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이야기 - 꿈을 낚는 어부
토마스 바샵 지음, 김인순 옮김, 고도원 연출 / 한국경제신문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자기계발서다. 책의 장르 속에 이미 책의 주제가 녹아 있다. 자기를 계발하라는 것. 이것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반면 명상서적은 자기 계발과 혼동할 수 있는 자기를 찾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자기를 찾는 과정이 계발서에서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명상서적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하고 있는 방향이 달라지고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게 된다.

자기계발서는 아무리 험난한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안주하지 말며,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또 그렇게 나아가 꿈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반면 명상서는 아무리 험난한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게의치않고, 나 자신에게 침잠함으로써 참나를 찾으라고 한다. 꿈이나 목표라는 욕망마저도 벗어던지라고 요구한다. 그 속에서 평화를 찾고 평온함 속에서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라고 본다.

삶의 행로는 이 두가지 사이에서의 갈팡질팡일 것이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일 수도 있지만, 어정쩡함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계발도 명상도 하지 못하고 현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이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계발도 명상도 실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익숙함의 공간을 저버려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이 책 파블로 이야기는 익숙한 공간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도록 용기를 주는 책이다. 그런 목표와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읽고서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 용기는 잠깐의 '앗싸' 정도일 뿐 삶을 뿌리 채 흔들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동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행복은 변덕스러운 거야. 헛된 것을 좇으려다가는 코만 깨지고말아.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고 사는게 진짜 행복이란 말이다.(25쪽)라는 파블로의 부모님 말씀이 소시민적 행복을 대변해주고 있는듯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소시민적 행복조차도 쉽게 얻지 못한다.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서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45쪽)라는 파블로의 불만은 88만원 세대들에겐 행복에 겨운 투덜거림으로도 들릴 수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수록 그만큼 친밀함의 그물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왔다. 아프더라도.(74쪽)라고 말하지만 실은 아프다는 것 자체보다는 아플 것이라는 공포 자체가 우리를 현실에 머물도록 만든다. 이 자리의 현실도 너무 힘겹게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얘야, 네가 무엇을 위해서 참아야 하는지 아는 경우에는, 거의 모든 것을 견디어낼 수 있단다.(108쪽)라는 이 한마디 말이 실제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구라고 보여진다. 즐겁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주는 즐거움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참뜻을 알 것이다.

그러니 현실의 벽에 서서 기대고 그 안에 갇혀사는 것이 괴롭다고 느껴진다면, 한번쯤 꿈을 꾸어 볼 일이다. 또한 현실이 무료하게 느껴진다면 사다리를 만들어볼 일이다. 괴로움 조차도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일 수 있는, 또는 기꺼이 그 괴로움을 겪고자 할 수 있는 일이 그대에게 있다면...

그래서 이 책은 자기계발서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한다. 그러나 독자는 먼저 꿈이 있는지부터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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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콕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시대의 수퍼영웅이라 불리우는 존재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말하는 영화는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을 가져온다. 물론 핸콕이 표현하고 있는 영웅상이 기존의 영웅상과 다르다는 점에서 일단 눈길을 끌지만, 영화의 흐름이 캐릭터 중심에서 갑자기 테마 특히 사랑이라는 테마로 흐른다는 점이 어떤 점에서는 거슬리기도 하면서 반대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먹히는 소재이니까.

아무튼 핸콕이 주는 첫번째 놀라움은 이 시대가 이미지의 시대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술 주정뱅이에 말썽만 일으키는 영웅, 차라리 이 도시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을 것 같은 영웅이 어떻게 재탄생되는지 영화는 보여준다. 그것은 순전히 이미지 메이커에 의해서다.

핸콕과 함께 조연급으로 활약하는 남자배우의 극중 직업은 홍보대행이다. 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선 사랑의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한다며 따듯한 심장을 뜻하는 하트로고를 들고서 CEO들을 설득하려 하는 이 남자는 결국 핸콕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한몫 한다. 실제 그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거지보다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영화는 일깨워준다.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착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핸콕은 물론 심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에 다행이긴 하지만 어쨋든 이미지에 의해 사람들의 미움을 받다가 환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기업들은 어떻게든 이 이미지를 이용하고자 한다. 

두번째로 핸콕은 외로움을 말한다. 핸콕이 이렇게 삐뚤어진 것은 그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과거를 잊어버린 핸콕에게 자신의 과거와 인연을 맺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자포자기에 가까운 삶을 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외로움은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세번째로 핸콕은 고슴도치 사랑을 말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연인관계라면 사랑을 위해 상처를 줄 것인지, 아니면 사랑을 위해 이별할 것인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 자체는 잔인하다. 그 잔인함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운명을 거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화 속에서 그럴 가능성은 좀처럼 없다. 그러면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는... 그것이 어떤 선택이 되었든 그리고 그 결과의 희비를 떠나서 과정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소위 어른이 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때론 그 운명 자체를 거부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핸콕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전형적인 영웅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전형적인 멜로라인을 그리고 있다. 전형성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럼에도 킬링타임용으론 아주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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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블리치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블리치 2기가 끝났다. 블리치 2기는 소울 서사이어티와 현세에서 사신의 역할을 맡았던 이치고를 중심으로 바운트라는 인간도 신도 아닌 종족의 탄생과 복수를 다루고 있다.

재패니메이션의 일반적인 특징인 대결구도를 통한 성장의 모습은 이치고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개인을 넘어선 끈끈한 동료애 또는 가족애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덤이자 주제가 된다. 이런 전형적인 구도에도 불구하고 109편에 달하는 블리치를 지켜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바운트는 인간으로부터 악마라 불리며 소외를 받는다. 이들은 소울 서사이어티의 실패한 과학실험 때문에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소수자로서의 핍박받는 삶을 계속 영위해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또는 소울 서사이어티와 인간에 대해 복수를 꾀할 것인지...

이치고는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치고 또한 일반 인간과 다른 소수자다. 그래서 그는 바운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길은 다르다. 어떻게든 화해하고 함께 가려 한다.

블리치2의 전체적인 구도는 소수자의 길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핵심은 이치고의 성장에 있다. 아이가 기어가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걷는 것을 보는 것의 기쁨, 말을 배우는 것의 신기함. 성장은 이런 기쁨과 환희를 가져다 준다. 그래서 대부분 성장을 말하는 작품은 흥미진진하다. 이치고는 영혼을 내걸고 성장한다. 또 목숨을 내걸고 성장한다. 성장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성장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다. 보다 똑똑해지고, 보다 강해지고, 보다 지혜롭고... 그러나 그 성장의 과정은 생략해버리고 싶다. 그러나 블리치2는 성장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치고를 응원하고 그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꿈틀대는 그 무엇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생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만화는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장이라는 것이 결코 달콤한 열매만을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성장을 통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늘어나는 것이지만, 결코 성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피터팬의 욕망과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 그 가운데서 우리는 흔들린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치고가 사랑스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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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세계를 탐구한다 - 물질과 생명을 잇는 물리학의 세계
다치바나 다카시.요네자와 후미코 지음, 배우철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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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양이 빌딩의 주인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일본의 대표적 물리학자인 요네자와 후미코의 대담을 글로 엮은 책이다.

물리학에서 물질을 거쳐 생명현상으로 이어지는 그 연결고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한다면 그 조그마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네자와는 아몰퍼스로 유명한 학자로, 아몰퍼스는 물질 내의 원자의 배열방식에 주기성이 없는 고체를 총칭한다. 나처럼 인문계열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은 이 말조차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용어들이 조금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특히 생명이 지구상에 탄생한 것은 요동 때문이었다고들 하지요. 전체로서는 자유에너지가 최소가 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국소적으로는 요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99쪽) 

라는 대목은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또한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넓혀준다. 현재의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바로 우리 사회가 살아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실감케하기도 한다. 자유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공권력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촛불시위라는 요동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전인수격 해석을 해본다.

반면 이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또한 랜덤한 세계 속에서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물성물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에너지 최저 혹은 부분적인 에너지 극소의 상태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해도 됩니까... 다만 그 주장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할 수 있을지, 생물에 대해서도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듯해요.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까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왔고 아마 그런 생각은 당분간 하나의 지침으로서 유지될 테지요.(135쪽)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것. 그것마저도 우린 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요동이야말로 참 생명의 탄생을 알린다. 그러나 섣불리 모든 것을 단정지으려 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물리는 흑백을 확실히 가리는 것이었어요. 모두들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흑도 백도 아니라는 답이 나오면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개념적으로 적잖이 당황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해요. ...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은 결코 전체로서 최적화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을 최적화하면 다른 부분은 최적화되지 않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최적화된 상태에 있을 턱이 없지요. 그렇지만 전체로서 가장 나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록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모든 부분의 최적이고 나아가 전체로서도 최적인 답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답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까 단백질 이야기에서도, 전체로서 최적인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발생 당시의 조건 가운데 최적일지도 모르는 것을 찾는 거지요.(132~134쪽)

2008년 6월이 다가는 이날, 대한민국의 최적인 상태는 무엇일까. 그들만의 최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촛불을 킨 것은 아닐까.

사족: 세상도 사물도 한가지 목적 또는 방향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칼이 수술도구나 요리도구로도 쓰이지만 강도의 도구로도 쓰이듯. 그 양면성의 길에서 최적의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생명으로서의 사명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 사명에의 길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언제나 동전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에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동전의 양면을 잘 알고 선택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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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세상을 보는 글들 14
레이첼 카슨 지음, 표정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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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묘미는 사진에 있다. 물론 에세이에서 뿜어나오는 이슬같은 청롱한 문체와 산뜻한 이야기도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페이지 중간중간마다 보여지는 접사에 가까운 사진이 세상의 경이로움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갓난아이의 움켜진 손이 엄마의 손바닥 위에 있는 모습, 비를 머금은 나뭇잎,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낸 조약돌 등등, 카메라가 들이댄 자연의 모습 하나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무덤덤하게 세상을 지나치며 살았는가를 깨우치게 만든다. 잠시 카메라처럼 사물을 우리 눈 가까이 마주쳐보자.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린이 앞의 세상은 신선하고, 새롭고, 아름다우며, 놀라움과 흥분으로 가득하다. 어른들의 가장 큰 불행은 아름다운 것,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추구하는 순수한 본능이 흐려졌다는 데 있다.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맑은 눈을 상실하는 일은 심지어 어른이 되기 전에 일어나기도 한다. ...(중략)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진실로 강하게 해주는 것에서 멀어지는 증상, 인공적인 사물들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증상, 너무나 똑똑한 나머지 모든 것에서 권태를 느끼는 증상...(51쪽)

빨리 빨리 마저도 현대인의 장점으로 치장해버린 세상 속에서 발길을 멈추고 자연의 어떤 것이라도 한발자국만 더 다가가 바라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세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보자. 눈을 돌려보자. 살짝 다가가 만져보자. 세상은 정말 신비로운 것으로 충만하고, 그것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물론 자연의 모든 모습이 그런 기쁨만은 아닐 테지만.

창공에 흩어져 나는 철새들이 같은 무리 속의 다른 새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파도가 내 안에서 물결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고독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삶의 방향이 정해지곤 하는, 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연민, 간절히 원할 수도, 철저히 거부할 수도 없이, 다만 어김없이 따라야만 하는 어떤 섭리에 대한 경외감, 해마다 틀림없는 이동 경로와 방향을 밟는 철새들의 설명할 길 없는 본느에서 느껴지는 신비감...(84쪽)

우리가 귀만 귀울인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속삭여준다. 때론 삶을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웃음을 준다. 마음만 연다면...

이름을 알고 식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처럼 가치없는 목적도 없다. 심지어 생명의 경이와 신비를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연 사물의 방대한 목록을 작성할 수는 있을 터이니 말이다.(87쪽)

메마른 감성 위에서 사랑의 열매는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사무실 위의 화분에라도 잠깐 눈을 돌리고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보자. 그것은 너무 메말라 갈라져버린 우리의 감성에 촉촉한 빗방울을 선물할 것이다.

이 감성의 비를 맞기 위해 꼭 숲으로 바다로 향할 필요는 없다. 물론 잠시 시간을 내어 그 속에 풍덩 빠진다면 더욱 좋겠지만. 신호등을 기다리면서도 가로수를 쳐다볼 줄 아는, 늦은 퇴근 시간에 하늘의 별과 구름을 바라볼 줄 아는, 가끔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을 줄 아는 그런 마음만 지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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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6-3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정훈의 번역이므로 일단 매끄럽게 읽힐 듯 보입니다.
레이첼 카슨은 바다를 좋아했죠. 종종 바닷가 갯벌 탐사여행도 다녔잖아요.
제가 종종 숲에 들어가서 이름도 모르는 풀꽃들과 산새들을 보고
돌덩어리처럼 굳은 제 마음의 끝뿌리를 살짝 건드려 흔들어보는 것처럼.
송골매가 동네 전깃줄에 앉아서 폼을 잡고 있거나
중백로가 가족들을 거느리고 아침밥을 먹으러 논에 내려앉는 모습은
표정잃은 제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합니다.
나, 이런 글 읽으면 마음 약해지는데 하루살이님 미오!ㅎㅎㅎ

하루살이 2008-07-0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려지네요. 중백로의 아리따운 모습과 송골매의 늠름한 모습이.
저도 도심의 참새와 까치에게서라도 그런 미소를 선물받을 수 있도록 꽁꽁 뭉친 마음을 안마해줘야 겠어요. 파란여우님의 미움(?)이 전신안마가 되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