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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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일본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한국적 상황과 다를듯 하면서도 묘하게 닮아 있는 구석이 있다. 거품경제가 막 터지기 직전의 풍요가 거품이 터지면서 어떻게 가족(사회가 아닌)을 변화시키고 몰락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과거 IMF시절은 물론 현재 거품을 이야기하는 한국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렇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상복합 또는 유명브랜드 건설회사의 아파트에서 한 가족 4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화자는 이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을 사건 이후부터 몇년 후까지 계속 인터뷰하면서 그 실상을 밝히려 한다. 이 과정에서 혈연으로 뭉쳐진 가족이란 것이 가족애가 아닌 억압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반대로 혈연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가족처럼 지낼 수도 있다는 신가족형태를 보여준다. 즉, 이 소설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실제 원서도 그럴진 모르겠지만 번역서에는 대상을 개인이 아닌 ㅇㅇㅇ가(家)로 표현하는 경우가 곳곳에 비친다.

나는 부모랑 사는 게 훨씬 더 힘들었어요.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부모한테 이러저리 끌려 다니고. 타인하고 살았다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만 지키면 되니까 오히려 간편하잖아요. 414쪽

애초에 가족이 싫어서 가출했는데 스나카와 씨들이 가족처럼 기대려고 하니까 화가 나고 두려웠던 거야. 이대로 스나카와 씨들한테 붙들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573쪽

이상한 일이다. 집안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 자립하고자 갈망하고 노력하는 것이 여자들일 터인데, 한편으로는 애오라지 혈연과 모자지간이라는 관계 속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여자들 뿐이다. 남자들은 ... 그저 도망치기만 할 뿐이다. 574쪽

야시로 유지에게 부모란 나를 지배하고 나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섬뜩한 괴물이었겠지요. 친부모뿐만 아니라 부모같은 자리에 있는 존재라면 다 그랬을 겁니다. 631쪽

가족이니 핏줄이니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번거롭고 신경이 쓰이는 것이야.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들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하지만 실패했잖아. 그래, 실패했지, 그 사람들은. 652쪽

이렇게 가족이 구성되면 가족과 가족간의 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 이 관계가 바로 사회의 모습일텐데 결국 소통의 부재와 배금주의에 물든 사회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로 말하면 알박기와 비슷한 종류의 버티기꾼이 나타나게 된 배경도 이것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웃이란 의지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서로 못본 체하고 사는 것이 딱 좋다고 봅니다. 126쪽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가족은 전에 이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습니다. 이웃이 무섭다는 것은 곧 세상이 무섭다는 것이고, 결국은 커뮤니티 자체가 무섭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이상할 것이 없지요. 129쪽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갑부들이고 세련되고 교양도 있고 옛날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상ㅅ강도 못할 생활을 하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쩌면 가짜인지도 몰라요...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거기에 다다르기까지는 얇은 껍데기 바로 밑에는 예존의 생활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연극이 아직은 한참 동안 계속되지 않을까요. 493쪽

저런 곳에 살면 사람이 못쓰게 돼요. 사람이 건물의 품격에 장단을 맞추려고 영 이상하게 돼버리는 거 같아요. 494쪽

나는 당신이 유방암에 걸리면 일본 최고의 명의한테 진료 받게 해줄 수 있다. 그런 연줄을 쥐고 있다. 그런 힘이 있는 인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것이 남자들이 좋아하는 동화 아닐까요. 262쪽

그런데 가족은 이렇게도 우울한 것일까.

여성들은 이런 부분에서 취향이 맞으면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도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들에게 가족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다. 441쪽

소설 속에 드러나는 가족이 모두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아끼고 도와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도 있다. 다만 그 형태는 꼭 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가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냐가 결국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과거라는 것을 야스타카는 깨달았다. 이 과거는 경력이나 생활 이력 같은 표층적인 것이 아니다. 피의 연결이다. 당신은 어디서 태어나 누구 손에 자랐는가. 누구와 함께 자랐는가. 그것이 과거이며, 그것이 인간을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만든다. 그래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잘라낸 인간은 거의 그림자나 다를 게 없다. 본체는 잘려버린 과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553쪽

그러기에 오히려 새로운 가족과 사회가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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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으면 어린얘와 같아진다고 하던가. 이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가 함께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애니메이션 <언덕 위의 포뇨>는 그의 작품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을듯하다. 물론 그가 창조해내는 캐릭터들의 귀여움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인어공주의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문명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보다는 따스한 가슴으로 보듬으려 한다. 그래서 깊은 슬픔이나 아픈 갈등은 무뎌지고 행복한 미소가 깊어진다.

그 행복한 미소는 오로지 사랑에 달렸다. 그런데 사랑을 할 때 그 대상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과연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일까.

꼬마 주인공 쇼스케는 포뇨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 사랑은 포뇨의 정체와 전혀 상관없다. 우리의 사랑은 타인의 정체와 상관없이 사랑이 가능한 것일까. 미야자키 감독은 그럴 수 있는 세상만이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번 애니메이션은 동화같은 이야기가 돼 버렸다. 그리고 사랑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린다.

정말 사랑은 그렇게 위대한 것인가.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대답은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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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뚜껑을 연다. 깻잎이 숨죽여 있다 몸을 부풀린다. 넘쳐날듯 꽉 담긴 이 깻잎 반찬은 고향집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싸 주신거다.

고향집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엔 으레 한바탕 실갱이가 벌어진다. 배낭에 하나라도 더 집어넣으시려는 어머니와 무겁다며 하나라도 덜어내려는 아들 간에 웃지못할 상황이 반복된다. 특히 김치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아들이 내려오기 전 몇일동안 몸이 아플 정도로 김치를 담그신다. 하지만 꼭꼭 눌러 담아주신 김치는 말썽을 일으키곤 한다. 한번은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까지 돌아가는 동안 김치국물이 새 옷이 다 젖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 풍기는 김치냄새는 어떻게 해볼 도리조차 없다. 민망합에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고속버스나 기차안에선 또 어떤가. 김치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또 신경을 써야만 한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를 설득시켜 택배라는 좋은 제도를 이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도 미안하기는 매 한가지. 택배를 배달하는 배달원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것이 다 사랑인 것을. 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실제론 온몸으로 감성으로 그닥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겨우 반찬통에 김치를 담아 냉장고에 집어 넣으면 1주일이 지나 김치국물이 새면서 냉장고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냉장고 공간도 부족하고 반찬통도 부족하니 꽉꽉 담다보면 벌어지는 일이다. 넘친 김칫국물을 화장지로 훔치고 행주로 닦아내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는다. 이 흔적은 결국 가끔 찾아오는 어머니의 손길로 사라진다.

깻잎을 한 장 들어 밥을 싸 먹었다. 이제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잔뜩 먹고 있음을 느낀다.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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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9-0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표현하긴요, 계속 냉장고에 시큼한 냄새 배게 하면서도 웃으며 맛있게 먹어주는거죠.

하루살이 2008-09-0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어머니 김치맛이 변하는 것에 어머니가 나이를 드신다는 것도 느낀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죠. ^^
 
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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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리프킨이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세상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의 생각으로는 더이상 드림에 걸맞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반대선상에 있는 동양적 사고가 해결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동양적 사고를 융합한 유러피언 드림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메리칸 드림이란 무한한 기회를 강조하며 물질적인 부를 쌓는 것을 성공이라 본다. 무한한 기회란 자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율이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영역 밖의 상황에 영향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를 축적해야 한다. 부는 독립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배타성을 띄며 이 배타성이 안전을 보장해준다. 이러한 현세의 행복은 인내와 자기개선, 자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내세의 구원추구라는 청교도적 근로 윤리와 맞물린다.

하지만 이런 아메리칸 드림의 장점이 점점 변질되면서 물질적 부를 운이나 뻔뻔스러움으로 추구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고 자기 이익추구라는 것도 단순히 부의 축적에서 쾌락과 심리적 생존으로 변화하게 됐다. 이것은 베이비붐세대 부모가 이미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젊은 세대들은 부에 대한 동기유발이 없어지고 대신 쾌락과 경험만에 사로잡혀 권태에 빠지게 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아메리칸 드림적 성격은 정부보다는 개인을 중시하게 됨으로써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해 비영리단체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게 된다. 또한 기회균등의 나라이지 결과 균등의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지금까지 생산성을 지녀 왔다. 단일 언어와 함께 값싼 노동력, 천연자원이 생산성과 효율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효율성에 대해선 유럽인들은 반대한다. 인간이 효율성만 따진다면 인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러피언 드림은 무엇인가.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는 환경보존과 지속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는 심오한 놀이를, 재산권보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행사보다는 다원적 협력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기본 생각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자유와 달리 유러피언의 자유는 어딘가 소속되어 있음으로 보장된다. 타인과 수많은 상호의존관계속에서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지리적 환경 차이에 기인한다. 성을 중심으로 성 안에서 오밀조밀하게 생활했던 유렵과 광활한 대지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이어야 했던 미국의 차이가 자유에 대한 개념에도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은 무료 교육기회를 제공한 후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한다. 반면 유럽은 적자생존 시장에서 사회가 균형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불운한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처럼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시장자본주의적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현재까지 발전을 이끌어온 아메리칸 드림이 유러피언 드림으로 바뀌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공감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투쟁과 경쟁의 진화론이 상호관계와 공생의 생태학으로 바뀌듯 개별화에서 통합으로 바뀌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감은 단순히 이타주의나 온정보다는 취약성(핵에 대한 위험성과 같은)에 대한 인식과 안전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어야 그 바탕이 튼튼해진다. 이런 공감은 연습과 활력이 필요하다. 의사소통의 궁극적 표현이 공감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찌보면 이런 공감의 확대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이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이런 공감능력을 더욱 키워줄 수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시장의 변화는 또 어떤가. 현재 아마존과 냅스터가 경제모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단초를 보여준다. 아마존에서는 실제 책이나 CD를 판매한다. 그러나 냅스터는 시간을 판매한다. 소비자를 음악 네트워크의 일부, 일원으로 만들어 콘텐트를 제공해 접근권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시장이 적대적 공공장소, 즉 싸게 사고 비싸게 팔아야 하는 곳인데 비해 새로운 네트워크는 다른 사람과 전체 이익을 최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된다. 구매자가 부담해야 했던 위험부담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내것도 네것이 되는 것, 즉 소유와 사용권을 공유하는 중에 이익을 창출한다. 하지만 이때 주권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한다.

세상의 이런 변화는 개인의 발전과 맞닿아 있다. 인간의 일생은 전체에서 자아를 분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아가 정체성을 주장하면서 어머니와 분리되고, 청소년기에는 가족과 분리되며 성인 초기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개인은 점차 넓어지는 사회적, 환경적 관계에 새롭게 동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즉 점점 강해지는 개인화 노력과 더욱 커지는 사회적 의무 사이에서 미묘하게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라는 개인은 성장을 하다 어느 수준에서 정체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강조하는 독립성에서 멈춰서 있는 것이다. 고전적 시장에 대한 반발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트워크로의 전환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 시장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도 든다. 독립의 장점만에 취해 있다보니 정녕 네트워크가 주는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공감의 능력을 점점 떨어지고 점차 누에고치처럼 안으로만 파고든다. 과연 '나'는 성장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독립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타인 또는 네트워크에 쏟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한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스스로 일어서 스스로 걸어가 손을 내밀어 상대의 손을 잡아보는 것 속에 유러피언 드림은 살아 숨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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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주제곡  창해일성소  滄海一聲笑

滄 海 一 聲 笑  푸른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滔 滔 兩 岸 潮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浮 沈 隨 浪 記 今 朝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滄 天 笑 紛 紛 世 上 滔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誰 負 誰 剩 出 天 知 曉  이긴자는 누구이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江 山 笑 煙 雨 遙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濤 浪 濤 盡 紅 塵 俗 事 知 多 少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않네
淸 風 笑 竟 惹 寂 寥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豪 情 還 잠 一 襟 晩 照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蒼 生 笑 不 再 寂 寥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豪 情 仍 在 癡 癡 笑 笑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하하하~!

영화 동방불패는 소오강호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때 흘러나왔던 창해일성소라는 주제곡은 동방불패에서도 계속된다. 영화의 분위기는 이 노래가 다 말해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화산파 영호충(이연걸 분)은 사부의 위선적인 모습에 실망하며 사제들과 함께 강호를 떠나고자 한다. 강호를 떠나기 전 회포를 풀고자 만나려 했던 일월신교 임아행의 딸 임영영
(관지림 분)과는 끝내 사랑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대신 비급인 규화보전을 익히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하게 된 동방불패(임청하 분)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원수가 되면서 서로 싸워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위 영화의 줄거리에서도 느껴지지만 허무주의적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동방불패는 영호충과 임아행의 대화 속에서 인간사회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이야기한다.

강호를 떠나고자 하는 영호충에게 임아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원한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원한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서로 싸우게 만든다. 그러니 강호란 바로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강호를 떠날 수 있겠는가.

전편이라 할 수 있는 소오강호에서는 반대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졌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면 영호충 자네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다 해도 지켜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칼을 버리려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에서는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들만 선발해 우주선에 태워 새로운 행성으로 떠난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난다. 우주선 안 사회를 구성하는 인물들 간에 사랑이 싹트면서 질투도 같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질투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 사랑이야말로 다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는 희망임을 넌지시 내비치며 끝을 맺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수많은 감정이 흘러간다. 그 감정은 격랑을 일으키며 성난 파도가 되고 폭풍우가 되기도 한다.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때론 그 폭풍우에 휘말려 거스르지 못하고 온몸을 내맡겨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은 때론 비극이 되고 때론 희극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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