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선택의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이 영화 바빌론 AD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뇌까지 근육질로 꽉 차 있을 것 같은 배우 빈 디젤의 액션에 대한 기대감이 제일 컸다. 다음으론 마티유 카소비츠라는 감독에 대한 믿음이랄까. <증오>와 같은 현실감 넘치는 영화에서 SF로의 이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4개의 스턴트팀을 동원했다는 액션 장면은 소문난 잔칫집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있는냐 하면 뻔한 구성에 뻔한 줄거리인지라 그닥 흥미를 끌지 못한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가 않다.

미래를 구할 오로라라는 소녀를 몽골의 수도원에서 뉴욕으로 데려가야 하는 사명을 띤 투롭(빈 디젤)이 마지막에 임무를 거부하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는 내용이다. 궂이 영화의 특이한 점을 말하고자 한다면 가족에 대한 시선이라고나 할까. 첨단 컴퓨터를 모체로 한 아이와 동정녀 신화로 태어난 쌍둥이와 가족을 이루는 투롭은 피나 DNA와 상관없는 가족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한 가족이란 혈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지금 현실에서도 가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1인 가족이 늘어나면서 이들끼리 실험적인 가족도 탄생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가족에 대한 영화는 아니기에 비난의 화살을 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영화는 할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냥 입을 다물고 끝내 버린다.(아이고, 아까워라 내 돈~~ ㅜㅜ)

어정쩡한 것은 역시 군대에서 줄 설 때나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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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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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겨워질때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렀다고 말하곤 한다. 이 막다른 골목의 다른 말로는 벼랑끝과 늪이 있다. 하지만 벼랑끝과 늪은 닮은듯 하나 다르다.

벼랑끝에 몰린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스스로 뛰어내리든가 그곳을 탈출하든가.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몸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말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그 끝을 보게 된다. 하지만 늪은 어떻던가. 늪이라는 것을 알고서 빠지는 경우는 없다.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늪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더욱 빠져들게 되는 것 또한 늪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아웃>에서는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이들은 도시락공장에서 야간에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야요이가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벼랑끝에 몰렸던 야요이는 마사코에게 도움을 청하고 결국 네명의 여자들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서 야요이를 돕게 된다. 남편의 시체를 토막내 유기함으로써 벼랑끝에서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시체의 일부가 발견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타케라는 남자가 접급해 온다. 신분도 모르는 시체들을 토막내 유기하는 일로 돈을 벌자고 접근해 온것이다. 이 일은 네 명의 여자들을 늪으로 몰고간다. 소설은 이 과정에서 네 여인의 연대감과 질시, 두려움과 절망 등등 심리적 과정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즉 벼랑끝에서 늪으로 내몰린 여인들의 심리가 흥미진진한 소설인 것이다.

속으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때문이다. 그 대신 프라이드가 가혹한 노동을 견디게 해 준다. 그녀는 모든 문제의 본질을 덮어 두고 마음속 깊은 곳에 걸어 잠근 채, 부지런함을 철칙으로 삼았다.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요시에 46쪽

빨래없이 돌아가던 세탁기를 보며 헛돌고 있던 신용금고 시절의 자신을 겹쳐봤던 적이 있었다. 분명 집에서도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은 대체 뭐였던 걸까.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마모되어 갈 곳을 잃은 자신을 생각하자니 눈물이 넘쳐흘렀다. -마사코 367쪽

분노는 자신을 해방시킨다. 그날 아침, 자신은 확실히 변한 것이다. -마사코 402쪽

그러는 사이 다름 아닌 겐지가 자신들의 생활의 나침판 그 자체였나 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의 건강, 남편의 기분, 남편이 버는 돈. 그것들에 일희일비하는 생활을 해 온 것이다. 야요이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신이 남편을 죽인 거니까. -222쪽

과연 소설 속 이 네 명의 여자 주인공들은 인생의 벼랑끝에서 탈출하고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약 탈출이 가능하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까. 소설이 흥미진진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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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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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닐 부어맨은 한때 명품중독증에 걸렸다. 사람을 대할 때면 그 사람이 무슨 옷과 신발, 가방 등을 걸치고 있는지로 캐릭터를 판단했다. 자신 또한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브랜드의 종류를 바꿔가며 스타일을 연출했다.

그러나 어느날 이런 자신이 허망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접하게 됐다. 행복해지기 위해 명품을 구입했지만 행복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자꾸 더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결심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브랜드 제품을 다 불태워버리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유명해지기 위해 별의별 짓거리를 꾸민다라거나 왜 태우느냐 그대신 기증해라 라거나... 비판을 넘어선 모욕적인 언사도 많았다. 물론 그의 행동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자 저자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다시 명품과의 이별을 철회하고 친하게 지내볼까.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허망함을 느꼈을까 하고.

그 과정에서 광고라는 것의 속성을 접하게 된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알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을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이상적인 모델이니 이미지를 통해 상품을 구입했을 때 자신도 그들처럼, 또는 그 이미지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바로 광고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환상을 쫓아 소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소비는 행복의 그림자일뿐 행복 그 자체는 아니였다. 쫓아가면 다시 달아나고 또 쫓아가면 한발자국 멀어져가버린다.

그래서 저자는 명품 브랜드를 다 불태워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해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 또한 결코 만만치않다. 브랜드 없는 상품을 구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품을 사기 위해 벌어야 하고 벌기 위해선 일해야 하고, 그 스트레스는 명품으로 푸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보니 세상을 달라져 보였다. 덜 쓰고 덜 일하고 늘어난 시간은 가족과 보내거나 자기계발에 쓴다.

그런데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까. 소위 미래 산업의 하나인 디자인 시대를 거부하는듯한 인상을 풍기는 이 말은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디자인이라는 것 또한 인간의 필요인가 아니면 헛된 욕망인가. 그러나 책을 잘 읽어보면 이 질문은 다르게 바뀌어야 한다. 디자인 또한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소중한 것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에 브랜드가 붙으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바로 그 과정에서 허영이 깃들고 욕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영과 욕망이 자본주의를 힘차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영양분이 된다. 누구나 갖고 싶은 펜트하우스, 또는 보트에의 욕망말이다. 희귀하면 희귀할 수록 더욱 더 갖고 싶은 욕망이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

과연 우리는 그 욕망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날려버릴 수 있을까. 저자의 퍼포먼스가 부싯돌의 작은 불꽃이라도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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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 - 한 명품 중독자의 브랜드 결별기
닐 부어맨 지음, 최기철.윤성호 옮김 / 미래의창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자는 악마였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그래서 과감히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저자는 명품 중독증에 걸렸다. 어렸을 적 브랜드없는 신발과 옷 때문에 왕따 당한 경험이 그를 명품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프라다의 여주인공처럼 차츰 명품에 젖어든 것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날마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브랜드 로고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23쪽)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명품을 걸친다고 해서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은 한낱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은 물론 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적용하는 나의 가치 기준이 알맹이 없는 허망한 것들이라는 자각의 순간이 내게 닥쳐오고야 말았다....나는 누가 뭐래도 행복했어야 마땅하다... 이런 저런 친구도 많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직업도 있고, 유명 브랜드의 명품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허무함을 느낀다. 속았다는 생각이든다. 환상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41쪽)

그래서 그는 과감히 명품으로부터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어떻게. 마치 담배를 끊듯, 술을 끊듯 한번에 확실하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브랜드제품을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걸 왜 태우냐? 차라리 기증하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쇼맨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저자는 그래서 갈팡질팡한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하며 후회도 든다. 그러나 차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 속 제품을 사면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광고는 불안감이라는 것 때문에 먹혀들고 효과를 낸다... 광고는 자기들이 광고하는 그 물건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불안감을 조장한다.(44쪽) 

상품을 사람들의 정서나 느낌과 연결시키면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버네이즈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에 대해 파악하면 전혀 엉뚱한 물건을 갖고 싶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88쪽)

사람들이 브랜드 제품을 구입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하는 정서적 욕구 대신 해로운 정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브랜드는 사람들에게 탐욕, 대인기피증, 열등감, 질투심 등을 초래할 수 있다. (152쪽)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절정의 행복을 맛보기도 하지만 슬픔의 나락으로 추락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그 양극단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는 결국 일종의 만족감입니다. (173쪽)

그 만족감을 위해 사람들은 브랜드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 만족의 순간을 찰나에 그치고 만다. 보다 새로운 보다 좋은 것을 찾도록 만드는 광고들에 휩싸여 불안감만 커지게 될 뿐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구에 의해서 소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욕구라는 것은 감성적인 브랜드 광고에 의해 교묘히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10쪽)

소비문화는 오늘날의 대량소비사회에서 강조되는 소유가 곧 존재라는 강박관념과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의 사회문화적이고 경험적이며 상징적이고 이상화된 측면을 통해 가장 잘 조망해 볼 수 있다... 이상화된 이미지의 뉘앙스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은 결국 물질적인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중심주제에서의 변형에 불과할 것이다.(248쪽)

명품중독증은 현대사회의 소비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비문화란 곧 환경문제와도 직결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불필요한 소비를 용인하면서 각 가정 내 불필요한 등 끄기 운동을 통해 환경파괴 문제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은 정상이 아니다.(300쪽)

그러나 사람들의 이성이나 도덕, 윤리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감성적 측면에서 이미 마케터들에 의해 점령당한 소비자들은 그 행동을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비록 대중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우려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 우려는 그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에 대한 감정적 애착마저 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다는 말이다. (304쪽) 그 무언가로 인해 소비자들은 원가의 수십 배가 넘는 과도한 가격이 책정된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한다. 그것은 바로 브랜드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적 애착이다. (308쪽)

그래서 저자의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명품 브랜드의 화형식. 이것은 그냥 쇼가 아니다.

소비를 위해 노동하고, 노동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소비해야하는 끝없는 악순환은 불합리하다. 노동의 강도가 클수록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또 그만큼 더 노동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조건을 마르쿠제는 불행의 도취라고 불렀다.(315쪽)

마르쿠제에 있어 진정한 자유란 경제로부터의 자유, 일상의 생존경쟁으로부터의 자유, 그날그날의 생계유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불가능한 이유는 소비에 대한 감정적 의존 때문이다. (314쪽)

소비자로서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이 BMW나 벤츠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바람직한 소비 습관은 다름 아닌, 꼭 필요할 때만 소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박함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325쪽) 우리는 더 단순한 형태의 삶으로 하향 이동해야 한다. 소비를 줄이면 자연스레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도 감소할 것이다. 그렇게 획득된 시간적 여유를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우리가 복잡한 삶을 사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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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란 말 그대로 정의하자면 죽지않는 새다.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죽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어디있겠는가마는 사람은 이런 헛된 꿈을 꾼다. 불사에 대한 꿈은 사람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생명체에게로도 향한다.

석양의 붉은 빛에 물든 구름이 마치 불사조 같았다. 불사조라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저 이미지를 불사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구름은 정형적이지 않다.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변화시킨다. 고정되지 않은 것은 수만가지 고정된 것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름이 만들어낸 저 새는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영원하다는 느낌을 건넨다. 사라졌다가 또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이가. 그래서 불사라는 이름을 얻는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으려 집착한다. 어딘가에 꼭 영원히 머물것 처럼 행동하고, 그러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 그렇게 끝까지 지키려 한 그것은 그래서 영원히 나의 것이던가.

사진을 찍고 시간이 조금 흐르니 불사조는 어느새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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