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내년엔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행복 교과서가 시판될 예정이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은 최상위권이면서.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중앙일보 11월 17일자) 당연히 행복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무엇인가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완성했을 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그 상황을 활용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 행복의 기술은 긍정심리학에서 차용됐다. 즐거운 삶, 몰입하는 삶, 의미있는 삶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취지하에 나온 교과서가 혹시 지금의 교육방식처럼 주입식으로 변질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정답을 찾기 위해 교과서를 달달달 외우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물론 성적과 관련된 시험과목이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적과 관련되지 않은 과목이라면 또 학생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한편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사회에서, 사다리에서 걷어차이지 않고 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행복은 돈으로 주어진다는 배금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행복의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는 불평등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허허 하하 하며, 긍정의 심리로, 행복하다는 '최면'으로 넘어가버린다면 변화 또는 변혁의 꿈마저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삶에 지친 도시인의 한 사람으로 쓸데없는 기우에 빠져본다.  

 

사족 

수많은 행복론 속에선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 일독을 권한다. 이 책 또한 'ㅇㅇㅇ하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것이 함정임을 가르쳐준다. 다른 한편 과연 행복이란 것이 우리 삶의 지상 과제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우리는 행복에 그토록 천착하는가. 그리고 나와 당신의 행복은 과연 같은 행복일까.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도전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행복이라 쓰고 만족이라고 말한다면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도하지 않은 갈등. 부정적 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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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에요?" 

아기를 데리고 나가면 으레 들려오는 질문이다. 우리 부부는 질문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진짜 남자 같죠"라고 답한다. 그 질문을 듣지 않으려고 일부러 분홍색 치마를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나가도 마찬가지다. "남자아이죠?"라는 말은 여전히 귓가를 울린다. 

여자아이란 걸 안 사람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예쁘네요"라는 말 한마디 건네면 서운함이 싹 가실텐데 ㅋㅋ 그저 '그렇구나' 라는 표정이다. 아빠 눈엔 너무나 귀엽고 예쁜 딸인데... 특히 점점 커가면서 눈매가 날 닮아가는 것 같아 흐믓하다. (그런데 도대체 코는 누굴 닮은 거야?) 날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하다. 입은 또 어떤가. 병치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나만큼이나 작은 입이 참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남자같이 생긴 것과 여자같이 생긴 것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 아기를 보면서 느닷없이 이런 생각에 빠져봤다.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선일까. 아니면 마음의 창이라는 눈일까. 섹시함을 드러내기도 하는 입술에 있을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건 헤어스타일이었다. 국민할매 김태원의 CF에서 치렁치렁한 뒷머리로 인해 여자로 오인한 남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반대로 과감하게 삭발을 한 여자가 화장까지 안한다면 남자와 구별하기가 쉽진 않다. 우리 아기도 그나마 모자를 씌우면 여자에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거 굉장한 선입견 아닐까. 100년 전만 해도 똑같이 댕기머리를 하면서 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옷차림은 또 어떤가. 150여년전 여성해방운동의 한 방편으로 여자 바지가 등장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차이가 만들어낸 외모적 차이.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면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그런 차별을 공고화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를 외모에서 구현해내는 것은 찬성한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서 다양성 또한 드러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가 갑자기 삼천포로 흘러가긴 했지만, 아무튼 뭐, 남자처럼 생겼으면 어떻고, 여자처럼 생겼으면 어떠냐. 우리 아기가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랄 뿐이다.  

떡두꺼비 같은 내 딸아. 생김새야 커가면서 변할텐데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다만 얼굴 속 표정은 네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온화하고 평온한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지금처럼 환한 미소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듯이,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그런 얼굴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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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12-10-1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정말 반갑네요. 이카루 님도 잘 계시죠. 아이를 통해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종종 마실 나갈게요.
 
악마를 보았다 - I Saw The Devi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악마를 보았다>란 영화는 잔인한 영상 때문에 개봉 전부터 시끄러웠다. 실제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역시 잔인하다다. 하지만 최근 개봉했던 이끼도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였다.(허준호를 감옥에서 린치하는 장면들) 그럼에도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함 때문에 홍역을 앓은 것은 잔인함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일터다. 만약 이 영화에서 잔인함을 덜어낸다면 영화는 힘을 잃고 말았을 테다. 악마를 보여 줄 화면을 잃어버릴 테니 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연쇄살인범 최민식에게 약혼녀의 목숨을 빼앗긴 이병헌이 범인을 찾아내 반복해서 고통을 가하는 복수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제목을 왜 악마를 보았다라고 했을까. 살인범 최민식이 악마일까. 아니면 최민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의 힘을 빌린 이병헌이 악마일까.  

악마란 사전적 의미론 사람의 마음을 홀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불도 수행을 방해하여 악한 길로 유혹하는 나쁜 귀신을 말한다. 또는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런 사전적 맥락으론 최민식이 그야말로 악마다. 이 악마의 특성은 고통과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병헌의 복수가 먹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이병헌의 품성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한편으론 악의 힘을 빌려 악을 응징하는 이병헌이 악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약혼녀를 죽였다는 이유로 끈덕지게 그를 못살게 굴기 때문이다. 복수의 도를 넘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그의 행동은 멈춤이 없다. 오로지 앙갚음만이 남아 있는 그의 마음은 악마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의 옷을 입을 수 있는지를 이병헌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말한 악마는 바로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병헌이 복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보다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국정원 출신의 뛰어난 무술 능력과 첨단기기가 없었다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히 잔인무도한 살인범에게 대적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은 국가라는, 또는 법이라는 공적인 힘을 통해 복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힘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용납이 된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대신 마음 속의 분노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사그라들도록 강요(?) 당한다. 하지만 그 용서란 것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것은 바로 용서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용서할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낼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악마의 실체가 아닐까. 힘이란 언제든 그 악마적 속성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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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못할 땐 위치를 바꾸면 벗어날 수 있다. - 영화 '겟 썸' 중 

영화 '겟 썸'은 격투기를 소재로 한 성장영화다. 아버지의 음주운전사고를 방치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면서 가족과 화해하고, 사랑을 이해하며 성숙해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 격투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위기탈출법에 있었다. 마운트와 같은 상황에서 옴짝달싹 못할 때 스승은 위치를 바꾸어야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누워서 제압당하던 몸을 180도 뒤집어 올라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누운 상태에서 팔을 밖으로 빼내고 발을 상대방에게 걸어둘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좌절의 상황에서도 이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위치를 바꾸는 기술은 우리의 사고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역지사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좌절에서 탈출하는 것도 물리적 외부환경 보다는 정신적 위치의 자리바꿈에서 더욱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어머니와 화해하고 여친과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듯이. 탈출구는 버스 속 유리를 깨는 망치를 통해 유리창을 깨뜨리기 보다는 반대편 창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영화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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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Inceptio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 인셉션은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킨다. 나비 꿈을 꾼 장자가 나비였던 것이 꿈인 것인지, 지금 사람으로 있는 것이 꿈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호접몽 같은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남의 꿈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을 훔쳐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솔솔하다.(바로 이 부분에서 호접몽을 떠올릴 수 있겠다.) 꿈속의 꿈, 그리고 다시 그 꿈속의 꿈으로의 침입.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그냥 화면을 쫓아가다 보면 크게 혼돈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 꿈 속에서 그 사람에게 생각을 심어준다. 그 생각은 작은 씨앗이 되어 점차 커지더니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행동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감독이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지 아닐까 싶다.  

꿈과 무의식은 이성의 시대를 고하는 한 부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성적 측면의 작용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또는 이성의 작용을 도움받아 행동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 사람의 감정적 측면을 건드린다. 가령 아버지와의 관계를 파악해 무의식 깊숙히 들어가 새로운 감정을 심어줌으로써 원하는 행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 생각을 교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건드리는 추억.기억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나의 감정선을 바꾸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동은 크게 변할 수 있다. 머피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 샐리의 법칙에 따를 것인지는 이성보다는 감성적 측면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를 바꾸려 노력하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을 바꾸려는 노력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의지가 박약함을 한탄하기 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뒤바꿔보는 연습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팽이를 보여준다. 호접몽과 같은 상태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주인공의 '토템'이 바로 팽이다. 팽이가 멈추면 현실이고, 계속 돌면 꿈이라는 설정.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엔딩장면에서 팽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인공이 맞이한 해피엔딩은 꿈일까 현실일까.  

아, 팽이야, 그대로 쓰러져다오. 나도 모르게 애타게 소망해본다. 죄책감에 시달렸던 주인공의 평온한 엔딩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꿈인들 어쩌랴. 차라리 그 꿈속에서 깨지 말기를.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선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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