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와 이야기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면 비교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너는 너니까. 너의 기준으로 너의 방식대로 그렇게 자라면 돼' 라는게 남에게 내보이는 방식이고, 실제론 '너를 키우는 건 나다. 나의 방식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넌 내뜻대로 네 맘대로 크면 된다'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딸내미 키우는 것, 역시 내 맘대로 되질 않는다.
"와! 아빠 또 고기 잡았다. 우리... 아빠가 잡은 거야, 흥" 하며 자랑질 하는 통에 빙어 잡는 손이 너무 추워 곱아있는데도 낚싯대를 쉬이 놓지 못했다.
"아빠, 얼른 잡아. 아저씨가 잡았잖아. 아빠도 얼른 잡아!" 하는 소리엔 내가 애가 탔다. 얼른 잡아야 할텐데... 쯧쯧 ㅜㅜ
딸내미가 비교하고 경쟁을 붙인다. 아빠는 거기에 놀아난다. ^^;
아니 도대체 넌 어디서 이런걸 배웠니?
어린이 집이 범인인거냐, 애니메이션이 범인인 게냐.
잠시 생각해보니 ... 쩝. 나도 가끔은 비교 모드로 돌입한게 기억난다.
"딸내미, 저기 아기 봐봐. 얼마나 잘 걷니. 넌 언니가 돼서 아빠한테 안겨야 되겠어?"
내 몸이 고달플 때면 이 비교라는 형식으로 좀 편해지고자 했던 것이다.
딸내미, 미안하다. 다신 비교 안할게. 그러니 넌, 비교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비교 대상은 오직 너 자신이길 바란다. 아빠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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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이란 무엇일까?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은 건강한 농산품!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그나마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농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즘은 친환경농자재들이 엄청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것들을 땅에다 쏟아 부워 키운 것들도 유기농일까. 물론 인증마크는 받을 수 있을테지만. 유기농이란 단순히 인증받느냐의 여부는 아닐 것이다.
고에너지의 투입 없이 키웠을 때 비로소 유기농의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유기농이란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결국 지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과 생명이 함께 가는 길이며, 사람과 사람도 함께 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유기농산물을 구입해서 먹는 행위는 단순히 믿을 수 있는 것, 또는 건강한 것의 소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은 그 가치 또한 함께 구입해 먹는 것이다.
논산에 윤여신이라는 농부가 있다. 우리나라 유기 딸기 재배에 있어 선구적이자 독보적이라 할 만한 분이시다. 이 분이 딸기를 내다팔 때 유기농인증을 떼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신다. 소비자들의 탐욕과 유통업체의 폭력이 만나게 되면 유기농의 가격마저 후려친다. 유기생산을 하는 농부가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을 정도의 구매가가 형성된다. 그럴 때면 차라리 유기농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유기농이 유기농이 아니라고 손을 저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살림하고 싶은데 자꾸 죽임하라고 유혹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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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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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염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항균 99.9%, 살균이라는 단어가 마케팅의 키워드가 됐겠는가. 인간의 감염에 대한 공포는 구제역 사태를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감염에 대한 조그마한 가능성에도 무차별 살처분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가. 이 소설은 작가가 비명을 지르며 땅속에 파묻혀 간 소, 돼지들을 모티브로 써내려간 것이다. 만약 감염의 대상이 소,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떨까? 라는 상상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감염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서 특히 좀비라는 형식을 통해 워낙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식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식상하지 않다. 점차 감염이 확대되고 사건이 결말로 치달아갈수록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아니,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고 하면 이 표현이 식상하다. 할리우드식 줄거리에 익숙한 사람일 수록 이 소설의 전개는 그야말로 충격에 가깝다. 한마디로 리얼하기 때문에 충격적인 것이다. 전혀 리얼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만들어낸 이야기임에도, 리얼하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애써 감정이입이 된 주인공들이 가차없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그것을 슬퍼할 겨를도 없다. 비극은 비극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너무나 어두운 소설이다. 물론 질서의 파괴가 몰고 온 인간성 파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은 있다. 곳간에서야 그 누구나 인심 쓸 수 있지만 빈 헛간에서야 쉬운 일일까. 사람의 됨됨이는 곳간이 아니라 빈 헛간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99%의 절망 속에서도 단 1%의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을 맨다. 하지만, 정녕 나는 또는 당신은 그 1%가 될 수 있겠는가 자문해본다. 또한 이 소설을 덮으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사물로 식품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는가 반성해보게 만든다. 한편 더 나아간다면 도대체 생명산업이라는 조어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곰곰해 생각해본다.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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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폴리 보고싶어"
"몇 개 볼건데?"
"네 개"
...
"아빠, 과자 먹어도 돼?"...
"몇 개 먹을건데?"
"네 개"
...
난 참 못된 아빠다. 우리 딸내미가 가장 크게 여기는 숫자가 넷이라는 걸 알아챈 이후 항상 물어본다.
"몇 개 할건데?"
딸내미가 숫자를 넷까지만 셀 줄 안다면, 오산이다.
분명 열까지 꼬박꼬박 셀 줄 안다.
하지만 제일 큰 숫자는 넷이다. ^^
어렸을 적 어떤 경험이 딸내미에게 넷이 가장 큰 숫자이도록 만든 것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혹시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크기가 나만의 넷이라는 숫자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의 넷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곰곰히 생각해본다.
혹시 여러분도 넷에 갇혀 지내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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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것좀 봐"
딸내미가 손가락으로 자기 발가락을 가리킨다.
딸내미 얼굴을 쳐다보니
"아니, 여기를 보라고"라며 자기 손가락을 흔든다.
오호. 가히 충격적이다. 무엇이 충격적이냐고?...
불과 몇개월전만해도
"딸, 저기 봐봐, 소들이 사는 집이야"하고 손가락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쳐다보던 아이였다.
머리속에 가상의 선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
부쩍부쩍 성장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놈의 세상은 아직도 영아기에 머물러 있다.
절차의 민주화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는데
자꾸만 손가락만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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