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연 수입이 3억 7000만원에 달하는 청년에 대한 기사가 회자되고 있다. 동영상을 클릭한 숫자에 따라 유튜브와 5 대 5의 수익배분을 나눠갖음으로써 큰 수입을 얻게 됐다. 또 최근엔 유료 앱 콘텐츠를 개발해 단번에 8000만원의 수입을 올린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앱 하나 잘 만들거나 동영상 하나 잘 만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마치 10여년 전 로또 하나 잘 맞으면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처럼. 물론 로또야 순 운이지만-누군가는 복권을 20년 30년 꾸준히 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성실함이 행운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근면, 성실의 이데올로기가 확률의 게임에까지 개입된다- 앱이나 동영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개개인의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것 한방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한 방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 한방의 기회가 점차 많아지고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단순히 천운에 기대는 것 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인생역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산다. 그러나 유튜브 동영상이나 앱 콘텐츠나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한 방은 결코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그 기회가 넓어지고 있는 건 분명 사실이고,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이런 기회의 넓어짐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역시 모두에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행복하다면 한 방에 대한 목마름이 그토록 크진 않을 것이다.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도 한 방의 유혹은 그 힘을 많이 잃을 것이다. 사는게 힘들고 일이 자아의 완성이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때 한 방은 크게 다가온다. 한 방이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쉽다고 느껴질 수록 우리는 진리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오직 한 방을 그리워한다. 그 한 방에 목메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가끔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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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찾아서
박정석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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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떠나고 싶다. 라고 하루에도 수십번 되뇌인다. 떠나고 싶은 이런 강한 욕망에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밥벌이라는 핑계를 대고 숨는다. 안주한다. 소심하게도. 대신 여행책이나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제길, 나도 이렇게 떠나야 하는데... 이 책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여행을 시작했을까. 밥 먹고 살 걱정은 없는걸까. 엉뚱하게도 저자에게 화풀이 한다.  

누군가는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기에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휴가야 말로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길고 긴 여행을 다녀온 후 그의 일상은 새로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후자를 꿈꾸어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휴가라는 짧은 여행에 만족할 뿐이다. 그래서 휴가는 항상 계획이 동반된다. 그 계획마저 귀찮은 사람은 패키지를 떠난다.  

이 책의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동쪽 현지인들이 오라라고 부르는 코모도 드래곤을 찾아 여행을 시작했다. 일종의 도마뱀 종류로 인도네시아인들조차 일부러 찾는 곳은 아니다. 패키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자유 여행이다. 그 와중에 패키지 여행자들을 마주치지만 그는 이들을 결코 얕보지 않는다. 여행가로서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머나먼 과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이분법적인 사고가 횡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견이라는 기제가 인간의 작고 가엾은 뇌에 가능한 무리를 적게 주는, 주어진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동시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두뇌의 구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즐겨 편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자동 엘리베이터만큼이나 편리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단추를 누르는 대신 가파른 계단을 걷고 걸어 목적지인 결론에 닿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리 근육 유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소수뿐이다. 여행과 관광을, 배낭족과 트렁크족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시도 또한 워낙에 분류 - 주어진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이다 - 를 좋아하는 인간 본성에 이분법의 편리함이 중첩된 결과이리라. 한 인간이 지적인 훈련을 쌓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이라면 선명한 검은새과 흰색의 양극단 사이에 다양한 층층의 회색빛을 띤 스펙트럼의 영역을 일구어 내는 것이다. 뇌의 구조를 본래와는 다르게, 자체 내의 효율이 아니라 타자의 눈을 닮은 합리성을 추구하도록 바꾸어가는 것. 우리 몸에 각인처럼 새겨진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 마침내 중력을 이겨내는 것. 193쪽  

코모도 섬으로 가기 위해선 자바, 발리, 롬복, 숨바와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발리, 롬복, 우붓, 메단에서 머물다 목적지인 코모도에 가지 못한다(않는다?). 하지만 후회하는 모습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코모도 섬으로 떠날 수 있는 바닷가 민박집 앞에서 만난 프랑스 할머니의 말이 그의 심정을 헤아리게 만든다.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어. 그건 과업도 아니고 뭣도 아니니까. 여행은 의무나 목적이 아니고 오로지 즐거움이야. 집에서는 미처 모르던 것을 길에서 찾는 일이지. 너무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시간만 넉넉히 둔다면, 너는 어디든지 갈 수 있을거야. 원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280쪽
 

호숫가 생활이 평화로운 이유는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다에서와는 달리 서핑도, 다이빙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산책과 낮잠, 독서와 수영이 전부였다. 흙냄새가 풍기는 민물고기 요리와 꿀처럼 달콤한 망고를 까먹기에 지친 나는 이만 호수 마을을 떠나 북쪽의 메단으로 가기로 했다.  220쪽  

맞다. 여행은 즐거움이다. 저자가 걱정하고 있지만 사고의 편의를 위해 나도 조금 분류를 해봐야 겠다. 여행의 종류는 크게 역사, 자연, 문화를 맛보는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다를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시장풍경이나 생활상을 엿보는데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문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산과 바다, 강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연, 나와 다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역사를 중시할 것이다. (휴양은 자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이 세가지를 단 한방에 해결해버린다. 오랜 여행의 공력이다.  

낯선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현기증을 느끼는  몇 초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극도의 쾌락과 사치의 정점이었다. 252쪽 
 

 역사, 자연, 문화 모두 그 낯섬의 대상일 뿐이다. 때론 여행을 하는 순간 여행자 자신이 바로 낯선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은 인간을 바꾼다. 모범생인 G는 표정마저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따분한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인간, 실제보다 훨씬 더 멋지고 자유로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발동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실재란 개인과 환경 간의 지속적인 관계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내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때 G는 들릴락말락 아주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복에 겨운 사람처럼. 115쪽 

그래서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며, 그 탈출을 통해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일상이 즐거움 그 자체라면 어떨까. 일상이 여행같다면 어쩔까. 헛된 꿈일까. 하나의 망상일 뿐일까. 

사람들은 용을 일컬어 이 세상에 없는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모두들 단 한 번도 그 동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세상 어느 구석진 곳을 찾아가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흔히들 없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인 루쉰의 말대로 희망과도 같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땅 위의 길과 같아서, 사실 땅 위에는 애초 길이 없으나 걸어가는 사람들이 생기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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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도 좋은 여행이 있단다.

개발도상국을 여행함으로써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통해서 현지에 도움을 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현지에서 달러를 씀으로써 곤궁한 현지인들의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운영하는 숙소나 교통수단의 이용을 가급적 피하고,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곳 또한 가능한 한 이용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겠다. 즉 현지인들이 소규모로 운영하는 곳에 돈을 쓰자는 말이다. 여행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두 번째 방법은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덜 알려진, 혹은 왜곡되게 알려진 지역을 여행하고 이해함으로써 그간의 몰이해와 편견을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며, 현지인과 대화를 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아무리 수줍은 여행자라고 해도, 가장 보수적인 여행지라고 해도, 낯선 이와 대화할 기회는 종종 찾아오기 마련이다. 일부러 피하지만 않는다면.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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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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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 영화에선 갱단원들의 폭력을 묘사하거나, 그들의 흔들리는 심리에 초점을 맞추거나, 어떻게 갱 생활을 시작해 몰락해 가는지의 인생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갱이 움직이는 지하경제에 대한 모습을 얼핏 살펴볼 수 있는 영화들도 있다. 특히 이들이 지하경제에서 벗어나 양지로 나와 떳떳하게 사업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열망을 그리는 작품들도 꽤 있다. 그 와중에 갱들이 정치인들과 어떻게 부패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또 천적이라 할 수 있는 경찰과도 상부상조하는지, 지역 주민들을 어떻게 통제하는지가 보여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괴짜 경제학>이라는 책은 갱들이 어떻게 지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지역 경제를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 갱들의 묘사가 결코 허황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기반으로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강변하듯이 말이다. 대학원생인 저자는 캠퍼스 안에서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갱들의 생활상을 통해 사회학이 다루려고 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찾아간 빈민가에서 갱 두목과 친구가 되고, 아파트 주민들과 친분을 맺고, 직접 갱 두목으로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그의 경험은 살아있는 사회학을 만들어낸다. 다만 조금은 어두운...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시카고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선 드는 소감은, 이 도시가 작동하는 기존 방식에 따른다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진보의 기회는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운명론은 나에게 생소했다. 풍요로운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게다가 나처럼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에게도 서로의 차이, 인종적 차이까지 해소하는 길을 찾을 수있으리라는 기본적인 믿음과 미국의 제도가 그것을 위해 작동하리라는 확고한 신뢰가 있었다. 나는 협소한 내 경험치의 한계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25쪽 

이들 많은 여성이 1960년대에 시민권을 주장했고, 1970년대에 흑인의 피선거권을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아주 진지하게 공동체를 위해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는 동안 갱단, 마약, 빈곤으로 인해 처지가 한층 악화되면서 가족을 건사하기도 힘들어졌다. 그 무렵, 주택공사는 부패하다시피 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경찰은 대체로 반응이 느렸으며, 힘 있는 강한 여성들은 철저히 주류에서 밀려났다. 267쪽 

저자의 현실 통찰은 과연 문제로 가득찬 빈민가의 생활을 바꾸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갱과의 협력 아닌 협력 속에서 나름대로의 경제 생활을 유지하던 빈민가 사람들에게 변화는 꼭 좋은 것만을 의미하는 걸까.(매춘과 마약, 폭력 속에서 어떻게 시스템이 유지되어 가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듯 재미있다) 저자의 사회학 논문이 절망으로 가득찬 빈민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넬 방법을 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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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바람이 부려나. 공중파에서 연일 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난달 EBS 다큐 프라임에 이어 지난 25일 SBS 스페셜에서도 춤을 다뤘다. 특히 춤을 통한 치유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춤이 주는 치유란 아픈 몸이 낫는 치료와 달리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작용을 말한다.  

춤이란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고전무용이나 현대무용, 발레와 같은 것에서부터 대중문화 속에서 보여지는 힙합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하다. 춤이란 이성 간의 성적 호기심이나 매력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도구 - 2005년 12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춤과 매력에 관한 논문을 보면 여자들은 잘생긴 남자보다 춤 잘 추는 남자에게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황홀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로 쓰이기도 하며, 집단 구성원간의 일체감을 이루는 일종의 종교적 역할을 수행 - 미시시피 지역에서 끊임없이 대립했던 흑인과 백인이 춤을 통해 화해한 일화가 있다. 또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선 재범률이 0건이 되기도 했다 - 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춤이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아를 바깥 세상으로 드러내어 표현함으로써 온전한 마음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측면이 주목받고 있다. 춤으로 병을 치유하는 타말파 연구소의 안나 할프린이라는 할머니는 90세에 이르는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무용수로 명성을 떨치다 40대에 암에 걸려 죽음과 직면하면서 춤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치유라는 것이었고 그에 이르는 길로 춤을 택했다. 지금도 암이나 에이즈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마음을 춤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다.  

댄스 테라피를 비롯해 심리치료에 이용되어지는 춤은 남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며,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 된다. 이렇게 온전한 자아와 자아가 서로 소통함으로써 아픔은 치유되어질 수 있다. 이럴 때의 춤은 마치 명상과도 닮아 있다. 얼핏 도인술이나 기체조 같은 것을 확장하면 치유의 춤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포츠 댄스나 커플 댄스 등도 마음의 안정을 주는 한편 불편한 몸을 좀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춤이 갖는 치유의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현대인이 하루 종일 몸을 어떻게 쓰는지 되돌아보자. 그리고 그 육체 속에 마음은 얼마나 갇혀 있는지도 살펴보자. 춤은 자꾸만 어둠 속으로 움츠려드는 자아를, 거짓으로 위장된 자아를 햇빛 속 온 천하에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창이자 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과 소통가능한 몸을 얻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자신의 몸을 돌아보는 춤을 추더라도 그것은 사회를 향한 소통의 몸짓으로 거듭난다.  

하루 중 잠시라도 홀로 또는 타인과 함께 자신의 몸뚱아리를 자유롭게 표현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혹시나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둬두었던 자아가 스스로 얽어맨 쇠사슬을 풀고 훨훨 날아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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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알레르기는 영화에서 종종 코믹적인 요소로 쓰이곤 한다. 모르고 땅콩을 먹다가 입술이 탱탱 부어오르거나 온 몸에 반점이 나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표현된다. 반대로 간혹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는 것을 소재로 스릴러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영화 속 이야기 또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든 음식 알레르기가 점차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알레르기란 그냥 두드러기가 나는 정도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것이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약물을 항상 지녀야 하고, 알레르기와 관련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소모해야만 한다. 이번 EBS 다큐 프라임 <아이들의 전쟁>에선 쌀 알레르기와 같은 희귀 사례 보다는 그나마 일반적인 사례들을 보여줌으로써 위험성이 보다 가깝게 접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땅콩, 우유, 계란, 밀, 과일 등등 알레르기의 종류는 셀 수가 없다. 알레르기 음식을 피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런데 왜 이런 치명적 알레르기가 늘어난 것일까. 

최근에 부쩍 늘어난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위생 가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도시와 농촌 간의 알레르기 비율을 비교해보면, 전자에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알레르기로 고생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이유는 바로 너무나도 철저한 위생 관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먼지 등에 존재하는 적고 약한 바이러스를 접하면서 조금씩 면역력을 키워 나갈 기회를 잃어버린 도시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아주 작은 병원균에도 쉽게 과도한 면역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즉 면역체계의 오작동으로 알레르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엔 아토피의 병인도 이런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알레르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현대 의학으론 아직까지 이상 면역체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처방책이 없다. 위생 가설이 맞다는 전제 하에 어렸을 적 철저한 위생관리 보다는 오히려 조금은 더럽고 지저분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예방 차원일 뿐이다. 일단 알레르기에 걸리고 나서는 오히려 지저분한 환경은 병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일상생활을 무너뜨리고 행복한 삶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런 알레르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알레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첫걸음은 알레르기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알레르기를 치료할 수 없기에 정상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알레르기를 갖고 있지만 '그게 뭐 어때'란 정신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몸에 점을 갖고 있듯 난 그냥 알레르기라는 것을 갖고 있을 뿐이야.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조심하며 살면 돼. 내 꿈과 인생을 위해 이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아.  

상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독히도 괴롭고 불편하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결국 행복의 길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동물, 인간, 질병>이라는 책에서도 질병에 관한 완전한 박멸을 꿈꾸기 보다는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국 에버딘 대학의 연구소에 재직하는 손한경 박사(보건학 전공)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을 무력화하려는 인간 때문에, 미생물은 유전자형을 바꾸거나 약물에 대한 감수성을 바꾸거나 사람 대신에 다른 종을 숙주로 선택하는 식으로 미생물, 인간, 환경의 삼각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삼각관계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는 인간의 면역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미생물의 감염력이 특별히 높아지지 않는 한 인간이든 미생물이든 커다란 재앙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롭게 나타나는 질병은 이미 이 균형 관계에 내재되어 밝혀지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균형이 파괴되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질병이나 오래된 질병의 새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알라딘 요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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