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는 밀실범죄를 다루고 있다. 롯폰기 빌딩 12층 사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트릭을 밝히는 것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단 소설의 전반부는 방범 컨설턴트-다른 소설 이라면 탐정에 해당하는-의 입장에서, 후반부는 범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범죄가 일어난 수단과 방법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게 된 범인의 인생역정을 통한 심리적 접근까지도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또한 절대 안전하게 설계된 또는 만들어진 로봇이 어떻게 범죄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통해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소설의 제목 <유리망치>는 범죄의 도구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정신상태도 보여준다. 흔히 질풍노도라고 부르는 청소년기에 가해지는 압력은 어른이 견뎌낼 수 있는 정도의 것에도 청소년의 정신상태를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 마치 어느 정도 버텨내던 유리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순간 깨져버리듯 말이다. 범인의 범죄동기는 이렇게 깨져버린 정신 속에서 만들어져 죄의식을 지우고 범죄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어른들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던 범인은 돈이 주는 힘을 통해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그 힘을 얻기 위해 그는 또다른 폭력을 사용한다. 그가 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일그러져 있는 셈이다. 힘에 대한 관념은 범인이 어렸을 적 경험한 극한에 가까운 체험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계속 유지하도록 만들어준 사회 탓이기도 하다. 밀실범죄를 다룬 재미있는 추리소설 뒤편엔 일그러진 힘에 대한 자화상도 살펴볼 수 있다.  

사족 :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을 우리는 어떻게 배울까. 지금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그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그 방법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나중 문제다. 소설 속에선 얼핏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단상도 비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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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첫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번째나 세번째를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첫경험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씩 건넨다. 첫경험의 첫은 첫째가는의 첫이 아니라 처음의 첫을 의미한다. 처음의 첫이 둘째와 세째 등과 다른 것은 두근거림 때문이다. 첫은 기대를 불러오고 두려움도 가져온다. 기대와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것이 묘하게 합쳐져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첫경험이 제일 좋은 또는 제일 멋진 경험인 것만은 아니다. 첫경험은 별로였지만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더 나아지는 경우도 많다. 또는 두번째 세번째가 첫경험의 짜릿함보다 더한 짜릿함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기대와 다른, 또는 두려움에 미치지 못하는 그런 첫경험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첫경험을 말하는 것일까. 

첫만남, 첫사랑, 첫골, 첫홈런, 첫키스, 첫여행...... 

살아가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많지않다. 스트레스로 가슴이 뛰는 건 두근거림과 다르다. 걱정과 근심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슬픔은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인생에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도 한다. 그러기에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은 그야말로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다. 아니, 기쁨과 환희에 대한 기대, 또는 기다림이 가슴 두근거림으로 나타난다. 첫경험은 그래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주는 기대와 두려움이 주는 기쁨이다.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가슴 두근거림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느끼고자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 첫경험을 향해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인생의 길목에서 첫경험의 순간들을 계속 마주쳐야 한다. 첫경험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인생을 가슴두근거리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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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엽문>은 실제 역사적 인물인 엽문에 대한 이야기다. 절권도 창시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의 영춘권 세계를 살짝 엿보게 되는 이 영화는 <황비홍><정무문><무인 곽원갑>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일개 개인으로서의 무인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에 쫓기어 또는 역사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반청 또는 반일을 위한 도구로서 무술을 사용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란한 손동작을 자랑하는 영춘권의 멋에 빠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술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도 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엽문이 자신이 무술만 수련한 헛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무술이 타인들 또는 국가를 위해서 쓰일 수 있게 됨으로써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생각의 시발점이 된다.  

무(武)란 그 뒤에 어떤 글자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상반된 이미지를 갖게 된다. 힘 력(力)자냐 큰 덕(德) 또는 길 도(道)냐에 따라 무는 우리에게 억압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깨우침과 평안의 길이 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일본의 가라데는 무력이 되고, 영춘권은 무도 또는 무덕이 된다. 물론 무술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또 이와는 아주 다른 길도 있다. 영화 <소오강호>에서 절대무공을 지닌 임영영(?)은 세상에서 벗어나 은거하고자 한다. 자신의 연인의 목끝에 드리워진 칼날 앞에서는 그 어떤 절대무공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세상과의 연을 끊은 것이다. 그러나 무림이 말하듯, 또는 세상살이가 이야기하듯 혼자만의 것은 결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것이 의미를 갖으려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드러나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임영영의 무 또한 결국 무도의 이미지로 세상에 모습을 내비치게 된다.  

무는 쌓아가는 것이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쌓아진 무가 정신적 성장까지 가져다 주었을 때 무는 뒤에 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도는 무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에서 성장해 가는 모든 것들의 뒤에 붙어야만 할 숙제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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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그럴 때에는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덜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통의 순간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은 "나보다 더욱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라"일 것이다. 즉 자신의 고통은 더 큰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교를 통해서 안도하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들의 관점으로 바라본 통증 완화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위치는 비교를 통해서만 찾아질 수 있다. 

반면 슈바이처의 관점은 그야말로 나눔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의 고통은 나의 잘못때문이라는 자기 반성적 자세보다도 한발 더 나아가 이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마음가짐은 그야말로 범부의 태도를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다는 시혜의 자세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왔을 것이다. 날개없는 천사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세상이 힘들어질 떄면 슈바이처를 떠올릴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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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와 함께 각성의 의미도 갖는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눈이 머는 바이러스가 퍼지고, 이 와중에 인간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지, 반대로 현재의 힘의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눈을 뜨게- 해준다. 그리고 다시 느닷없이 시력을 회복하면서 과연 살아남은 자들이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 암울한 미래로 떨어질지 관객 스스로 상상하게 만든다.  

힘의 균형이 깨져 나가는 것은 먼저 개인과 국가간의 관계에서부터다. 여기에서 힘이란 부와 권력보다 더 근원적인 물리적 힘, 즉 폭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란 군대와 경찰과 같은 물리적 힘을 갖고 있는 대상이다. 그들은 눈이 먼자들을 격리 수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다. 격리에 저항하는 자들은 군의 총에 의해 사살당한다.  

격리수용된 눈먼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의 문제다. 특히 먹을것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과정에서 수용인구가 늘어나자 힘의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한쪽 집단은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여자가 힘의 중심에 서게 되고, 다른 한쪽은 총을 든 남자가 힘을 발휘한다. 총은 곧바로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권력을 휘어잡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이 총을 쥔, 즉 힘을 꿰찬 권력은 이 힘을 과용해 성상납과 패물과 같은 재산을 빼앗는다. 눈이 멀었다는 그 한가지 점만으로도 인간은 도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민주적 집단보다 총을 쥔 집단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눈먼 총이라는 힘은 결국 그 눈멈 때문에 파멸에 이른다. 유일한 눈뜬 자에 의해 권력의 치우침은 깨지고, 그 와중에 격리수용을 담당했던 사회마저 무너져내린다. 이제 모든 세상이 눈 멀어 있는 셈이다. 그 속에서 과연 인간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믿음만이 그 결과를 예측가능하도록 해 줄 것이다. 영화는 눈먼 자가 다시 눈을 뜨는 것을 통해 암울한 전개과정에서 한줄기 빛을 내비친다.  

그런데 정녕 우리는 눈을 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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