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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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등장때문일까, 아니면 세계 역사의 흐름상 트럼프가 나타난 걸까?

미국을 비롯해 일본은 물론 영국 등등 국가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세계의 통합이라는 흐름은 깨지고, 자국중심의 정치세력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순 없다. EU도 위태롭고 국가를 넘어선 통합체들이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수정자본주의가 신자본주의로 더욱 경쟁이 치열해지고 승자독식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내것이 먼저가 됐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 중 3가지 이슈는 어떤 한 국가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핵전쟁, 생태적 위험, 사물인터넷을 넘어선 생체측정과 AI의 결합이다. 이 3가지는 전세계가 합심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종교로도 해결이 어려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보다 통제하려한다.

 

앞으로 닥쳐올 문제들이 우리에게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핵이 주는 고통은 최근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도 지켜볼 수 있다. 물을 사 먹고 공기를 구입하는 시대, 초미세먼지가 주는 고통은 어떠한가. 생체를 측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의 발전이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보다 편안한 삶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빈부의 격차를 크게 만들고 이에 따른 의료 격차 등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더욱 크게 만든다. 우리의 생체 데이터가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세속주의자가 과학적 진실을 중시하는것도 지적호기심을 중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올 난제들도 우리는 과학적 진실 등을 통해 우리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말조차 어불성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기술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진짜 현실이라는 것도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진짜 나라는 것도 모두 허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수 없게된다.

 

우리의 욕망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느낌, 욕망에 덜 집착할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의지의 폭정에서 좀더 자유로워질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했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패턴에 있다는 사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라는 것 또한

 

정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않다. 조작용 껍질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위해 내디뎌야할 결정적인 걸음은 자아야 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정신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의 욕망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명상(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이 책은 명상추천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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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이해하는 생태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5
김윤성 지음, 권재준 그림 / 개마고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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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생태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봄이 왔는데도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상의 마을을 통해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슨 이전에도 생태와 관련된 논의는 있어왔다. 그리고 카슨 이후에는 다양한 형태의 생태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책은 이런 생태에 대한 생각을 개괄적으로 죽 훑어보여주고 있다. 생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그 시선들의 장단점, 그리고 오히려 악용 또는 오용될 수 있는 여지 등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생태학을 크게 두 줄기로 파악하고 있다. 시스템적 관점에서 전체 특징을 분석하는 오덤학파와 진화론적 관점에서 염색체 수준의 설명을 시도하려는 맥아더 학파이다. 즉 전체주의와 환원주의로 거칠게 나눌 수 있겠는데, 생태에 대한 설명 또한 다른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가지의 절묘한 결합이 필요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주의깊에 들여다본 부분은 종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이다. 맥아더와 윌슨은 해마다 지구에서 14만종의 동식물이 사라진다면서 종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종이 다양해질수록 지구 생태계가 풍성해질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지만 종이 다양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먼저 극단적 예를 하나 들어보면, 숲을 허물고 도시를 만들면서 숲에 살던 다양한 동식물이 사라졌다. 대신 도시 속에서 인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들의 종은 대폭 늘어났다. 지구 생물의 90%는 곤충류에 속한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의 가설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즉 종 자체는 오히려 다양해졌지만, 무엇인가 생태적 균형을 잃어버린 모양새다. 메이는 생태계 생물들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록 생태계가 불안정해진다고 본다. 특히 그 관계 중 벼리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종이 있다면, 그 종의 사라짐이나 증대로 인해 생태계가 깨져버릴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성이나 복잡성과 함께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공진화의 양상이다.

 

플랜테이션 농장이 생태계에 불안정한 이유는 생태계의 구조가 단순해서가 아니라는 관점과 일치한다. 대신 해충이나 기생충이 작물과 맺는 공진화의 관계가 무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해충이 나타나면 살충제로 박멸시키고, 다시 내성을 갖춘 해충이 발생하는데, 해충과 내성제 싸움에서 작물들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즉 공진화를 함께 하지 못하고 해충과 전염병에 약하게 변모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를 보완하는 측면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GMO라 여겨진다. 하지만 GMO는 공진화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또다른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곳곳의 농업은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 살충제와 살균제를 사방에 뿌려대고 있다. 오직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이유이다. 즉 경제적 이윤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적 피해로 인한 손실은 농업의 득실 계산에서 빠져있다. 땅의 황폐화와 수질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농부의 장부 어디에도 기록되어져 있지 않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하천을 유지하고 플랑크톤과 수초를 잘 자라도록 만드는 활동은 경제적 활동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없이는 결코 물고기를 계속해서 잡을 수가 없다. 농업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태적 활동까지 포함하는 경제학이 바로 생태경제학이다.

 

우리의 농수산업도 이런 생태경제학점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 지구온난화 속에서 지속적 농업과 어업이 가능하기 위해선 당장의 눈앞 이득만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생태경제에 대한 수고를 인정해주는 제도가 정착되어야지만, 우리는 먼 미래 우리 자손들에게도 풍부한 농수산물을 먹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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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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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것이 무너지는 변화가 찾아오면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 변화가 희망적이라면 다행이지만, 앞길이 어두컴컴하다면 '지금까지 내가 뭘 했나?'라는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자괴감을 넘어

 

지금 내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체계가 그 시효를 다 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 시킬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와"라는 말보다 "휴우~"라는 한숨이 많아지고 있다면, 그렇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검토해봐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안경을 낄 것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시기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행복 혹은 좋은 삶에 좀 더 실천 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다. 싫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삶은 어느 순간 좋아져 있다.나쁜 것이 분명해야 그것을 제거할 용기와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고 견딘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아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좋은 삶은 결코 오지않는다.

 

견디며 내쉬는 한탄이 아니라, 견뎌야 할 것들을 하나씩 없애나가며 내 삶에 다가오는 변화에 감탄하는 삶을 위해 애써야 할 순간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조차 구별하지 않고 그저 버텨온 나날들을 청산하고, 막연히 행복을 기다리지 않으며 좋아하고 예뻐할 일에 감탄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멀리 봐야한다. 자주 올려다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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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Yz3dNqOuMI

정수기엔 온수와 냉수가 따로 있다.
한쪽은 뜨겁게 한쪽은 차갑게 물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냉정과 열정이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자주 오고가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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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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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꽤나 안주했던 모양이다.

도시(서울)에서의 삶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 지 7년째.

맨 첫해는 물론 그 다음해까지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도 많았다. 도시적 삶에서 벗어나 자연적 삶(이게 어떤 삶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경제적 해결점을 찾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입안에 풀칠 정도가 아니라 아이를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돈은 항상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어중간한 타협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적 삶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다시 생계의 문제가 눈앞에 다가왔다. 너무 안주했는가 보다. 시골로 내려오면서 했던 고민을 해결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중간한 타협점에서 그럭저럭 버티고 살아왔던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설렘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불안하지 않아야 성공한 삶이다. 잠 푹 자고 많이 웃는 삶이 진짜 성공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또다시 생계를 위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 그냥 살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풀과 함께하는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것이 생계에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돈벌이와 노동이 따로 논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생계를 지탱해주던 줄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불안이 치솟는 것이다.   

 

 

인간행위의 심리학적 설명에서 의미와 재미는 가장 중요한 차원이다. 그 어떤 정서적 경험도 부재하면 삶의 의미는 부여되지 않는다.

 

아마 또 돈벌이를 위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혀 재미없는. 그래서 삶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아마도 시골에 내려온 시간동안 안주해버린 삶이 가져온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속에서 실현가능한 것으로 변할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은 설렘이다.

 

당분간 또다시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아니, 어정쩡하게라도 불안없이 살 수 있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골로 내려와 살고싶었던 자연적 삶이라는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할 수 있도록 힘쓰는 삶을 고민할 시점이기도 하다. 안주가 주는 안도 속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설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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