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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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인생상담기다. 사람들의 고민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키워드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어준은 상담하는 곳곳에서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선택에 따른 위험부담을 제로로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그건 삶에 대한 응석이다. 158쪽 

사람들이 선택을 못 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니까. 그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기 싫어서니까. 185쪽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224쪽  

선택은 다시말해 경제 용어로 쓰이는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들이 기회비용을 최소화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합리적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기회비용이 0인 적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를 희생하고서 다른 중요한 무엇인가를 택하는 것이 바로 선택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둘을 모두 가지려 하기 때문에 고민에 빠지고, 선택이 주는 비용과 위험부담을 감수하지 않고 넘어가려 하는데서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고민이라는 것도 우스운 경우가 많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양자의 갈림길에서 혼동스러워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길이 자신이 택한 길이 아니라 부모나 형제, 가족, 친구 등 남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임을 모르고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고민에 앞서 그 기대를 저버리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고민은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이 겁나고 무서운가. (언제나 이미 이긴 경기만 이기는 법이다. 272쪽)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선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행하고 그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될 지라도 그 실패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화초조차 되지 못한다.    

개인적으론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사랑에 대한 상담에서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 (257쪽) 와 같은 금쪽같은 말보다도 더 깊게 내면에 와 닿은 것은 여자들이 남자를 선택할 때 기준을 말하는 거였다. (여기서도 선택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 그래서 이것은 꼭 애정의 문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인생으로 확대해도 무난하다) 

저자가 배낭여행 가이드로 나서면서 만나게 된 커플들 중 60~70% 정도가 여행 중 또는 여행 후 귀국하고 나서 이별하게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배낭여행이라는 것이 계획된 대로 움직여지기 보다는 우연한 사건 사고와 끊임없이 마주치기 떄문이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돈은 없고 주위엔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위기를 어떻게 넘어서는냐가 바로 그 사람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하냐가 진정 그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대부분의 남자는 모든 사건의 원인을 여자에게로 돌리거나, 사건이 발생된 것에 대한 핑계를 대는 데 바쁜 모습을 보인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럴 때 보여주는 선택을 포함해 갈등 상황에서, 또는 여러 갈림길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선택해 온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못나면 못난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자신을 떳떳하게 바라봄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단 내 길을 간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마저 저버려서는 안될 일이다.   

PS 책을 읽다보면 신해철의 노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가사가 자꾸 떠오른다. 경쟁의 구도 속에 갇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채 사다리만을 오르려 하는 모습이 자꾸만 거울 속에 비쳐진다. 혹 꿈을 꾸고 있다면 꿈이라는 단어로 불가능함을 위로하지 말고, 또 핑계거리를 찾지 말고,  목표를 세워 그 목표점을 향해 한발 한발 나가도록 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남보다 앞에 있어야 하는 길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다. 다만 그 목표점은 아스팔트여야 할 필요가 없으며, 수많은 갈래길로 이루어진 오솔길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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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바위 - 영험한 오하쓰의 사건기록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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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어버린 실화에는 감추어진 것들이 많다. 필사의 과정에서도 수많은 오탈자로 뜻의 변화가 발생하는데 구전의 과정에선 오죽하겠는가. 특히 시대의 영웅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 덧붙여지는 것과 제외되는 것들로 인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일본 에도 시대 아코 무사 47명의 충혼에 대한 이야기는 <가나데혼 주신구라>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 작품이다.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충성심은 회자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발단이 된 사건에 대해선 정확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오직 연극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들은 충성심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일 수밖에 없다.  

소설 <흔들리는 바위>는 아코 무사들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난 시대를 배경으로 갑작스레 유아살해라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아살해와 아코 무사와의 관계가 도대체 이어질 것 같지 않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유아살해라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인물은 오하쓰라는 처녀와 우쿄노스케라는 젊은이다. 오하쓰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마음이 남아있는 곳에서 과거를 볼 수 있고, 사령 즉 유령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쿄노스케는 지금으로 말하면 수학에 재능을 가진 심약한 젊은이로 논리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 둘은 유령이 씌운 사람이 유아살해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되고 그 유령의 억울함이 아코 무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책은 판타지와 추리, 활극이 잘 버무려져 읽는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진중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예외없는 절대명령으로 인한 희생, 집단에 따라야만 하는 개인의 희생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미야베 미유키는 아코 무사의 이야기의 발단이 한 무사의 정신착란으로 인해 벌어졌을 때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영토 안에서 칼부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 정신착란 무사로 인해 어겨졌다. 무사는 할복을 명령받고, 칼부림의 대상이 됐던 무사 또한 피해를 입는다. 칼부림을 했던 무사가 정신착란이었음을 번주가 인정만 했더라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묻어둠으로 인해 무사의 부하들은 할복한 주인을 위해 상대를 베어야만 한다. 그 시대는 그랬다. 이 부조리를 모른 사람이야 충절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겠지만 전후사정을 알고 난 무사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영지 내에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절대 금한 곳이 있었다. 명령 자체는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들개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촌민을 구하기 위해 칼을 쓴 무사는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분과 직장을 잃고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게 정당한 대우일까.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무사의 노력은 결국 억울함으로 인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던 중세 시대에만 벌어지고 있는 일일까. 혹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법이나 명령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공중파 방송에서 보여주는 시청자 칼럼이나 여러가지 고발 시사 프로그램들 속에서 우린 중세 못지않은 억울함을 마주치게 된다.  

그 영혼들을 어찌 위로할 수 있을까. 절대라는 단어의 척박함과 견고함이 망령이 되어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섬뜩해지는 세상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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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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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아이디어야말로 시나리오의 근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행동을 이야기의 아이디어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실제로 그는 행동이 사람, 곧 인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반드시 행동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행동은 실제 우리 삶보다 더 거대할 뿐만 아니라 그 삶을 함께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23쪽 

인과관계로 연결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가 된 플롯은 바로 한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 행동이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주인공의 가장 깊숙한 욕망과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롯이 생명이다. 주인공의 강렬한 욕망이 모든 극적 행동에 이어져 있다면, 플롯은 주인공의 간결한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다. 66쪽 

플롯을 단순하고도 간결한 액션 아이디어로 채워라. 관객들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관객들에게 정서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장면을 더하라.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며...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때 일어나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일어난다. ...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에서 그 원인은... 악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과실 착오나 실수에 있어야 한다. 103쪽 

주인공에게 닥친 불행이 부당하며, 주인공 스스로 그 불행을 불러들였기 때문에 관객들은 연민과 공포를 느낀다... 드라마에서 불행의 원인은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동물적 본성에서 비롯한 악행에 있는 것이 아니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전혀 흥미롭지 않을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는 그런 잘못된 판단을 일러 비극적 오류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불행은 인간의 원초적인 충동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일어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05쪽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 행동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행동은 중요한 도덕적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성격과 사상, 이 두가지이며, 당연히 삶에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도 이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격이란 엄밀하게 말해 어떤 사람의 사상과 그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한 개인의 도덕적 성질이라고 말한다. (은행을 터는 사건 그 자체에도 동기를 생각해야 그 사상이 드러난다.)140쪽 

시인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며, 행동하는 인간은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다. 인간의 성격이 항상 이 두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이 도덕과 부도덕에 따라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인 인간은 우리보다 더 선하거나, 또는 우리보다 선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와 같다. 163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이야기 속에서 인물을 창조할 때 쓸 수 있는 다섯 가지 삶의 행동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섭취 능력 - 식생활 습관 2. 욕구능력 3. 감각 능력. 4 운동능력 5 사고능력 

당신의 영혼에서 출발하여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도록 노력하라.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하며, 나머지는 나중에 저절로 따라온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으로 인용되어 온 유명한 진 와이덜의 말이 있다. 오늘밤 내가 극장에 간다면 과연 이 영화를 보고 싶어할까. 드라마 코미디 호러 에스에프 액션 등 무엇을 쓰든지 간에 당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찾아라. 197쪽 

가능한 것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일어난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 시나리오를 쓸 때 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209쪽  

일반적으로 시는 인간 본성에 자리잡은 두 가지 동기에서 비롯한다. 모방은 인간이 어릴 때부터 가진 본성이며, 인간이 다른 하위동물보다 나은 장점들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모방을 가장 잘하며, 처음엔 모방으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한 것을 보고 쾌락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을 직접 볼때는 고통스러우나, 그것을 예술로써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은 작품을 볼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 213쪽 

극적 행동은 하나로 통일된 행동 곧 하나의 연속적인 전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단지 비극적 구조가 요구하는 것보다는 좀더 느슨할 뿐이다. 중요한 점은 희극에서는 플롯이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물이 생명이다. 희극은 발견과 발전의 여지가 많으므로 플롯을 너무 탄탄하게 짜려고 하거나 도덕적인 내용을 너무 많이 담으려고 하지 마라. ..다시 말해 희극의 목적은 관객을 웃기는 것이며 희극적으로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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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3-1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안경을 통해 본 것이라...
암튼 다행이네요. 관심을 끌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을 발견했으니 짝짝짝~~~
선의의 행동도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저에겐 도덕은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
 

지하철역에 새로 생겨나고 있는 모니터에는 지하철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가 표시된다. 보통 한 역마다 2분쯤 걸리니, 두 정거장 전부터 보여주는 모니터에 전철이 표시되면 대략 4분 이내에 도착한다는 걸 알게 된다.   

지역 도시에서는 시내버스가 몇분 후에 도착하는지를 표시해 주기도 한다. 몇분 후 몇번 노선 버스가 어디 정류장에 도착하는지를 알려주는 서비스를 모바일을 통해서도 받아볼 수 있다.  

이렇듯 기다림도 계산이 되는 시대다. 막연한 기다림은 사라졌다. 초조해할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기다림도 편안해진다.  

사람과의 만남은 또 어떤가. 휴대폰 덕분에 약속한 상대가 어디만큼 왔는지를 시시각각 체크할 수 있게됐다. 반면 약속은 쉽게 깨지기도 한다. 연락이 어려운 시절, 한번 정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무게감을 지녔지만, 어느 순간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고 쉽게 깨지게 됐다. 또는 기다림이 헛되게 무산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절부절하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괴로워할 필요는 사라졌다. 

예측가능한 기다림이란 편안함을 준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이 철저한 계산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간혹 그 계산이 틀어지면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래서 그리워지는 기다림이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꼭 초조와 불안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봄이 되면 꽃이 피길 기다리고, 겨울이 되면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 물론 이런 기다림도 예보라는 형식을 통해 미리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예보가 100% 맞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흥분을 가져온다. 동네 어귀에 피어난 샛노란 개나리나, 새벽 귀가길에 우연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첫눈은 행복감을 자아낸다. 약속을 정해 애인을 만나는 기쁨보다도 깜짝 출연으로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훨씬 크듯이 말이다. 

편안함 보다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예측하지 못한 기다림의 대상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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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3-1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찾아 나서는 것도 기다림이 아닐까 싶네요. 나의 기다림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기다림. 이렇게 따뜻해진 날씨에 아직 매화가 안 핀걸 보니 그래도 역시 지조가 있네요. ^^; 기다림의 크기만큼 기쁨의 크기도 커지길 바랍니다.

하루살이 2009-03-1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남산에도 얼른 개나리가 폈으면 좋겠어요. ^^
 
멋진 하루 - My Dear Enem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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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멋진 하루는 조금 당황스러운 영화다. 전도연이 1년 전 빌려줬던 350만원을 받기 위해 헤어졌던 애인 하정우를 찾아가고, 하정우는 돈을 갚기 위해 전도연과 함께 주위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만나 돈을 빌린다는 게 영화의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선 도대체 왜 전도연이 1년전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면서까지 돈이 필요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를 보다보면 이 질문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작하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다. 

어쩃든 영화는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전도연과 하정우가 사람들을 만나 돈을 빌리는 모습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겉모습은 제각각이지만 사람들 가슴속엔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한 딱지가 들러붙어 있음을 은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허허거리고, 다른 누군가는 가시 돋힌 말을 내뿜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하고, 억척스럽기도 한 가지각색의 겉모습은 상처를 감추기 위한 포장일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필요한 건 따뜻한 위로 한마디다.  

너 괜찮니? 

하정우가 지하철로 이동하는 중 꿈이야기를 한다. 링 밖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저씨같지만 격투기가 시작되면 거친 모습으로 돌변하는 표도르가 나타나 자신을 토닥거리며 "너, 괜찮니"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전도연이 눈물을 흘린다. 그녀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그저 "너, 괜찮니"라는 단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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