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단어가 문득 나타나서 일상을 떠돈다. 사회 곳곳에서 금수저의 갑질이 도마에 오른다. 애석하게도 이 갑과 을을 가로막는 장벽은 더욱 높아져만 간다. 갑과 을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간다. 오를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곳. 갑을 바라보는 을의 시선은 혼란스럽다. 질투와 분노. 두 감정이 뒤섞인다. 갑과 을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 한편엔 내가 갑이였으면 하는 욕망도 꿈틀댄다. <여교사>는 이 뒤섞인 감정의 선을 예민하게 보여준다.

 

2. 김하늘이 보여주는 감정의 곡예를 따라가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어찌보면 심리스릴러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김하늘이 맡은 효주 역은 흙수저로 대변되는 기간제 교사다. 어느날 정교사 중 한 명이 출산휴가를 가고 그 자리를 효주가 맡는다. 그녀의 바람은 다음 계약에서 정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혜영(유인영)이 나타난다. 이사장 딸인 그녀는 없는 TO도 만들어 정교사로 부임한다. 더군다나 효주의 대학 후배이면서 사회 초년생이다. 갈등의 전주곡이다.

 

3. 선생들은 모두 혜영에게 잘 보이려한다. 궂이 잘 보이려 한다기보다는 밑보이지 않으려한다는게 맞겠다. 하지만 효주는 혜영에게 까칠하게 군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라는 말 속에서 일종의 정의감도 숨어있는듯하다.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일종의 저항인 셈이다. 그 저항의 버팀목은 혜영의 선배였다는 위치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혜영의 약점을 잡는다. 학생과의 불장난. 효주는 혜영을 궁지로 몬다. 흙수저의 반란이 성공을 거둔 듯하다. 갑과 을이 변할 수도 있는가.

 

4. 그러나 금수저와 흙수저는 그 위치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질투와 시샘을 지나 조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혜영이 갖고자 했던 것을 뺏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바로 불장난의 대상인 재하라는 학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꿈을 꾸지만 그것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늪이 된다. 혜영은 누가 뭐래도 갑이다. 불장난의 소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을의 처지와는 사뭇 다르다. 우위를 점한 줄 알았던 효주는 자신이 기간제 교사 계약마저도 연장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혜영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야말로 을의 이성적 판단이다. 잠깐의 수모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정교사를 향한 그의 꿈이 무너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인 것이다.

 

*스포일러입니다.

5.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라 생각했던 재하가 혜영에겐 한낱 장난감이라는 걸 알고서 그 모멸감에 치를 떤다. 재하 또한 그녀가 아닌 혜영을 전부라고 생각했기에 치욕은 더욱 크다. 효주의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선다. 불상사가 벌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수 없음에도 효주는 일상처럼 학교에 출근해서 아침을 먹는다. 무심한 눈빛으로. 그게 을이다.

사람은 절대 이성적이지 않다. 이 영화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감정적 동물인지를 알게된다. 그러니 제발 세상의 갑들이여, 을의 감정을 농락하지 말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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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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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코패스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십 수년 전 공중파 방송의 한 다큐멘터리였었다. 생소한 단어이기도 했지만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가 망설여져 잊어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존재가 거의 기정사실화 된 듯하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터이다. 과연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겠는냐는 문제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갖고 태어난 성정 때문에 벌어진 일을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혹 단죄할 수 없다면 이들을 격리시켜 범죄를 예방해야 하는 걸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인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건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2. 극악무도하고 천인공로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알고보면 사이코패스였다는 뉴스를 가끔 접한다. 그런데, 잠깐. 공감능력의 부족이 꼭 범죄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돌아보아도, 어떨 때는 극도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다가도, 어떤 때는 아주 냉정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타인이 나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험도 숱하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잠재적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까. 사이코패스라는 진단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3. 이 책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포식자 프레데터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건이 진행되다보니 그 감정의 변화를 자연스레 따라가게 된다. 즉 사이코패스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접하는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런? 이라는 의문을 낳게 하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이 갖는 재미의 가장 큰 부분이다.

 

4. 자, 그럼 어떤 부분이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도록 도왔을까. 자유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가 침해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그 억압의 정도가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설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가 없다. 사이코패스의 탄생은 유전적, 태생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망 속에서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5. 그럼에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감정, 즉 잠재된 폭력성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사회적 동물이라는 관점에서 사이코패스가 유전적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감할 수 없다면 사회적 유대를 맺기 힘들어 생존과정에서 도태되어야  맞는 것이 아닐까.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 폭력적 성향이 인류에게 꽈리를 틀고 앉아있는 이유, 그것은 무엇일까. 소설을 다 읽고 무거운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신의 의도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이 만물을 사랑하는 관계로 설계했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사슬로 엮는게 아니라."

인간이 늘 정답을 선택하지 않는 건 그것이 불편하기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며 살아가는게 인간의 삶이라는 걸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신의 의도가 아닌지도 몰랐다.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이 만물을 사랑하는 관계로 설계했어야 한다.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사슬로 엮는게 아니라

옳은게 모두 최선은 아니었다. 옳다와 당연하다가 같은 의미도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당연한 건, 내 인생을 내게 맡겨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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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 미래. 우주여행을 꿈꾼다.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 공상과학 속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나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영화 속에 펼쳐지는 상상이 망상은 아니다. 동면의 기술, 인간과의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의 발달, 로봇 의사 등등. 영화 속 상상력과 그것을 보여주는 특수효과 등 눈요기 거리가 많다. 특히 수영장에서 중력이 사라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시각적 효과에 재미를 느낀다면 추천할 만한 영화.

 

2. 멜로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럭저럭.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꿈을 빼앗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면, 그래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는 120년 후 도착하는 행성지에 맞추어 동면에서 깨어나도록 되어있는 기기가 오작동되면서 5000여 명의 승객중 한 명인 짐이 30년만에 먼저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짐은 1년 후 자신의 이상형인 오로라라는 여성을 동면에서 깨어나게 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오로라는 자신의 동면을 깨운 사람이 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오로라는 짐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 애증의 심리를 섬세하게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다만 여느 멜로영화처럼 사랑은 위대함을.......

 

3. 어느 것을 선택하나 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선택의 순간, 그 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우주선을 탄다는 것은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을 뜻한다. 새로운 행성에서 살거나 240년 후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존재해왔던 세계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모두 지우고 새로운 삶으로 리셋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짐은 엔지니어로서 인정받고 싶은 삶을, 오로라는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은 삶을 위해 우주선 승선을 택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이 있어야지만 열정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생긴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이 영화는 애시당초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4. 혼술, 혼밥...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런데 막상 군중 속에서의 혼자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혼자일 때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 가히 못 견딜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짐은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 외룸움을 견디지 못해 목숨까지 끊으려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양심을 거부하고 동면해 있던 오로라를 깨운다. 이건 일종의 폭력이다. 120년 후 깨어날 삶을 선택한 사람을 30년 만에, 의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깨어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것이 과연 죄책감마저도 저버리고 폭력을 행사하도록 할 만큼 지독한 감정일까. 영화 중반부 짐과 오로라 이외 승무원 1명이 깨어난다. 그리고 이 사정을 알고 짐을 이해한다. 그 지독한 외로움을.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외로움이 견딜만한 것이라면 이 땅에 울려퍼지는 사랑의 찬가와 이별의 애가가 그토록 많지는 않을 것이다. " 아-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슬픈 인연>의 노랫말이 귓가에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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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7-02-0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달 전쯤에 우연히 이 영화를 봤는데 ‘설정‘도 꽤나 공감할 수 있었고, 배우들의 연기력, 우주 공간, 우주선 등등이 기대 이상으로 볼 만했던 영화였어요. 그 영화에 대한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이 글을 읽으니 참 좋네요^^

하루살이 2017-02-0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북미에서는 혹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정도까지인가 생각해봤어요.
 

 

1. 외계인과의 만남. SF가 갖는 상상력. 하지만 혹시 화려한 액션을 원한다면 다른 영화를 찾아보는 것이 낫겠다. 

지구에 찾아온 12개의 쉘, 전 세계에 퍼져있지만 어떤 원리를 찾진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는 신호. 18시간마다 만남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지구에 왔을까. 영화는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 이안이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쉘의 웅장한 모습, 사람 손을 닮은듯한 특이한 모습의 외계인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언어의 형상 등은 시각적 흥미를 끌지만, 화려한 볼거리를 풍성하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인터스텔라>를 좋아한 사람이라면 추천할 만한 영화.

뭐, 인터스텔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도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지만, 그래도 그런 과학적 설명을 좋아한다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겠다.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인터스텔라에서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 상대성 원리와 얽혀 있다. 그런데 도대체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관념으로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그 선이 흘러가는 속도가 달라지는 것은 경험할 수 있지만 그 흐름마저 일정한 방향이 아니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공상이라 여겨지기에.

 

3. 우리는 어떻게 소통하는가. 혹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무척 재미있는 영화.

소통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 화두가 됐다. 마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빚어지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물론 그만큼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다. 그런데 진정한 소통이란 가능한 것인가.

영화는 외계인과의 소통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런 과정은 먼 옛날 모험을 떠났던 사람들이 원주민과의 만남에서 소통을 이루고자 했던 모습과 닮아있을지 모른다.

소통의 기본 자세는 마음을 여는 것이다. 착취하거나 무시할 상대에겐 폭력이나 침묵이 답이겠지만, 일방적이 아닌 상호관계를 맺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음을 여는 것은 믿음을 전제로 가능하다. 영화는 믿음과 마음, 소통을 이야기하는듯하다.

 

4. 언어가 갖는 힘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

단어가 생각을 지배한다. 정말 그러냐고. 정말 그렇다.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맛은 아무 맛도 아니다. 표현되어져야 그 맛을 느낀다. 맛에 대한 단어가 풍부할 수록 맛도 풍부해진다. 단어가 생각을 지배한다.

영화 속에선 무기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평화 대신 전쟁을 선택하려한다. 흔히들 프레임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프레임 속 언어(단어)힘이다. 우리는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단어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번역에서 단어 하나의 차이가 전체 글의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에 들어갈 단어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지만 영화가 끝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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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2-0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영화군요. 보고 싶네요. 그런데 한글 제목이 ‘컨택트’라 1997년 작 ‘콘택트’랑 혼동이 되네요. 영화 장사꾼들의 흥행 전략을 이해 안 해줄 수도 없고, 원제 ‘Arrival’을 무시한 자의적 제목 붙이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도 없고, 딜레마입니다. ^^

게다가 ‘Contact’의 미국식 발음은 ‘칸택트’에 가깝고 영국식 발음은 ‘콘택트’에 가까운데요. 그리고 우리가 쓰는 음역은 콘택트가 거의 절대적인데요. 왜 하필 이도 저도 아닌 ‘컨택트’로 음역했을까요? 물론 선행작 콘택트/Contact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배려일 텐데요. 그런데 그런 배려 자체가 결국은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즉 소통을 주장하는 영화의 제목을 원제와는 다르게 붙임으로써 오히려 소통을 어렵게 하거나 혼란을 초래했다는 것이죠.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따위에 낱글자/알파벳을 단 하나라도 잘못 입력하면 대혼란 혹은 치명적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죠. ataraxia 님도 윗글에서 《번역에서 단어 하나의 차이가 전체 글의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콘택트’와 컨택트의 음역 차이에서 빚어지는 소통의 혼란과 논란에 대해서도 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하루살이 2017-02-0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대한 말들도 많더군요. 제목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제작사들의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사례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이 잘 되든, 안되든 말이죠. 이번 제목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가 봅니다.

이진 2017-02-07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혹적이고 압도적인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반 분위기가 관객들을 그렇게 이끄는 부분도 있었고, 감독 작법 자체도 굉장히 차분하고 느릿해서 조용히, 그리고 강렬하게 빨려들어간다는 기분으로 감상했었어요. 에이이 아담스의 표정도 너무 좋았구요. 개인적으로 <인터스텔라>에는 굉장히 실망을 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이 영화에 우세표를 던지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영화와 스토리를 다루는 철학의 깊이, 넓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컨택트>는 SF보다는 철학 혹은 인생에 관련한 영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하루살이 2017-02-0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 작품 중 <그을린 사랑>을 추천해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드니 빌뇌브 감독의 팬이 됐답니다.

이진 2017-02-12 14:53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랍니다 ^__^
 

 

 

흙 1cm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200년. 농부는 수 백년의 세월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흙이 쓸러내려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농부는 고단히 움직였을 것이다. 농부의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모래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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