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시기에 딱 맞추어 개봉되었다는 행운. 1920년 실제 벌어졌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의 완벽한 승리, 봉오동 전투를 그려냈다.

 

2. 항일 독립투쟁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 명확한 선악구도를 가정한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이 구도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다. 캐릭터의 묘미나 사건 전개의 흥미는 이런 구도 속에서 찾아보는 건 힘들다. 다만 선이 악을 응징하는 쾌감만은 강렬하다.

 

3. 그래서 이런 류의 영화가 가져야 할 승부수는 전쟁신의 묘사에 있을 법하다. 즉 액션장면이 주는 통쾌함이 관객의 만족도를 높여줄 것이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의 총격장면은 참신한 부분을 찾는게 힘들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전쟁영화 속에서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장면 하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짐작케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류해진의 칼이었을 것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 칼로 승부를 건다는 것. 단지 칼과 칼의 부딪힘이 아니라 전장 속을 뛰어다니며 마치 활처럼, 또 마치 총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장면이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일터이다. 하지만 류해진의 칼도 그리 날이 서 있진 못했다.

 

4. 영화 속 촌장도 박휘순도 기꺼이 자기 희생을 치른다. 우리의 독립은 폭력에 굴하지 않는 수많은 피 덕분이었음을 또 한번 각인시킨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완전한 독립을 위해 우린 오늘 무엇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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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1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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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 지금도 방 안을 돌아다니는 개미를 보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떠올린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지만 그만큼 강렬한 반전을 안겨준 소설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베르베르의 이후 소설 중 <개미>를 뛰어넘는 소설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베르베르는 <개미> 이후 <타나토노트><천사들의 제국><신> 등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줬다. 이 책 <죽음>은 이런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나 <상상력 사전> 등에 나온 독특한 일화나 사건, 사실 등이 섞여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소설은 대중문학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가 어느날 독살되고, 그 영혼이 자신의 살인자를 찾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 이승과 저승의 연결, 영매, 환생 등의 소재는 상상을 자극하는 재미를 준다. 또한 살아있는 육체와 그 육체를 매개로 한 감각, 현실의 순간 등을 소중히 여기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적 구성이 흥미를 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들,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내버려두자'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큰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게다가 범인이 드러났을 때의 반전은 예측하진 못했지만, 크게 놀라지 않는 수준인지라 다소 김이 새는 측면도 있다.

이번 소설은 마치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중문학의 저자가 고상함을 자랑하는 전통문학자들을 비판하고, 프랑스 문학 전반에 대한 평가와 함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지식인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마당으로 쓰인듯하다. 그럼에도 여기 저기 튀어나오는 유명인들의 영혼과, 실제 역사 속에 기록되어져 있는 신비한 일들이 엮어지는 재미를 무시할 순 없다. 그리고 죽어서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듯한 주인공의 삶과 죽음의 행로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보며 현재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잠깐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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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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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힘을 다 쏟은듯 지쳐버렸나요? 그냥 갑자기 눈물이 흐를듯 외롭나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허무감이 밀려오나요? 그럴 때면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 우울과 피곤, 허무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갖고 있습니까?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의 저자 고미숙은 친구들과 낭송을 하라고 합니다. 낭송은 몸과 머리를 함께 쓰는 일(외우고 말해야 하므로)이자, 우정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던 영혼과 육체를 깨우고, 인연을 짓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함께 하는 낭송이라는 활동을 통해 삶에 대한 탐구도 수반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낭송은 또한 진정한 휴식을 건넵니다. 반면 우린 우울과 피곤, 허무를 지워내기 위해 지금까지 쾌락을 추구해왔는지 모릅니다.

 

쾌락이냐 휴식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호흡과 유연성이라는 사실이다

즉 휴식은 숨결이 고르게 되고 근육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을 구분짓게 만드는 핵심은 속도에 있습니다.

 

빠르고 거칠고 공격적인 리듬, 그것이 열정이고 광기다. 이걸 하루 종일 주입받고 있으니 어찌 쉴 수 있겠는가. 잠시라도 쉬면 죽을 것 같다. 이것이 불안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초조해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 그것만이 불안을 없애고 마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흔히들 우리는 이런 휴식이 물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물적 부를 가지고 있어야 느긋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꼭 부자여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타의에 의한 가난은 빈곤이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청빈이고, 청빈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윤리다. 또 고정된 정체성이 없으니 사람이든 일이든 인연의 오고감에 따라 무상하게 흘러갈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즉  오히려 백수가 지성을 연마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며, 백수를 찬양합니다. 욕망 혹은 환상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자유! 백수에겐 바로 이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슴을 타인의 노래로 채우지 마라!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린 불안을 내포한 쾌락을 보장하는 부를 저버리고, 청빈한 백수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물적 부만 주어진다면 삶의 진리와 상관없이, 아니 물적 부가 삶의 진리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 자본주의 시대에, 비록 자신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앵무새가 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심해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차피 끊임없는 욕망에 갇혀 산다면, 물질적 편리와 안락함의 욕망보다는 삶의 진리에 대한 욕망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낭랑하게 낭송하라,필사적으로 필사하라,글로벌하게 글쓰기 하라.

 

삶을 이야기할 진짜 친구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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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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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등장때문일까, 아니면 세계 역사의 흐름상 트럼프가 나타난 걸까?

미국을 비롯해 일본은 물론 영국 등등 국가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세계의 통합이라는 흐름은 깨지고, 자국중심의 정치세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순 없다. EU도 위태롭고 국가를 넘어선 통합체들이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수정자본주의가 신자본주의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고 승자독식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내것이 먼저가 됐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 중 3가지 이슈는 어떤 한 국가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핵전쟁, 생태적 위험, 사물인터넷을 넘어선 생체측정과 AI의 결합이다. 이 3가지는 전세계가 합심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종교로도 해결이 어려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보다 통제하려한다.

 

앞으로 닥쳐올 문제들이 우리에게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핵이 주는 고통은 최근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도 지켜볼 수 있다. 물을 사 먹고 공기를 구입하는 시대, 초미세먼지가 주는 고통은 어떠한가. 생체를 측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보다 편안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격차를 크게 만들고 이에 따른 의료 격차 등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더욱 크게 만든다. 우리의 생체 데이터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세속주의자가 과학적 진실을 중시하는것도 지적호기심을 중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올 난제들도 우리는 과학적 진실 등을 통해 우리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말조차 어불성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기술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진짜 현실이라는 것도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진짜 나라는 것도 모두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수 없게된다.

 

우리의 욕망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느낌, 욕망에 덜 집착할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의지의 폭정에서 좀더 자유로워질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했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패턴에 있다는 사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라는 것 또한

 

정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않다. 조작용 껍질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위해 내디뎌야할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 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정신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의 욕망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명상(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이 책은 명상추천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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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생태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5
김윤성 지음, 권재준 그림 / 개마고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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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봄이 왔는데도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상의 마을을 통해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슨 이전에도 생태와 관련된 논의는 있어왔다. 그리고 카슨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생태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책은 이런 생태에 대한 생각을 개괄적으로 죽 훑어보여주고 있다. 생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그 시선들의 장단점, 그리고 오히려 악용 또는 오용될 수 있는 여지 등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생태학을 크게 두 줄기로 파악하고 있다. 시스템적 관점에서 전체 특징을 분석하는 오덤학파와 진화론적 관점에서 염색체 수준의 설명을 시도하려는 맥아더 학파이다. 즉 전체주의와 환원주의로 거칠게 나눌 수 있겠는데, 생태에 대한 설명 또한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가지의 절묘한 결합이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주의깊에 들여다본 부분은 종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이다. 맥아더와 윌슨은 해마다 지구에서 14만종의 동식물이 사라진다면서 종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종이 다양해질수록 지구 생태계가 풍성해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종이 다양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먼저 극단적 예를 하나 들어보면, 숲을 허물고 도시를 만들면서 숲에 살던 다양한 동식물이 사라졌다. 대신 도시 속에서 인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들의 종은 대폭 늘어났다. 지구 생물의 90%는 곤충류에 속한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가설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즉 종 자체는 오히려 다양해졌지만, 무엇인가 생태적 균형을 잃어버린 모양새다. 메이는 생태계 생물들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록 생태계가 불안정해진다고 본다. 특히 그 관계 중 벼리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종이 있다면, 그 종의 사라짐이나 증대로 인해 생태계가 깨져버릴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성이나 복잡성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공진화의 양상이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생태계에 불안정한 이유는 생태계의 구조가 단순해서가 아니라는 관점과 일치한다. 대신 해충이나 기생충이 작물과 맺는 공진화의 관계가 무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해충이 나타나면 살충제로 박멸시키고, 다시 내성을 갖춘 해충이 발생하는데, 해충과 내성제 싸움에서 작물들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공진화를 함께 하지 못하고 해충과 전염병에 약하게 변모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보완하는 측면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GMO라 여겨진다. 하지만 GMO는 공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또다른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곳곳의 농업은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살충제와 살균제를 사방에 뿌려대고 있다. 오직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이다. 즉 경제적 이윤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적 피해로 인한 손실은 농업의 득실 계산에서 빠져있다. 땅의 황폐화와 수질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농부의 장부 어디에도 기록되어져 있지 않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천을 유지하고 플랑크톤과 수초를 잘 자라도록 만드는 활동은 경제적 활동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없이는 결코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을 수가 없다. 농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태적 활동까지 포함하는 경제학이 바로 생태경제학이다.

 

우리의 농수산업도 이런 생태경제학점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 지구온난화 속에서 지속적 농업과 어업이 가능하기 위해선 당장의 눈앞 이득만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경제에 대한 수고를 인정해주는 제도가 정착되어야지만, 우리는 먼 미래 우리 자손들에게도 풍부한 농수산물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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