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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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고로 80분마다 기억을 잊는 수학박사. 그리고 그의 집에서 식사와 청소를 담당하는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 이 세명이 엮어가는 사랑.우정이 소설의 큰 줄거리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내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메모를 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아야 하는 박사의 아픔이나, 남편과 헤어져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가정부의 아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전해주는 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의 외로움, 그리고 박사의 형수지만 과거 그를 사랑했던 여인으로서의 애달픔 등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소설은 애틋함을 더한다. 물론 이들 사이에 신뢰와 우정이 커가는 모습에 흐믓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흐믓함과 애틋함, 바로 이 정서가 소설을 관통하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여기에 덤으로 박사가 말해주는 숫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을 넘어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도 보여준다.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은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51쪽 

박사의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가 모른다, 알 수 없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른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향한 도표다. 91쪽 

아무튼 그는 그 초라한 손가락으로 드넓은 하늘의 한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무도 구별하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점에 의미를 부여한다.  113쪽 

수학 또는 수치 대신 인생을 집어넣어도 의미는 통한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인생을 알 수 없다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새로운 진리를 향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조용한 진리를 대할 때 때론 환호하고 때론 절망하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인생은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이며 그 속에서 사랑 또한 수와 같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사랑의 크기는 0에서부터 무한대까지 다양하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향해 나갈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박사의 온전한 정신의 한계가 80분도 채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만, 비록 박사가 자신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와 함께 나눴던 추억의 크기는 무한하기에 이들의 사랑과 애정은 절대 나누어지지도 빼지지도 않고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처럼 나눗셈과 뺄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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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할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워왔니?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 

노인으로 태어나 점차 젊어지게 되는 벤자민 버튼은 거동이 자유로워지자 집을 떠나 여행에 나선다. 몇년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그를 키워준 어머니가 건넨 첫마디가 바로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워왔니?"다. 

일상의 지루함은 반복에서 비롯된다. 하루하루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간혹 그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탈출을 감행하는 모험심으로 꽉 찬 사람들도 있다. 반복은 지겨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반복이 꼭 지겨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운동을 하든, 악기를 다루든, 기계를 만지든 간에 반복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력을 쌓을 수 없다. 소위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반복은 되풀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번복이 필요하다. 번복이란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한다. 반복 속의 번복 또는 번복을 통한 반복이 반복의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즉 판박이 같은 반복만으로는 발전이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반복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차이점을 간파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번복의 거름이 된다. 즉 반복이라고 해서 똑같은 반복인 것이 아니라 번복의 반복이 되는 것이다. 번복을 갖춘 반복의 힘은 가치를 생산한다.  

그래서,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배운 다는 것은 인생의 큰 기쁨이 된다. 단지 그 기쁨을 찾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대부분 반복 속에 파묻혀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번복의 순간을 찾아내지 못하고 반복을 뛰쳐나와 또다른 반복만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반복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찻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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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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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어린아이가 되면서 생을 마감한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하지만 그냥 기발한 발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생각보다 풍부하고 잔잔한 감동을 전달한다.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이 큰 줄기를 형성하는듯 보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시간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됐다.  

노인에서 어린아이로의 성장은 살아가는 동안 늦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겪는 경험들은 모두가 처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벤자민버튼의 입장에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겪는 일이 된다. 그러나 늦더라도 처음은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도 벤자민버튼은 자신의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가치 있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하고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은 없단다.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 거니까. 최고로 잘할 수도 있고 최고로 못할 수도 있고. 난 네가 최고로 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 내기를 바란단다.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보길 바란단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기를 바란단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란단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단다. 

이것은 또한 영화 속에서 영국해협을 건너는 엘리자베스 에봇 여사의 일화를 통해 보여진다. 

젏었을 적 해협을 거의 다 건너기 전 포기하고 말았던 그녀에게 기자들은 다시 도전할 것인지를 묻는다. 여사는 "왜 하면 안되죠"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남들은 불가능할거라 생각한 나이에 34시간 22분을 헤엄쳐 해협을 건넌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래서 세상엔 결코 늦은 일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는 끝없는 도전정신을 자극시킨다. 나이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말라고. 우리 모두 시간을 거꾸로 먹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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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영상포엠 충남 당진 편에선 굴따는 70노파의 모습이 보여졌다. 갯벌에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굴을 따는 노파는 바구니 가득 굴을 따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욕심껏 굴을 따지 못하는 것은 가득찬 바구니를 들고서 갯벌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구니는 한가득 차지 못하고 조금은 허전한듯 비어있다.  

제작자는 넌지시 할머니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을 비우시는건 어때요? 할머니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한다. 욕심을 버리고 어떻게 사느냐고. 욕심은 죽었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머니의 말은 머리에 쿵 하고 충격을 던져주었다. 무소유의 정신, 허허로움 속에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은 할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을 부러워하던 이에게 그야말로 70년이라는 삶의 세월이 묻어나는 한마디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없이 가벼워지고자 하는 영혼에 천만근 추를 매달아놓은듯 땅에 다리를 박고서 삶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삶이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중간 중간 손 안에 많은 것을 채우고 또 채우기도 한다. 할머니가 말한 욕심은 손 안에 채웠던 그 순간들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입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남의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기 위해서 등등, 결국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던가. 그 손에 쥐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할머니의 욕심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욕심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게 인생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손 한 움큼 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바구니 가득 굴을 담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손 한 움큼의 욕심. 살아가는 의지를 불태우고 만족감에 행복할 수 있는 그 적당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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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인간
심포 유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들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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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의 서로가 그립고 반가워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철없고, 상처 입기 쉽고, 자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괴로워했던 과거의 모습을 서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금과 이어진다. 필요한 것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에만 사는 인간은 없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우는 것밖에 모른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사람이 된다. 내게는 과거가 없다.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다. 함께 과거를 그리워할 친구가 없다.  325쪽 
 

소설의 주인공 나쓰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숨마저 위태로울 정도로 큰 사고였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인간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에선 과거의 그가 없다.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쓰미는 나쓰미라는 이름을 가진 예전의 그일까.(이런 소재는 소설이나 SF영화의 단골로 등장한다) 과거의 기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 또한 예전의 그가 아닐 수도 있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국의 땅에 건너갔을 때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게 쉬울 수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음을 나쓰미의 치료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나쓰미는 마치 아이가 말을 배우고 인생을 알아가듯 천천히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간다. 하지만 서른을 갓 넘긴 그가 열살짜리 아이일 수는 없다. 8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나쓰미는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과거의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사건의 전말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자가 왜 자신을 피하려 하는지, 과거의 친구들이 머뭇거리며 왜 자신의 애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지, 그리고 조금은 몰상식해 보이는 친구들을 왜 사귀었는지 의심가는 과거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의사는 왜 그토록 자신이 과거를 잊고 현재로부터 새로 출발하도록 하려 애썼는지 등이 소설이 결말을 향해 가면서 숨가쁘게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벌어지는 대형사고는 과거를 알게 된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인지, 현재의 나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할 것인지를 시험하게 만든다. 자아라는 정체성이 갖는 끈적끈적한 한계. 즉 자아를 규정하는 순간 생겨버리는 경계선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경계선 안에 머물고 싶어한다. 그러나 때론 불굴의 의지로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도 발생한다. 바로 그 순간이 기적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이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안도의 순간일 수도 있다.  

즉 '나라는 인간' 이라고 규정해버린 '나'의 틀을 깰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의 순간이 되며, 그것이 새로움을 향한 변화의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기적의 인간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생명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틀을 깨는 바로 그 순간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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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러시아워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옆 사람과 몸을 꼭 붙이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온 일본을 혈관처럼 달리고 있다. 마침내 오염돼 쓸모가 없어진 혈액은 신장에서 걸러 몸 밖으로 버린다고 들었다.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걸까. 러시아워에 시달리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2쪽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 누구든 한번 찾아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그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사실에 길들어져 병원으로 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환자도 아무도 찾아주지 앟는 것에 끝내는 길든다. 길들 뿐이다. 쓸쓸한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 쓸쓸함에도 결국은 길든다. 병과 상처에 고통받는 일에도 길든다. 길들어, 그에 맞설 기력을 잃어간다. 110쪽 

사람에게는 각기 삶의 방식이라는 게 있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그건 하나의 삶의 방식이야. 아픔을 참고 무리를 하는 삶은, 남들에게는 몸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어리석은 삶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말이야, 그때의 생활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럴수록 사람은 그 생활을 소중히 여기고 무리를 거듭하게 되는 법이야. 176쪽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원해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사람에게 죄를 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인심을 베풀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으니 입원이라도 시켜두자. 주위 사람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취한 조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사람에게 죄를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강탈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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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2-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발자국 남겨주세요. 가끔은 흔적이 그립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