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 본즈 - The Lovely B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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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중생 살해 사건으로 항간이 떠들썩하다. 청소년 성폭력에 살인까지 벌어진지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피의자가 잡혔다. 하지만 피의자가 범죄를 전면 부인함에 따라 진짜 범인인지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범죄의 90% 이상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딸 낳아 기르기 겁난다는 부모들의 한탄이 허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영화 '러블리 본즈'는 성범죄의 희생자인 한 소녀가 죽은 뒤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았다. 현실과 천국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서 천국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소녀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를 둘러싼 주위 배경으로 표현됐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환상적인 모습은 때론 아름답고 때론 어두우며 또 가끔은 숨막히도록 겁난다. 범인이 잡히기를 바라는 증오심과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애달픔이 교차한다. 또한 막 사랑을 불태우고자 했던 남자친구와의 첫키스를 완성하고 싶은 들뜬 마음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는 죽은 소녀의 심리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음들이 오히려 영화를 어둡게 만든다. 소녀가 자신의 사체가 숨겨진 곳에서 나와 천국으로 향한다는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도 영화의 우울함을 지울 순 없다.  

영화는 청소년 성범죄의 가해자는 항상 이웃에 있다는 걸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범죄자는 단 한번의 범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 또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얼마나 큰 슬픔에 처하는지도 보여준다. 딸의 죽음을 함께 극복하지 못하고 잠시 떠나 있어야만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그 슬픔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죽은 소녀가 처한 사후세계에 있다. 사후 세계라는 것을 결코 볼 수 없는 현실의 인간들은 항상 상상 속에서 그 세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영화는 그 사후 세계를 만드는데 온힘을 쏟았다. 따라서 죽은 뒤의 모습은 관심사가 아니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사후 세계를 알고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흥미없는 영화가 될 듯 싶다. 다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희생된 소녀의 천국으로 가기까지의 심리가 마음에 여운을 남길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도 범죄자들은 결국 영화처럼 파국으로 치닫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진정 그들의 마음 속에 그 어떤 뉘우침도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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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럿거스대 엘리자베스 트라이코미 박사팀이 불평등을 못참는 뇌 보상회로의 활동을 기능성자기공명영상촬영장치로 촬영한 논문을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지금까지 심리학 실험으로만 증명돼 왔던 인간 심리의 기제가 뇌의 영역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심리학 실험 '최후통첩 게임'은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으로 불평등에 대한 반응이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진짜 화폐로 20만 루피아(약 250만원) 를 실험자 한 명에게 건네고, 이 실험자는 다른 실험자에게 배분을 한다. 만약 다른 실험자가 그 배분을 인정하면 둘은 그 배분대로 돈을 갖게 되고, 인정하지 않으면 둘 다 돈을 못받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두번째 실험자는 어떻게 배분되더라도 공짜로 얻는 돈이기 때문에 승낙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99대 1이나 98대 2의 불평등한 배분에 대해선 불가를 외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더라도 불평등을 참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실험 과정에서 사람의 뇌가 활발히 작용하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 이번 미국 럿거스대 박사팀의 논문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백만장자들의 수입이라거나 유명 스포츠 스타나 영화배우 들의 년간 수입에 입을 쩍 벌리면서도 한탄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냐고 생각하는 기저엔 차이는 인정하지만 그 정도까지의 차이는 인정할 수 없다는, 그것은 불공평하다는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의 불공평함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또는 분개하는 것일까. 최후통첩 게임의 경우 몇 대 몇 정도로 나누었을때 최대한 용납 가능한 수준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용납 수준이란 것이 본능적인 것이지, 사회적, 교육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 가능한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자본주의라는 체제에서 살던 사람과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 던 사람의 기준도 똑같은지 실험해 본다면 유익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극하는 욕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불공평을 수긍하는 태도도 유연(?)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도시와 농촌, 세대간의 차이는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  

반면 우리는 때론 복불복(1박 2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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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 카인드 - The Fourth Ki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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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nt to believe" 

마니아층을 만들었던 미국 드라마 X파일의 남자 주인공 멀더, 그의 사무실 벽엔 포스터가 붙여져 있고, 그 위엔 나는 믿기를 원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진실과 거짓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서, 다시 믿음과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에의 욕구를 드러내는 이 글귀는 X파일이라는 드라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X파일은 여동생이 사라진 걸 목격하고, 그와 비슷한 사례들을 통해 외계인이 벌이는 납치행각을 증명해 보고자 했던 멀더와 논리적 사고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스컬리의 대립구도로 흥미를 끌었다. 영화 <포스카인드>는 마치 X파일의 프롤로그처럼 느껴진다. 포스카인드는 외계인에 의한 지구인의 납치를 말하는 것으로 외계인을 만나는 퍼스트 카인드로 시작해 점차 그 강도가 세진다. 

영화 속에서는 40년 동안 알래스카에서 일어난 실제 실종 사건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FBI의 조사를 통해서도 밝혀지지 않았던 실종사건들을 타일러 박사가 자신의 환자들의 최면치료를 통해 밝혀보고자 했던 것을 보여준다. 실제 환자들의 녹화장면처럼 보이는 화면과 배우들이 연기한 화면을 분할 편집해 보여줌으로써 그 사실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포스카인드의 장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외계인 납치는 믿음의 영역임을 암시했던 X파일과 달리 진실과 거짓의 영역일 수도 있음을 편집구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타일러 박사가 찍은 환자들의 녹화테이프에선 새벽이면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하얀 부엉이를 목격하게 됐다는 공통점과 환자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방에서 억지로 끌려나가는 장면이 스크래치 되어 보여진다. 심지어 우주선인듯한 모습의 발광체도 집 밖에서 비쳐진다. 이런 화면들을 계속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외계 생명체에 대한 증거로 충분히 인정할 듯하다. 그런데 이 화면들은 정말 진짜인가. 페이크 다큐와 다큐의 경계선, 다큐와 픽션의 경계선 사이에서 영화는 관객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래서 멀더는 그토록 믿기를 원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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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
와리스 디리 지음, 이다희 옮김 / 섬앤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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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학생들의 졸업빵이 뉴스의 주된 소재가 되고 있다. 갈수록 도를 넘어서고 있는 졸업빵은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비판도 많다. 전통 또는 관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의 부당성을 보여 주는 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비리 또한 이런 이름으로 치장되어진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은 자신이 행한 일들이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가늠하지 못한다.  

<사막의 꽃>은 세계적인 슈퍼모델 와리스 디리의 자서전적 셩격의 책이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모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책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 할례의 처참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소말리아의 사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와리스 디리는 어른이 된다는 통과의례로서의 할례를 빨리 받고 싶어했던 철부지였다. 그러나 나이 든 남자와 결혼하게 될 처지에 놓이자 집을 나와 도시로 무작정 떠나고, 다시 친척이 있는 런던까지 흘러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델이라는 일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고, 드디어 모델 일에 나선다. 가짜 여권에 가짜 결혼 등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점차 이름을 떨치게 된 그녀는 자신이 여자로서 꽃피우기 위해선 할례의 상처를 씻어야만 한다는 걸 깨우친다. 소말리아 사막에서의 삶을 뛰쳐나와 자유롭게 자신의 뜻대로 살다보니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도 으례 마땅한 일이라 여겼던 할례가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와리스 디리는 세상 모든 여성들이 할례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운동에 나선다.    

유목민 사회에서 병에 걸리면 죽거나, 살거나 두 길 뿐이다. 중간이란 없다. 사람이 살면, 그건 다행이다. 우리는 병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의사도 약도 없으니,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도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도 괜찮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나가기 때문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늘 인샬라의 정신이 우리네 삶을 지배한다.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생명은 선물이고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선택임을 받아들인다.  157쪽 
  

와리스 디리는 마땅하고 당연한 일을 한 발 떨어져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순간 정당함과 부당함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땅함이 비교될 수 있는 공간에 놓여지면 정당과 부당의 길 중 하나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샬라의 정신은 이런 정당성과 부당성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삶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철학이기도 하다.  

나는 삶을 체득했다.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의 삶이었다. TV에 나오는 남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그런 인위적인 삶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내겐 생존본능이 있었다. 나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기만 했으니까. 살아오면서 가장 귀중했던 시간은 식구들과 함께 지낸 때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모닥불 가에 앉아서 별 것도 아닌 것에 웃던 밤들을 떠올리곤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생명이 다시 깨어나면 잔치를 벌이던 것도 생각난다.  

소말리아에서 크면서,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감사할 줄 알았다. 비를 반갑게 맞은 이유는, 비가 오면 물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물 걱정 하는 사람은 없다. 부엌에서는 물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쓸 수 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곧바로 나온다. 부족함을 알아야 감사할 줄도 안다. 아무 것도 없던 우리는 매사에 감사했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나는 호화로운 집을 때로는 한 채도 아니고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차, 보트,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매일 만난다. 그러나 그 서람들은 더 많은 걸 원한다. 다음으로 구입 할 것이 마침내 행복과 마음의 평온함을 가져다 줄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제 사고 싶은 걸 다 살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장 가치있는 재산은 인생 그 자체이고 그 다음은 건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온갖 하찮은 일에 안달하면서 귀중한 건강을 망친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지만, 국민들은 모두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돈도 모자라지만 시간도 모자란다. 모두가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전혀 없단다. 거리는 여기 저기 바쁘게 쫓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무얼 쫓아다니는지, 그건 하늘만이 안다. 나는 두가지 삶의 방식, 소박한 삶과 바쁜 삶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을 매우 감사히 여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소박한 삶의 방식을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348~349쪽

우리는 풍습, 또는 관례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부당한 일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또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말리아의 여성 와리스 디리는 우리에게 잔잔한 미소를 띠며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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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세상을 제압한다. 순결한 처녀로 키우기 위해 늙은 여자의 손을 빌려 먼저 칼질을 낸 다음, 정숙한 아내로 살기 위해 오로지 남편의 칼이 그곳을 다시 갈라낸다는 이 엽기적인 상상력!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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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신동이라 불렸던 모짜르트. 그의 생애를 다룬 예술 작품들은 많다. 개인적으로 그중에서도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짜르트라는 이름 이외에도 살리에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줬기 때문이다. 천재를 뛰어넘을 수 없는 2인자의 시기와 설움을 잘 드러낸 이 영화는 천재를 바라보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모짜르트의 특이한 웃음으로 표현된 천재성은 기행과 아울러 슬픔까지도 묘하게 스며있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와는 다르다. 뮤지컬은 아마데우스와 그의 아버지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주의 보호 아래 안정된 기반 위에서 아마데우스의 능력을 펼쳐보이도록 해 주고자 했던 아버지와 틀에 갇힌 삶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음악을 펼쳐보고자 했던 아마데우스의 충돌이 뮤지컬을 끌고 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자간의 갈등이 왜 그리도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웠는지를 충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화려한 가발과 의상, 무대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아름다운 선율이 귀를 기쁘게 해준다는 것이 위안이다. 귀에 익숙한 남작부인 신영숙의 '황금별'은 소름을 돋게 만들고, 대주교 역의 민영기가 부른 '모차르트를 찾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등은 가슴을 확 뚫어준다.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어린 모짜르트도 아쉬움이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어린 천재 모짜르트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가 즐거워하거나 반대로 좌절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대비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영화 아마데우스의 강렬한 웃음 소리가 마음 깊숙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으리라.  

오이디푸스.엘렉트라.카인 콤플렉스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때론 족쇄가 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뮤지컬 모짜르트는 이런 가족간의 상처를 드러내고자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아 그 상처가 좀처럼 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재성을 지닌 아이를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아버지와 여리고 여린 아들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끔 짐처럼 느껴졌던 이들에겐 한없이 가벼운 상처로 비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하기에 아버지를 잃은 모짜르트의 눈물 또한 모호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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