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이 되었다. 훈련하고 노역하고. 그래도 보릿고개에 먹을 걱정 안하고 사는 게 어디인가. 힘들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

벌써 1년이 됐다. 이제 군졸로 사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게다. 훈련이야 하던 데로 하면 되는 거고, 노역도 요령이 생겨 가끔 게으름도 핀다.

어느덧 2년이 흘렀다. 밑에 신참들도 좀 있고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산적이나 도적떼들과의 격투, 가끔 벌어지는 사병들과의 전투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래, 살아남는 거다. 근데 조금 생긴 이 여유를 어떻게 보내야할까. 남들처럼 이바구를 까거나 노름이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련지... 아유, 잠깐 바람이나 쇠어볼까. 어, 저기 누구야. 개똥이 아니야. 저 녀석 나랑 같이 들어온 녀석인데... “어이, 개똥이. 자네 지금 뭐 하는갠가?”

“어... 어, 그냥, 무술 훈련 중이야.”

“우리같은 졸따구들이 무술 연습해봐야 무에 소용있다고?”

“아니, 뭐. 그냥 살아남아야지. 내 자신은 내가 지켜야 하는 것 아니겠나.”

“언제부터 훈련해온거야?”

“글세. 들어오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서부터 시작했으니 2년이 돼 가는군.”

“그래, 고생많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은데, 쩝. 개똥이 녀석 참...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않다. 어라. 저건 길태미. 이런, 제길.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까. 삼한제일검을 우리 같은 졸따구들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 도망가버릴까. 그럼, 남은 우리 가족까지 모두 죽겠지. 젠장. 재수에 옴 붙었군. 제발, 제발, 길태미. 이쪽으로만 오지 말아줘.

“내 길을 가로막는 자는 그 누구라도 목을 칠 것이다!”

길태미의 목소리가 섬뜩하군. 으.... 드디어. 이쪽으로 오느구나.

 

“어라. 너 일개 군졸이 어찌 내 일합을 막았느냐?”

“그냥... 엉겁결에.”

“그래, 네가 비록 일합을 막아냈지만 네 목숨을 구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이, 이인겸 따깔이. 나랑 상대하지”

“뭐, 이..... 이놈!”

길태미가 다른 쪽으로 갔다. 휴 목숨만은 건졌구나.

다른 군졸들의 떼죽음 속에서 개똥이는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다.

 

※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길태미와 맞서야 하는 군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괜한 상상이 들어 끄적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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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 감독, 조정석, 이미숙, 이하나 출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가 조작되고, 누군가 잘못 올린 글이 진짜인 양 퍼 날라지는 세상에서 뉴스는 정말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일까? 의심해볼 만 하다. 흔히들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쓴다’라고 표현하듯 뉴스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의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대부분 묵묵히 수용한다. 그리고 그런 수동적 수용이 여론인 양 힘을 발휘할 때도 있다.

영화 <특종-량첸살인기>는 ‘사실여부를 떠나버린 뉴스’라는 생각을 블랙코미디로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 허무혁 기자는 광고주와 연관이 있는 줄도 모르고 비판기사를 썼다가 해고 위기에 처한다. -사실 여부라는 주제보다 실은 이게 현실적으로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신문이나 방송이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이 없고 광고료가 대부분의 수입을 차지하는 경우 광고주 눈치보기는 극에 달한다.- 이때 연쇄살인범을 알고 있다는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온다. 허 기자는 이 제보를 믿고 특종을 터뜨린다. 그런데 이 제보는 사실이 아니었다. 허 기자는 거짓이 들통날까봐 다시 거짓으로 무마시키려 한다. 사건은 이제 일파만파로 커졌다. 그런데 웬걸. 연쇄살인범이 허 기자의 이야기대로 살인을 저질러버린다.

한편 허 기자는 사적으로는 이혼 위기에 처해 있다. 아내는 임신을 하고 있지만 헤어질 태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합치려하는데 출산한 아이의 아빠가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내는 허 기자의 아이라고 믿어달라 한다. 허 기자는 친자확인을 해보지만 그 결과를 끝내 보지않고 자신의 아이라 믿는다.

블랙코미디인 이 영화의 핵심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친자확인 결과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뉴스 보도된 내용의 반론을 들어볼 것인가, 말 것인가. 허 기자는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자신의 삶에 하등 도움을 주지 않는다 생각한다. 그냥 믿고 살자.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나. 그러니 허 기자가 자신의 잘못을 실토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보도된 뉴스가 잘못됐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자.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백국장이 말하듯 그것을 믿는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할 뿐.

그래서 사실은 누군가 애써 드러내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우리는 사실이 숨바꼭질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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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채집, 사냥으로 살아가던 인간이 어느 순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농사가 편하고 수확이 많기 때문이라고 보아온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다윈의 유전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소 다른 의견이 있다. 콜린 텃지가 쓴 <에덴의 종말 - 인간의 왜 농부가 되었는가>를 참조해 인간이 농사를 짓게 된 배경을 알아본다.

 

인류 화석을 살펴보면 농사를 짓게 된 시기부터 관절염과 허리 비틀어짐을 찾아볼 수 있다. 농사로 인해 그전 다양하게 먹었던 곡물, 열매, 채소의 종류가 단순화되면서 영양분도 불균형해졌다. 즉 농사를 짓는 것이 결코 편한 일이거나 무작적 득만 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게 된 것일까.

이는 기후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빙하기 전 온화한 기후 속에서 선호하는 식물이나 동물(고기)을 얻기 위해 취미로 농사를 지어오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상승함으로써 풍요한 땅을 잃게 돼 식량 공급이 늘어날 필요성이 생긴다. 즉 취미로 지은 농사 덕에 늘어난 인구와 해수면 상승으로 잃어버린 땅 탓에 수렵, 채집해 얻을 수 있는 식량이 줄어든 것이다. 인구는 늘고 식량은 줄어들다보니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농사를 지음으로써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됐고, 이는 농사의 규모를 더욱 키워야 하는 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즉 농사를 지은 것은 스스로 원해서도 곡물의 장점이 뛰어나서도가 아니라,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말한 것은 농사가 결코 수렵, 채집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드러나는 농사는 인간을 자기 성공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즉 부지런히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치를 만들어 쉼없이 부지런히 살도록 유도한 것이다. 노동의 고단함을 부지런함이라는 가치로 희석시켜 버린 것이다.

농지가 늘어나면서 멸종되는 동물이 속속 생겨나고 이로 인해 사냥의 중요성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즉 노력한 만큼 성과가 드러날 수 없게 된 환경 탓에 사냥꾼은 몰락하고 반대로 그 성과가 확연히 드러나는 농업이 중요해진 것이다. 늘어난 인구와 농사의 번영은 악순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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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케이프

   

 

감독- 존 에릭 도들 

출연 - 오웬 윌슨, 피어스 브로스넌, 레이크 벨, 스털링 제린스

 

 

 

 

 

 

 

 

영화를 보고나니 할리우드가 참 약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만이 유일한 선 또는 영웅이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보같은 짓을 교묘하게 피하는 법을 알았다고 할까.

이스케이프는 미국의 물 관련 기업의 기술자가 가족과 함께 아시아의 어느 국가로 들어간 첫날, 혁명(폭동?)이 일어나면서 목숨을 위협받게 되자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죽음 앞에 내몰린 가족이 마냥 죽음을 기다리거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가거나의 기로에서 당연히(? 누군가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기도 한다) 도망을 선택하면서 펼쳐지는 긴박함이 숨을 가쁘게 만든다. 이제 죽겠구나 하는 순간 나타나는 영웅(피어스 브로스넌) 덕분에 고비도 넘기고, 새로운 출로도 모색한다. 그리고 그가 첩보원이라는 것을 알게되며, 그로부터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그는 작금의 상황이 다국적기업의 탐욕으로 발생된 것이며, 그 활동의 밑바탕엔 기업과 관련된 정부에서 일하는 첩보원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절대 선도 악도 없으며, 당신이 가족을 위해 탈출하듯, 이들도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혁명가들은 폭도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도 상관않는 무차별적 살인과 잔인한 폭력이 이들을 악하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도 악도 없는 상황이라는 설명은 그저 귀로 흘러들어 빠져나가고, 악당의 이미지만 넘쳐난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의 가족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때 우리도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말과 이미지의 어긋남. 숨가쁘게 몰아치는 이야기 속에서 이미지에 사로잡힌 우리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고백을 허공에 날려버린다. 이로써 말로는 악한 서방세계가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선한 존재로 비쳐지고, 말로는 희생자인 약소국의 국민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이 된다. 할리우드의 잔꾀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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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폰(스포 있음)

감독 - 김봉주, 주연 - 손현주 엄지원

 

아내가 살해되었다. 1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분명히 아내다. 살아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영화는 태양풍에 의한 전자파 간섭으로 시간을 초월해 통화가 가능하다는 설정으로 사건을 진행한다.(영화적 상상력에 대해 토를 달지는 말자. 영화 <동감>에서는 개기월식 영향으로 시간을 초월한 무선통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아무튼 1년 전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건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이다. 이 사건은 발생한지 1년이 지났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남편이 알고 있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뿐이다. 그리고 번호판을 알 수 없는 자동차만이 단서이다. 자, 이제 주인공인 남편은 전화통화만으로 아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영화는 초반 시간을 초월한 통화 덕분에 원래 아내가 죽었던 시간과 장소를 피해 아내가 살아남지만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살인 용의자로 남편이 지목된다. 과거가 바뀌면서 현재도 바뀌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엮이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사뭇 흥미진진하다.

현재가 바뀐 상황에서 다시 아내로부터 전화가 온다. 어떻게든 아내의 죽음을 막아야만 한다. 물론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쫓기면서 남편의 활동은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초반 흥미진진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던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다소 힘을 잃는다. 과거와 현재가 뒤얽히는 모습 대신 과거 속에서, 또 현재 속에서 각각 아내와 남편이 사건을 피하고 해결하려는 모습에 집중하면서 급박함이 다소 약해진 탓이다.

그럼에도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적 재미는 상당하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영화의 여운을 남겨주진 못한다. 아쉬운 부분이다. 실제 인생은 또 한번의 기회가 없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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