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파 파월은 우사인 볼트가 올해 세계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세계기록 보유자였다. 2005년 9.77초로 세계기록을 작성한 후 2007년 9.74초로 다시 경신했다.

파월은 190센티미터의 키에 88키로그램의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다. 보통 100m는 긴 보폭 또는 빠른 주법 중의 하나를 가지고 속도를 올린다. 그래서 대부분 큰 키를 가진 선수들은 긴 보폭을 이용하는 주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파월은 키가 크면서도 긴 보폭과 함께 빠른 보폭까지 사용함으로써 세계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파월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138개의 자기공명영상촬영을 통해 파월의 근육을 분석했다. 배 속의 근육이 다른 선수들의 두 배에 가깝기 때문에 출발때 굉장한 스피드를 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를 다 찍고 나서 볼트가 세계 기록을 다시 세웠다. 그는 파월보다 키가 6센티미터나 더 크다. 아마 다큐멘터리를 찍고 나서 제작진은 파월을 다시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고심했을듯 하다)

그런데 파월의 경기 장면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100m 달리기는 단순히 기록경기이기만 한 것일까.

파월은 “세계 기록 보유자라는 건 늘 이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며 1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세계기록을 달성한 대회는 가이나 볼트와 같은 막강한 경쟁자가 참여하지 않은 경기였다. 반면 자신과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선수와 같이 뛸 때는 기록이 저조했다. 이것은 파월이 이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과 같은 위치에 또는 한발이라도 앞선 선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심리적으로 무너져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긴 보폭과 빠른 주법이 통합되지 못하고 보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100m 경주라는 것이 기록경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 양궁 개인전은 7연패를 달성하지 못했다. 박성현조차도 결승에서 8점을 연거푸 두번 쏠만큼 아무래도 평상심을 무너뜨리는 강박관념도 패인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 정상이라는 굴레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시위를 당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육상 100m로 돌아와서 16일 밤 치러지는 베이징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의 재미있는 관전포인트로는 파월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9.7초대의 사나이 세 명이 격돌하는 이번 대회에서 과연 신체적 탁월함을 바탕으로 경주에 나서는 파월이 이번엔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고 평상심으로 달릴 수 있을까. 아니면 100m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세계 기록을 달성한 볼트가 앞설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주법을 구사하는 가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까. 숨막히는 10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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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보급판 문고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인 디지로그. 결국 디지털의 첨단정보문화와 아날로그의 감성이 합쳐져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디지로그 문화엔 한국인의 문화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을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젓가락, 나물, 비빔밥 등의 식문화를 통해 디지로그적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국가시대가 사라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과연 우리의 우수성이란 것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어느 정도나 될련지 의문이 든다. 또한 세계화 추세 속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과연 이런 전통적인 식문화 정신이 통할 수 있을까도 의심이다. 비빔밥 문화를 말하지만 젊은이들은 피자에 더 익숙한 세대이며 젓가락 보다는 포크 쓰는 것을 더 즐겨하기 때문이다.

어쨋든 저자 이어령씨가 말하는 디지털의 미래를 한번 살펴보자.

정보의 최종 가치는 정보 자체의 품질보다는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판이 난다. 물질로 된 제품은 품질로 승부를 한다면, 정보 통신은 믿음으로 승패가 결정난다. 옳은 정보를 믿지 않아 낭패를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정보를 믿어서 파멸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58쪽)

살린스는 인간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증대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산성을 계속 향상시키는 것과 반대로 욕구 자체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수렵=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는 윤택한 삶과 번영을 객관적인 물질의 풍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무욕무결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근면과 생산성은 오히려 제한된 숲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나쁜 행위로 보인다.(98쪽)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적인 선형적 사고에서 모순되는 두 개의 이것과 저것을 모두 포용하는 순환적 사고로 가는 것이다. 모순을 잘라내기는 쉬워도 그것을 융합하고 조화시키는 작업은 참으로 힘이 든다.(153쪽)

에디슨의 좌절을 통해 우리는 지식정보사회에서 고부가가치를 유발할 수 있는 산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 콘텐츠, 픽션, 디자인 파워가 결합된 미디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그러나 에디슨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은 다니엘 벨이 말하고 있듯이 기계기술이 이제는 지적 기술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197쪽)

그런데 책은 디지로그적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성공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보 통신의 혜택 중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공유에 있다고 책은 말한다. 리눅스처럼 누구나 평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정보를 나눈다는 점이 최대 강점이다. 그런데 이 속에서 고부가가치를 얻어 이를 이용해 경제적 부를 취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책은 이러한 경제적 행위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니 책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이런 문제 또한 저자가 말한대로 양자택일적 선택이 아니라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 길은 가능할까.

사족 : 일단 공유가 됐든 부유함을 얻는 것이 됐든 감수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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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NHK에서 찍은 다큐멘터리를 EBS 다큐10으로 방송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라는 편에서는 펠프스가 어떻게 세계기록제조기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3일간 특수장비 카메라를 이용해 그의 수영 훈련모습을 찍은 이 다큐는 그야말로 펠프스를 좋아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다큐를 보고나면 펠프스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구슬땀을 남보다 많이 흘릴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 땀방울은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나라 선수들도 그만큼의 땀을 흘린다. 다만 누가 더 집중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하느냐, 그리고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이 차이는 요즘 어디에서나 중요하게 여기는 창의적 방법을 말한다. 우리의 양궁선수들 훈련처럼 말이다.

펠프스의 창의적 훈련법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잠영과 돌핀킥에 있다. 남들보다 두 배 정도 물 속에서 마치 돌고래처럼 두다리를 함께 휘젓는 그의 영법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 발길이 350미리, 팔길이 2미터 5센티, 과 함께 단내나는 훈련 덕분이기도 하다.

허리에 8키로그램의 쇠뭉치를 차고 수직으로 서서 오로지 다리로만 물 위에 뜨는 훈련은 극도의 체력을 요구한다. 50초 물 위에 떴다 10초 쉬웠다를 10회 이상 반복한다. 똑같은 훈련을 일본의 자유형 최고 선수에게 시켜봤더니 겨우 20여초를 견뎌냈을 뿐이다. 또한 턴 후의 반발력을 키우기 위해 물 속에서 박차면서 돌핀 킥으로 치고 오르는 훈련도 사흘에 한번씩 진행된다. 너무나 힘든 훈련이기 때문에 매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펠프스는 이번 올림픽 전까지 5년간 단 하루도 쉬지않고 하루 6시간씩 16키로미터를 헤엄쳤다.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서는 8000cc에 달하는 폐활량에도 고지에서 훈련을 했다. 휴일은 1주일에 단 하루.

사람들은 펠프스를 괴물이라 부르고 천재라 부르면서 그의 이런 훈련모습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일본 스태프가 그에게 물었다.

매일 이렇게 훈련합니까?

네. 그렇죠.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에요. 지금도 끝날 때가 된듯해 시계를 보고 있잖아요. 빨리 물에서 나가고 싶어요.

그래도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의 올림픽 8관왕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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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의 진짜 주인공은 배트맨일까, 조커일까. 이번 영화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수작이다. 여기에 검사 하비 덴트까지 가세하면 도저히 흠잡을 데가 없다.

영화의 줄거리를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간단하다. 악당이 넘치는 고담시. 모두가 썩어빠져 있지만, 배트맨이 도시를 지켜내고 있다. 여기에 청렴결백한 검사 덴트는 떠오르는 영웅이다. 그러나 악당들을 규합해 새로운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조커는 도시의 혼돈을 조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린 덴트는 너무나 순백하기에 쉽게 검게 물들고 만다.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덴트와 덴트를 영웅으로 남게 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악당의 이미지까지도 받아들이는 배트맨, 세상이 악으로 물들 것이라 믿는 조커의 삼각구도가 영화를 이끌고 있다.  

영화의 재미는 화려한 액션에도 찾을 수 있고, 배트맨이 갖추고 있는 신무기의 성능이 주는 게임과 같은 아이템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선택의 순간순간들이 주는 갈등 구조에서도 맛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 주인공의 캐릭터가 최대 흥미거리다.

명확한 선과 악의 구조라면 재미없다고 느껴질법 하다. 할리우드의 캐릭터는 이런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엔 영웅도 인간적 괴로움을 겪는다는 정도로 겨우 한걸음 내디뎠을 정도다.

배트맨의 캐릭터도 이정도 발걸음일지 모른다. 선을 대변하지만,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진 못한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과감히 강하게 만들어간다. 비난마저도 스스로 감수할 정도로 진짜 강한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비 덴트는 조커에 의해 악에 물들어가는 캐릭터로 나온다. 너무나 깨끗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극에 쉽게 검게 물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한 정의감이 법을 뛰어넘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게 만들어 살인마저도 서슴지 않게 된다.

덴트의 캐릭터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행운의 동전이다. 행운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믿는 그는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인 동전으로 스스로의 뜻을 타인에게 이해시킨다. 그러나 사고를 당하고 나서 한면이 그을러 버린 동전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이해가 필요없이 강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사고로 이미 그의 마음도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덴트가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캐릭터일 수 있다.

반면 오히려 일반인들은 영화 속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여객선 두 대의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 인간의 이기적 마음을 시험하는 이 장면에서 차마 믿기지 않은 선택이 이뤄진다. 이 부분은 너무 영화같은 설정이어서 오히려 설득력을 잃는다.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이겠지만, 왠지 영화의 우울한 측면이 망가져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워낙 강렬한 조커 덕분에 이 희망마저도 왠지 불안해보인다는 점에서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조커는 그야말로 최고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영웅이란 악당을 필요로 한다. 배트맨이 있다면 당연히 조커도 있어야 한다. 배트맨의 정의감은 절대 조커를 죽일 수 없다. 조커 또한 배트맨이 있어 행복할 정도다. 그러기에 조커의 악은 절대 힘을 잃지 않는다. 그의 악은 악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닌 순수한 악의이기 때문에 패배란 없다. 그에게는 혼돈만이 유일한 낙이다. 인생의 재미를 그곳에서 찾기에 그는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 속에 가두려는 사람의 힘이 강하면 강할 수록 살아갈 맛이 난다. 그 적수가 자신을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정돈된 것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욕망의 화신 조커. 조커를 만든 것은 결국 배트맨이었다.

수레가 양바퀴로 가듯 배트맨과 조커는 세상의 양 바퀴다. 영화는 암울한 듯 하면서도 희망의 빛을 놓지 않고 절묘하게 세상의 수레를 이끌고 있다.

이 막강한 캐릭터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가 죽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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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씨의 아주대 강좌를 동영상으로 봤다. 시골의사는 강의를 통해 1%의 세상을 이끄는 사람이 되자고 말한다. 즉 0.1%의 창의적 인간과 그 창의적 인간을 간파하고 그것과 동조할 수 있는 0.9%의 사람 안에 들자는 것이다. 나머지 99%는 그야말로 시대에 흐름에 뒤늦게 몸을 맡기는 잉여인간이기 때문에.

즉 세상은 누군가의 창의적 아이디어에 의해 급격한 변화를 겪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움직여가기에,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기 보다는 세상을 주도하며 살아가자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것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지극한 긍정이라고 보여진다. 세상의 공진화를 믿는다는 그의 말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일단 그의 말에 공감한다. 격랑과 같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 흐름의 물줄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져간다면 최상의 것일게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더 99%의 사람들을 잉여인간으로 만든다는데 있다. 잉여인간을 잉여인간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 그 길은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골의사가 1%안에 들기 위해 항상 찾아 헤매야 하는 'w'(창의적 0.1%)가 무수히 나타나야만 가능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w를 대량생산?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노자의 소국과민과 같은 삶의 형태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행태가 엘리트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할진대 과연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러기에 현실적으론 시골의사의 1% 인간되기에 개인 스스로가 나서야 할듯 보이지만, 한편으론 1%가 퍼져 2, 3, 10, 20... 이 되는 사회도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창의적 인간이 된다면 세상은 혼돈에 휩싸여 아수라장이 될지도 모른다. 과연 삶의 행보를 어디에 맞추어야 할 것인지 고민해보게 만드는 강의였다.

사족-만약 1%의 사회가 아닌 모두가 창의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천재적인 w가 아닐까. 자신이 w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w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데는 적극 찬성이다. 그러나 때론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으니 99%의 잉여인간인들 어떠랴는 생각도 갖게 된다. 아마 그래서 세상은 움직일지도 모른다. 자발적 잉여인간과 비자발적 잉여인간들을 거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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