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서야 영화 <기생충>을 봤다. 다행히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않아서 극의 전개가 주는 재미는 충분히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의 '냄새에 대한 이야기'라는 평이 영화를 보는 시선에 방점을 찍어대는 통에 나만의 관점을 갖는데 다소 어려움을 느꼈다. 게다가 감독이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라고 힌트를 주는 인터뷰를 들었던지라 자연스레 관점이 한정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봉테일'다운 디테일과 나름의 반전으로 충분히 재미있었다. 특히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계층간의 격차는 '선을 넘지 말라'는 박동익 사장의 충고가 주는 공간적 상징과도 잘 들어맞는다.

 

전원백수 기택의 가족이 사는 곳은 반지하이다. 건물 중 반지하라는 공간은 방공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싸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게 됐고, 세월이 흘러 이제 반지하라는 공간은 법적으로 신규건물에 지어질 수 없게 되면서 고시원이라는 공간이 그 자리를 점차 대신하고 있다.- 웹툰 <타인은 지옥이다>는 이 고시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기생충의 이미지가 차고 넘친다.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의 집에 기생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공간 또한 지하이다. 이 지하의 공간도 방공의 개념이나 은신처의 개념이다. 이 공간들은 상주의 공간이 아니라 임시거처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임시가 아닌 상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빈민들이다. 반지하나 지하의 공간은 햇빛을 마음대로 쐴 수 없다. 기택의 가족이 들어가기 전 이 지하에서 기생하고 있던 가정부 문광의 부부는 주인이 없을 때면 지하의 공간에서 나와 햇빛을 즐긴다.

 

지하의 삶은 그 공간이 주는 냄새가 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의 냄새마냥 말이다. 그런데 이 냄새라는 것은 공간의 한계를 넘어 퍼져나간다. 결국 공간성이 무너지면서 영화의 종반 극적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회성에 그치는 우발적 사고에 그치고, 지하에 기생하는 기생충의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 공간의 역전이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이 지하의 공간에서 기생충끼리의 슬픈 대결만이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잔존한다.

 

과연 지하의 공간은 지상의 공간과 벽과 문 없이 열린 공간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보다 견고해지는 지상과 지하를 가누는 벽은 우리 일상의 공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젠 지상에서조차 철조망을 치며 경계를 나눈다. 임대주택과의 경계는 박 사장 집의 지하실 문과 꼭 닮아 있다. 그런데 그 경계를 허무는 방법을 찾기위한 기생충의 연대 보다는 경계안에서 안주하기 위한 기생충간의 경쟁이 더 우선되기에 경계는 그 경계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사족 :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소장이 말하는 슈필라움(놀이+공간)은 지하에서도 가능한 일일까. 갇혀있는 지하에선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지상과 지하가 자유롭게 뚫려 소통가능하다면 지하에서의 슈필라움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만의 공간은 동굴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든 자신이 마음내킬 때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때만이 진정 슈필라움이 되는게 아닐까. 공간에서 빛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 이것이 기생이 아닌 공생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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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기다려지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바로 <60일, 지정생존자>다.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드를 보지 않은 시청자 입장에서, 원작의 흔적을 찾는게 쉽지않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무너지고,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수반이 모두 죽는 테러가 발생한다. 환경부 장관인 박무진만이 살아남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는 것으로 드라마는 시작한다.

 

테러를 바라보는 진보와 보수의 시선, 북한과의 관계, 세계정세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 직업적 정치인의 이미지 등 모든 것이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면서 몰입도가 최고이다. 도대체 미드에선 이런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궁금할 정도다. 리메이크가 워낙 잘 만들어지다 보니 오히려 원작이 어땠을까를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얽히고 설키는 상황들이 점차 걷혀지면서, 도대체 테러는 누가 저질렀고, 어떤 목적인가로 이야기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음모론의 색깔이 짙어지고 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비밀세력들이 현대로 옮겨온 모양새다. 드라마 <선덕여왕>과 <육룡이 나르샤>의 무명이나, <뿌리깊은 나무>의 밀본 처럼 실제 권력 뒤에 숨겨진 숨은 권력자 또는 그 세력들이 세상을 주무르고 있다는 설정이 못내 아쉽다.

 

음모론적 세계관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을 때 등장한다. 도대체 이해가지 않는 사건들이 등장하게 되면 우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음모론을 가져온다. 그런데 우린 현실에서 비선 실세라는 만화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음모론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보다 세련된 이야기라면 음모론의 재미보다는 권력의 역학관계를 잘 파헤치는 스릴러로 승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60일, 지정생존자>가 음모론에 치중하기 보다는 현실적 역학관계를 보다 잘 벗겨내기를 기대해본다.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보고싶다"는 차영진 비서실장의 말 속에서 이 드라마의 힘이 커져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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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8-07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주목해서 보는 드라맙니다.
저도 하루살이님과 같은 생각이구요.
미드를 볼까 말까 갈등하게 만들더군요.
우리 드라마는 시작은 좋은데 중반쯤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게 불안불안하더라구요.
여전히 그 밥에 그 나물 할 건가?
미드가 기대가 되긴 하는데 거긴 또 정치상황이 우리와
다를 것 같아 골머리 써 가며 봐야할 것도 같고...
 
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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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화장실 가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스릴러 소설을 읽는 것이다. 이번에 선택한 책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이다. 시나리오를 전공한 저자답게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듯 영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영화화에 알맞은 극적 구성은 마치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연상케했다. 다만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이나 반전의 묘미는 <나를 찾아줘>보다는 아주 조금 떨어지게 느껴졌다.  

사건은 이렇다. 남편을 살해한 여자주인공은 몇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심리상담가인 남자주인공은 여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지원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여주인공의 갇혀진 심리를 해방시켜보고자 한다. 소설은 남자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와 여자주인공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일기장을 통해 긴장감을 높여나간다. 그리고 이 소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신화 <알케스티스>는 사건의 해결점이자 인간 감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아무튼 이 책 <사일런트 페이션트>도 그렇고,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도 그렇지만, 현재의 나란 과거의 내가 이루어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현재 내가 판단하고 느끼는 것들은 과거의 내가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내가 뜻한대로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은 지금,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통해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거를 판단없이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때의 사건과 감정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는 비로서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아무튼 두 소설 모두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이들의 비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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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충분히 오고 햇볕이 따가우니, 풀들이 정신없이 자란다. 블루베리 밭은 손으로 뽑고 자른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또 블루베리 키만큼이나 자라있다.

체리와 구기자가 심겨진 곳은 예초한지 한 달여가 지나있어서 허벅지 정도까지 풀이 자랐다. 이곳은 나무와 나무 사이가 넓어 손이 아니라 예초기를 사용해 풀을 베고 있다. 다만 충전식 예초기라 힘이 강하지 않고 오래 사용할 수 없어 1~2시간 정도만 예초에 전념한다. 환삼덩굴이나 칡 같은 덩굴식물의 예초는 충전식으로 하기에는 다소 벅찬감이 있다. 힘이 약하다보니 잘라내기 보다는 날개에 엉키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다소 방심하는 측면이 있다. 나무에 예초기 날개가 걸리더라도 큰 상처를 주지않고 지나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무 주위 풀은 손으로 뽑거나 발로 밟아서 눕혀주는게 좋은데 예초기를 돌리다 멈추고 이 작업을 하는 게 여간 귀찮은 것이다. 물론 섬세하게 예초기를 돌려 나무에 상처없이 풀만 벨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경지까지는 아직 오르지 못했다.

 

아차차! 바로 실수가 터졌다. 구기자 나무 밑둥을 반 정도 쳐버린 것이다. 이제 막 꽃이 진 자리에 구기자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회복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우리의 혀는, 또는 행동은 간혹 예민하게 주의를 하지않고 무심하게 지나치다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곤 한다.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않은데, 그렇기에 항상 손으로 조심조심 풀을 뽑듯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귀찮다고 힘들다고 지나쳐버리는 순간, 우리의 혀와 행동이 칼날이 되어 타인의 마음을 베어버리는 것이다. 다행히 조그마한 상처라면 얼른 회복하겠지만, 어떨 때는 치명적이기도 하다. 

부디 가까이 다가갈 땐 항상 긴장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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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노지에서 (방울)토마토를 기르는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하우스 안에서 재배할 때는 어느 시기가 되면 적심이라는 것을 한다. 적심이란 (방울)토마토의 생장점을 자르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자라는데 힘쓰지 말고 열매를 맺고 익게 하는데 힘을 쓰라는 것이다. 즉 성장을 멈추고 성숙하라는 것이다. 물론 생장점은 줄기 끝에만 있는 것(끝눈 생장)이 아니라 곁눈(곁눈생장)에도 있다. 그래서 적심을 한 이후에도 곁눈생장점에서 자라는 곁순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렇게 끝눈과 곁눈의 생장점을 활용해-외떡잎식물은 곁눈 생장점이 없다- 나무의 가지를 쳐서(전정) 원하는 모양이나 쓰임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경우는 많다. 사람을 포함해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일정시기가 되면 성장판을 닫아 성장을 멈춘다. 사람의 경우 성장판이 닫히고 나서도 성장호르몬이 나와 성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게 되면 말단거대증이 된다. 성장을 멈추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충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생장점을 잘라버리면 문제가 된다.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을 멈추면 열매를 맺고 익히는 과정도, 즉 성숙의 과정도 약해진다. 성숙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정도로의 성장은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만을 강요한다. 피로사회의 이유라 생각된다. 성장을 멈추고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 성숙의 시간을 넘어 숙성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멈춤을 통해 가능하다. 잠시라도 멈추어보아야 한다. 물론 충분한 성장이 이루어진 뒤에 말이다.

성장을 주저하거나 반대로 성장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성장과 성숙, 그리고 숙성이 모두 이루어져야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 우리에게도 적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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