인지 여부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보인다. 그저 광고료를 가장 많이 지급할 의사가 또는 능력이 있는 기업의 제품이 광고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또하나, 내가 의도를 가지고 클릭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 버그로 인해 잘못 눌러진 경우엔 구매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클릭이 됐다는 것만으로 관련광고가 계속해서 따라온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준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1회성 클릭인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서 검색 등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서 클릭하는 시간의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까지만이라도 데이터로 갖고 분석을 한다면 어느 정도 구매의사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이다. 

우리 삶의 편의를 위한 관심상품과 추천상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인공지능의 발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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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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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단어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읽게 된다. 그렇게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가령 다음 글을 한 번 보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76쪽)

 

징검다리를 건너듯 한 단어 한 단어를 디디고 건너가야지, 자동차를 타고 씽~ 지나가듯 읽어낼 수가 없다. 혹여 그렇게 술술 읽다보면 갑자기 무슨 글을 읽었는지 영문도 모른채 지나치게 된다. 그러다 아차차! 하며 다시 술술 읽었던 부분의 처음을 찾아 꼭꼭 다시 씹어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불편함? 또는 이런 섬세함이 바로 김훈의 글맛이라 할 것이다.

 

또한 김훈의 글은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는 것이 거의 없다. 기자 출신의 글쟁이들의 직업병마냥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진다. 이번 책의 <밥과 똥>을 한번 보자. 그 글 속에서는 다양한 출처가 쏟아져나온다.

 

국립생태원 소식지, 삼국유사, 일본 메이지 유신 분뇨 취급규칙, 고양 화장실 전시관의 전시자료. 동의보감, 정약용 <민보의>, 정약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약성서 신명기, 정의도 논문 <청동숟가락의 등장과 확산>, 유기영 논문 <저탄소 지비용형 서울시 분뇨처리권역 재설정기법 개발연구> 2012, 대가람의 뒷간 도록.

 

여기에 더해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담이 살을 붙인다. 출처라는 뼈와 경험이라는 살이 더해져 글은 생명력을 뿜어낸다. 글의 출처들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주는 물과 같아 글 곳곳에 잘 스며들어간다. 

 

아무튼 이번 책 또한 삶의 현장을 많이 노래하고 있다. 그의 글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에서 <이승이 좋다>가 아니라 <개똥밭에 굴러도>에 방점을 찍는듯이 보인다. 삶의 주름과 눈물을 이야기하면서 또한 미소와 흥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번 책에서는 유독 <전환>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단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신중한 그가 변화나 진화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고 전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일단 전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부분을 살펴본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오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222쪽) 오이지를 먹으며 중

 

생명은 그 자비없는 시간에 쓸리면서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저 자신을 전환시키는데, 저 자신을 전환시키지 못하는 것들은 모조리 멸종해서 그 생명을 미래에 전할 수 없다. 이  전환이 건너뛰기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고, 수백만 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멸종들의 무덤을 딛고 서서히 이루어진다. (449쪽) 고래를 기다리며 중

 

전환 속에는 분명 진보나 발전이라는 개념은 없다. 변화는 수동과 능동의 형태가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전환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야 벌어지는 것들이다. 책 속에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그의 심정을 이해해가는 부분에서도 이순신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삶의 위대함은 또는 위대한 삶이란 바로 이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까.변화를 요구하는 시대, 진화가 필요한 시대에서 우리는 전환을 도모해야 할련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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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추석 연휴기간 동안 TV를 보다가 우연히 e스포츠 대회를 지켜봤다. 마지막 1명이 남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는 배틀로얄 형식의 슈팅 게임이었다. 바로 <배틀 그라운드>였다. 평상시같으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무엇인가 묘하게 끌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당장 어플을 다운받았다.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인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100명의 전투원이 모이면(개인이 아닌 팀별로 전투를 벌이는 것도 있지만) 비행기가 이륙하고, 각자 지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곳에 낙하하기 시작한다. 낙하할 땐 모두 맨몸이다. 무기는 오직 주먹 하나뿐이다. 아이템이 많이 있는 곳엔 사람들도 모이는 법. 각자 아이템을 먼저 얻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하! 그렇구나. 모두 똑같이 맨손으로 시작한다는 것. 그게 이 게임의 매력포인트 하나다. 생김새는 모두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능력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면 레벨이 상승하기에 같은 레벨에선 실력차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게임을 많이 하면 할수록 전투장에 대한 정보가 쌓여 보다 나은 아이템을 빨리 습득할 수 있을 가능성은 높다. 만약 그렇게 정보를 쌓고 실력을 키운다면 레벨이 상승할 가능성이 커진다. 바로 이 부분이 이 게임의 또다른 매력 포인트 하나. 

그리고 어디에 적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 싸움을 할 수 있는 지역은 점차 좁혀진다는 점. 남아있는 숫자가 적어질 수록 전투지역은 좁아져 결국 한 곳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한 게임이 보통 30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장점이 된다. 또한 전투를 좋아하는 유형이라면 밀집지역으로 가서 전투에 치중하고, 생존을 좋아하는 유형이라면 한적한 곳에서 차곡차곡 아이템을 얻는 방법을 취하는 등 각자의 취향에 따라 전술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 게임이 매력적인 것은 자신의 취향을 거슬러 생존이 아닌 전투로, 전투가 아닌 생존으로 도전해볼 마음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을 자극한다는 것이 이 게임의 진정한 매력 포인트 하나다.  

오랜만에 게임을 했더니.... 어라? 꿈속에서도 나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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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엑스맨 시리즈가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시선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돌연변이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초능력은 감독의 시선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포장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감독의 시선보다는 변이들의 특이성이나 액션의 화려함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2. 진화라는 것은 변이를 통해서 진행되고, 이 변이는 뛰어난 능력이라기 보다는 환경에의 적응력을 통해 유전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물론 다른 동물들도 그렇겠지만)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을 폭력을 통해 다른 것을 제거하거나 억제함으로써 해결해왔다. 그런데 만약 변이 중에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쉽게 제거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이 존재들이 더 커지기 전에 어떻게든 제거하려 할 것이다. 항상 이들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공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변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울 것인지, 타협을 통해 공존의 방법을 찾을 것인지.

 

3. 다크 피닉스 편은 다른 돌연변이들의 능력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능력을 지닌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칼을 잡은 사람이 그것을 통해 사익을 취하고자 한다면 도둑이 될 것이요, 타인을 위해 움직인다면 의사가 될 것이다. 힘은 어떤 의도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엑스맨에서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갈등하도록 만든다. 이 갈등의 원천은 자신을 대하는 상대의 태도에 있다. 나를 이용하려는 자인지, 사랑하는 자인지. 즉 아침이슬을 먹고 독을 품는 뱀이나, 우유를 생산하는 소처럼 서로 다른 길이 운명적,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보지않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구조(사회)가 자신을 뱀이 되게 만들지 소가 되게 만들지 결정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규모를 줄여서 자신과 관계를 맺는 집단 속에서 힘의 향방이 갈린다.

 

4.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은 두렵다. 하지만 그 힘에 내편이라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힘이 내편 네편 가리지 않고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더 안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딸이지만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던 힘을 지녔기에 책임지지 않았던 부모는 이 힘에 악한 성정을 씌운다. 한국영화 <마녀>에서의 힘이 비뚤어지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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