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매트릭스 세상으로 돌아가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망각할 수 있는 파란 알약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짜 현실을 알게 되는 빨간 알약 중 하나를 집어먹어야 할 때,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다.

이 책 <키치..>도 빨간 알약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책이다.

키치란 병적 행복을 보장하는 것(148쪽)이라면서 건강하고 정상적인 불행을 선택하라고 말하기 떄문이다. 피곤에 치쳤으니 이제 쉬고 싶은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예술이 바로 키치라는 것이다. 감상이 용이하고 그 향수가 편안해야 하며(37쪽) 마땅히 목가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기만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비천해야 한다. 존재의 고달큼과 진실을 은폐해주기만 하면 된다.(37쪽)

아치 이것은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배신하는 싸이퍼를 떠올리게 만든다. 현실에서 접하는 그 맛없는 음식 대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기를, 또는 달콤한 커피향을 느낄 수 있는 쪽을 선택한 싸이퍼를 우리는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거짓된 것일지라도 그것이 주는 행복감을 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마치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또는 초등학교의 도덕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왜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했을까.

키치는 우리에게 이차적 눈물 또는 이차적 정서를 심어준다. 즉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이 조성하는 어떤 다른 표상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을 키치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3쪽)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감상이나 행복에 젖을 때 음악 그 자체의 미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회상-예를 들면 첫사랑의 오솔길이나 이제는 사라진 젊은 시절 등-때문일 경우 우리는 키치적 정서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키치는 작품 그 자체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삶 본연의 의미보다는 자기 자신의 허구적 모습에 현혹되어 살아갈 경우 우리는 속물로 전락하면 동시에 키치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13쪽)

즉 외로움을 노래한 곡을 듣고 외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직접적 슬픔보다는 영화가 주는 이미지로 인해 슬퍼하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키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키치는 만들어졌고 우리의 주위에서 맴도는 걸까.

그것은 인생의 부조리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실존주의적 전제를 바탕으로 쓰여져 있으니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한 책장을 넘기며 동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와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사이의 부조리에서 그 허무함을 키치가 메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메꾸는 한 키치는 언제나 사랑받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아표현의 도구로서 작동했던 노동이 자아실현은 커녕 되풀이되는 작업으로 인해 무미건조함만 가져다주고 대신 노동의 댓가로 임금이 지급되면서 그것을 통한 소비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것이 나일 수 있는 이유가 나의 본연의 행동이 아니라 내가 소비하는 것이 되어버리듯, 문화라는 것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세상을 의미있다고 외치며 우리를 위로하는 키치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섣불리 감정이입하지 않고, 섣불리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잘게잘게 쪼개진 현실의 파편들을 이어붙이며, 문화와 나 사이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의미찾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일까.

아, 그렇다면 정녕 빨간 알약을 선택한 일이 다행스러운 일일까. 네오처럼 슈퍼맨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지니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자는 정말 태어난 순간부터 선택되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되어졌음을 깨달은 순간 진정 선택되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능력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키워가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끝에선 매트릭스와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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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4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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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에 대해 정의한다는 것은 경계를 짓고 한정짓는 작업이다. 이런 정의가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방편때문인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경계지어진 그 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를 뛰어넘으려 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예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이외의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은 얼마나 많이 그 의미를 확장해왔는가.

어쨋든 이 책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술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얽매이지 않은채 관심을 쏟으며, 이런 과정에서 나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가 확장되고, 공감하는 범위를 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확장은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천재란 쉼없이 움직이는 또는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듯 말이다. 천재에 대한 찬탄은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술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애정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한번 알아보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는 사랑을 매우 흥미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상대방이 방출하는 모든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든 얼굴을 감싸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 피곤한가, 일이 잘 안 됐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등등 사랑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가 우리의 해석 의지를 마구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문헌학자들처럼 사랑하는 이의 몸짓 하나, 말 한마디도 심혈을 기울여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예술이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는 세상이 뿜어내는 기호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 예술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건강한 예술은 그러한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만큼 많다. 삶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134쪽)

그렇다면 삶을 또는 예술을 행하는 나는 누구일까.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만큼이 자신의 세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공명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밭을 가는 말은 광야를 달리는 말보다는 밭을 가는 소에 가깝고, 들판을 달리는 소는 밭을 가는 소보다는 광야를 달리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럴진대 소나 말이라는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건,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무덤덤한지, 또 무엇을 만나면 기쁘고 무엇을 만나면 슬픈지, 어떤 일을 하면 능력이 커지고 어떤 일을 하면 작아지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지를 아는 일이다. 거미처럼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미세한 떨림들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일이다. (208쪽)

결국 살아가는 것도 예술이라는 것도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들에게 다가가, 한없는 애정을 쏟아가며 그 움직임을 타인과 공유, 공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이런 공감능력의 확대를 통해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을 지속가능하게 내 손에 닿을 수 있는 무엇인가로 바꿔놓는 일일테다. 그러므로 먼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을 알아채기 위한 마음의 문을 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테니.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은 삶이 바로 깨달음의 세상은 아닐까 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아니면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 도저히 흔들리지 않은 그 흔들리지 않음일까. 예술인이 광인으로 또는 현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이것의 차이는 아닐련지... 이 책과 전혀 상관없는 질문까지 떠올리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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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4
채운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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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천재 예찬이란 게으른 자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거나 감추기 위해 지어낸 픽션인 셈이다. (25쪽)

천재라고 불리는 자들은 예찬되어야 할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성을 사유하게 하는 자들이고, 어떤 목적을 향해 달리는 자들이 아니라 과정을 즐기는 자들이며, 타고난 자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자들이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인간의 능력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대한 태도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대신, 바로 그 무능력 때문에 능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할 줄 아는 용기. 한 번 해서 안 되는 일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해서라도 되게 하려는 끈기. 정말 커다란 능력은 바로 이런 용기와 끈기가 아닐까.(33쪽)

깨달음을 이러저러한 것으로 규정되는 순간 경계가 생기고, 경계를 갖는 순간 경계를 벗어나는 것들을 배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컨대, 인간을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이라고 규정하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인간이나 인간보다 더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이보그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무언가를 실체로서 사고한다는 것은, 이처럼 사고의 경계를 만드는 명사적이고 점적인 사유다. 그게 바로 선승이 깨달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대답 대신 몽둥이로 화답했던 이유다. 깨달음이 뭔지 알고 싶으면 그저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할 뿐, 깨달음을 얻는 비밀 같은게 따로 있을리 없다는 것. (68쪽)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건 많은 경우 습관에 따른 것이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된 미적 기준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하다보니, 익숙하고 습관적인 감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익숙하지 않으므로 아름답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으므로 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충격적인게 아닐까. 예술의 반대는 비예술이 아니고,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상식 자체를 의심하는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넘어 작품 속에서 각자가 질문을 구성하는 것이다.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시각으로 질문하기. 즐거운 예술은 질물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의삼하라, 거침없이.(103쪽)

예술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건 누굴 속이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106쪽)

인물에 대한 시각이든 공간에 대한 시각이든 역사에 대한 시각이든 하나의 절대적 시각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 역시 하나가 아니다. 내가 보는 세계와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의 다름과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자. 그러면 다른 세계로의 넘나듦이 가능해질 테고, 진실은 그런 넘나듦의 과정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지 법칙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113쪽)

대상의 외형을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힘을 포착하는 것. .... 11월의 나무나 2월의 나무나 겉으로 보기엔 같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채 앙상한 가지만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11월의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인 반면, 2월의 나무는 봄을 준비하는 나무다. 즉, 11월의 나무는 몸을 바짝 움츠리고 겨울을 견뎌야 하지만 2월의 나무는 기지개를 켜고 봄을 호흡해야 하는 것. 예술은 그 차이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122쪽) 

위대한 배우와 삼류 배우의 차이는 이 세계와 얼마나 더 공감하느냐에 달린 것. 예술적 능력이란 더 많은 것들과 공감하고 변신할 수 있는 능력 외에 무엇이랴. 그러므로 언제든 만남을 준비하고, 변신 태세를 갖출 것.(127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는 사랑을 매우 흥미롭게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란 상대방이 방출하는 모든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든 얼굴을 감싸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저 삶이 피곤한가, 일이 잘 안 됐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등등 사랑하는 사람의 몸짓 하나가 우리의 해석 의지를 마구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문헌학자들처럼 사랑하는 이의 몸짓 하나, 말 한마디도 심혈을 기울여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예술이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과 사랑에 빠진 예술가는 세상이 뿜어내는 기호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한다. 예술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라 자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과 사랑에 빠지기. 건강한 예술은 그러헥 삶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만큼 많다. 삶과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눈부신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134쪽)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다. 무엇을. 살아 있음을..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면, 또 슬픔과 분노를 준다면, 그건 우리가 이러저러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141쪽)

구경은 보는 것을 대상화하는 행위다. 친한 친구가 겪는 기쁨이나 아픔을 구경하지 않듯이, 코끼리의 생태를 알고 코끼리와 친구가 된 사람이라면 코끼리를 구경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거다. ...때문에 자연이든 동물이든 누군가의 삶이든, 무언가를 구경하는 입장에 선다는 건 아주 시시한 일이다. 구경당하는 입장에선 아주 불쾌하고 끔찍한 일일테고.

행동하는 자들만이 질문한다. 행동할 때만 장애물을 만나고, 장애물을 넘으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질문이 샘솟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많은 것도 그들이 쉼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예술 전체를 물음표로 만드는 의심이고 질문이며, 제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일종의 분열증이다. 즐겁고 건강한 분열증.(169쪽)

관습과 명령에 무기력하게 길들여진 나약한 신체가 아니라 다른 이의 욕망과 접속하면서 나날이 건강해지는 신체,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대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변모시키고 확장하는 신체. 그런 신체는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끊임없이 발산하고, 끊임없이 달리기 때문이다. 또 그런 신체는 고립되어 있는 법이 없다. 두리번거리고 달리면서 친구들을 만들기 떄문이다. (187쪽)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만큼이 자신의 세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공명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밭을 가는 말은 광야를 달리는 말보다는 밭을 가는 소에 가깝고, 들판을 달리는 소는 밭을 가는 소보다는 광야를 달리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럴진대 소나 말이라는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건,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무덤덤한지, 또 무엇을 만나면 기쁘고 무엇을 만나면 슬픈지, 어떤 일을 하면 능력이 커지고 어떤 일을 하면 작아지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지를 아는 일이다. 거미처럼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미세한 떨림들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일이다. (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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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습관입니다.
가슴 속에 정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불행도 습관입니다.
불행을 습관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피해의식과 이기심과 자만심을 갖게 됩니다.

정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경박스러워 집니다.
여러분들은 정성이라는 좋은 친구를
항상 가슴 속에 품고 다니길 바랍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대상이 다 하나님이고
모든 대상이 다 부처님이고
모든 대상이 전부 참나인 것입니다.

하늘이 제일 사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정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지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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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조절장치라는 게 있다. 에어콘의 작동이라든가, 다리미의 열 조절 등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자동조절장치 덕분이다. 인간의 감정도 이런 자동조절장치가 작동한다고 한다. 희노애락의 급격한 변화가 주는 감동의 물결은 평균 2년 정도면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애인을 잃은 슬픔도, 아이를 얻은 기쁨도 기껏해야 2년이라는 의미도 된다. (직장을 잃는 것이 가장 강도가 세서 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더스틴이라는 청년이 화제다. 어렸을 적 병으로 팔다리를 모두 잃었다. 그래서 토르소맨으로 불리운다. 그런데 이 청년이 레슬링을 한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주대표를 뽑는 대회에서 3위에 입상, 꿈에 그리던 대표가 됐다. 팔다리가 없는 몸뚱아리만으로도 레슬링이 가능하다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일반인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실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더스틴보다도 더스틴과 경기를 했던 상대선수들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더스틴과의 경기에서 지고 난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더 안타까워보인 것이 무엇때문이었을까. 그들은 혹시 다른 패배보다도 더욱 큰 쓰라림을 맛본 것은 아니었을까)

더스틴이 이정도 성과를 올리기까지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그를 가르치는 코치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더스틴을 생활하도록 해주고, 트레이닝 코치, 그리고 여자친구,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부모의 도움으로 그는 밝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그가 팔다리를 잃은 후 절망에서 빠져나오는데 큰 힘이 됐다. 팔다리가 없다고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더스틴이 레슬링을 시작하면서 코치는 다른 선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더스틴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우리 팀 내에서 베스트 3안에 들 것이라고. 이렇게 확신했던 이유는 더스틴의 땀방울 때문이었다. 코치는 더스틴이 연습한 후에 매트는 마치 작은 호수를 떠올린다고 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어려움에 부닥치면 쉽게 좌절한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스스로를 체념의 감옥 속에 가둔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극한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기복마저도 우리의 몸은 자동조절장치로 제어한다. 체념이 더이상 길어지지 않도록 우리 몸은 스스로 힘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다면 말이다.

더스틴은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더스틴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스틴이 누리는 행복은 가능할 수 있다. 마음 속에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주위에 사람들이 그 희망의 불꽃을 함께 지켜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때론 그 희망이 족쇄가 되어 그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희망은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게 운명이고 숙명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동조절장치를 믿어보자. 그리고 수많은 땀방울의 힘도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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