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것도 귀찮아 그냥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두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이책, 도저히 책 귀퉁이를 접을 수가 없다. 한장 넘기면 접고 한장 넘기면 접다보니 책의 부피가 너무 커져버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로 유명한 이 작가는 현실비판적 시선을 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의 명문대인 도쿄대생들의 집단 자살이나 테러, 이지메 등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곳곳에 녹아 있다.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면서도 현실에서 살아남아 미래를 꿈꾸어야 하는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현실의 고통은 소설 속에서 회색이라는 악마로 등장한다. 중학교 지하에 망자들이 다니는 또다른 중학교 등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인간과 현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주인공은 자아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도오루, 그리고 성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시라토다. 여기에 도오루의 분신 또는 또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도우루의 눈에만 보이는 친구 히카루도 있다.

소설을 이루는 핵심은 도오루가 다니는 중학교를 대상으로 연이어 유괴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행방불명된 아이들은 시체로 되돌아온다. 아이들은 공포에 떨고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안간힘은 인간의 조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학교의 방침, 언론의 행태, 그리고 학생 스스로 논리적 대응 또는 감정적 대응, 문제 해결의 엇갈림 등등 곳곳에서 갈등이 양상된다.

유괴와 죽음이라는 것으로부터 발생한 불안이 선과 악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9.11테러와 같은 공포감과도 잇닿아 있다.

마음없는 인간을 양산하는 현대사회에서 도오루와 시라토는 사랑의 감정을 바탕으로 희망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상호전달은 언제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상처를 주고 때론 아픔을 주며, 때론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도록 유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처마저도 안아줄 감정은 진정한 소통과 이해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유일무이한 인간세상의 희망은 이러한 감정의 전달을 통한 소통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품는 것에 있다는 주인공들의 생각은 많은 생각을 품게 만든다. 더군다나 지금 현실에 지쳐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인생이란 모두가 말하듯이 멋진 것일까, 아니면 나쁜 꿈일까라는 질문에 답은 오로지 가슴 속에 희망을 품고 있는냐에 달려 있다는 작가의 생각, 그리고 그 희망은 사랑과 같은 감정의 상호전달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한 소설은 건조한듯 하면서도, 우울한듯 하면서도 결국 따듯하고 밝은 빛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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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디자이너 최윤희씨는 "행복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다"고 하네요.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다보니 행복해지더라는 것과 일맥상통하겠지요.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말고 마음가짐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리.

그런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일면 수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개를 젓게 됩니다.

먼저 이렇게 비갠 뒤 상큼한 하늘을 보면서도 마음은 왔다갔다 합니다. 즐겁게 바라보면 파란 하늘이지만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면 멍든 하늘이 될테죠.

맞아요. 정말 그래요. 내 마음에 따라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지금, 난 현실을 바꿀 필요가 없겠지요.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비롯해 카스트 계급으로 인해 피해를 또는 어려움을 겪는 계층들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 차별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고통과 인내를 감수하는 일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행복과 변화 사이의 수많은 층들을 만납니다. 누군가는 변화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금상첨화의 길을 걸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생활할지도 모릅니다.

행복과 변화 사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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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선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시간이 지나면, 즉 오래되면서 찰떡같이 붙어있던 것들도 느슨하게 멀어지곤 한다.

둘 사이를 꽉 맺어주던 접착(제)의 힘이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또 오래되면 녹이 슬고, 끊어지고, 쇠퇴하고...

그렇게 스러져간다.

가까우면서 또 오래 사귀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세월이 더께처럼 정을 쌓아주면 다행이겠지만

세월은 그렇게 자꾸만 멀어지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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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8-06-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에 서글픈 적은 없었나요?
 
애시 베이비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19세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네하라 히토미라는 작가의 두번째 소설이란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크!"하고 놀라게 된다. 수간에 자해, 유아성애가 등장하고 소설의 절반은 성의 묘사에 절반은 주인공의 고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과격한 소재와 명확하지 않은 주제로 인해 일본에서도 찬반논쟁이 격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책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유는 주인공 아야의 사랑에 대한 집착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착이란 소통의 불가능과 맞물려 있기에 아야의 외침이 송곳이 되어 독자의 가슴을 찌르게 된다. 또한 주인공 아야와 함께 그가 사랑하는 무라노의 캐릭터가 마음을 뒤흔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주인공 아야는 대학 동창인 호쿠토와 동거와는 약간 다른 룸세어라는 것을 한다. 말그대로 그냥 집을 나눠쓰는 것이다. 어느날 호쿠토의 소개로 무라노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무라노에게 사랑을 느낀다. 또 호쿠토는 친척의 아이라며 갓난아기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호쿠토는 이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다. 소설 속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부분이다.(도덕적으로 쉽게 용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이에 집착하는 호쿠노는 직장도 나가지 않아 잘리게 되고, 아야는 무라노에 집착으로 자살을 꿈꾼다.

 아야와 무라노, 호쿠토는 모두 소통에 서툴다. 무라노에게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벽에다 소리치는 것과 똑같다. 무라노는 모든 것에 무심한듯 하면서도 이상하게 직장 동료인 호쿠토에게는 신경이 쓰인다. 호쿠토는 세상과 문을 걸어잠그고 오직 갓난아이의 성기에 매달린다.

타인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을 때, 사람은 자기가 죽든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생활이라는 걸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관계를 자주 본다. 난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무섭다. (중략) 나는 누구와 마음을 열고 사귀어본 일이 없다. 거부해왔는지도 모른다.(23쪽)

아야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중병 중의 하나다. 아니다. 이것을 중병이라고 단순하게 진단해버릴 수는 없다. 이것이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연스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병일 수는 없다. 마음을 연다는 것,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맞대고 서로 마음을 여는 법을 현재 세상은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쓰코도 나도 적당히란 말을 아주 좋아했다. 뭐, 적당히. 그렇게 말하면 대개의 일들은 넘어갈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실제로 넘어갈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적당히가 아닌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108쪽)

적당히란 곧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않은 그 적당함이라고 할 수 있다.

난, 이런 때조차 나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까 따위를 생각할 수 없다. 아니, 혹시나 생각한다 하더라도,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고, 혹시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절대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114쪽)

지독한 자의식 과잉이다. 그러나 거울을 바라보는 현대인은 그런 자의식 속에 빠져있기 십상이다. 이런 자의식 과잉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원래부터 비참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르지만(122쪽) 나약하고 바보스럽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린 울고싶을만큼 약하다. 약한 것을 상처입힐 만큼 약하다. 그래봐야 우린 분명 자기를 위해서밖에 울지 않을테고, 계속해서 상처입히겠지만.(129쪽) 나는 현재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의 것을 가진다는 건 거기에 부수되는 책임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깨가 너무 무겁다. 책임감이라는 말만큼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은 없다. 그런 것에 속박될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죽고 싶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좋으니까.(133쪽) 원래 사람에 대해 고집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 인간관계 따위, 맺고는 바로 흘려보내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148쪽) 왜 그는 이렇게 미묘한 거리에 나를 붙들어매는 걸까? 그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나는 그의 그런 기질에 녹아들고 싶은 것이다.나는 그에게 죽음을 선사받고 싶은 것이다. (163쪽) 사실은 마음을 열고 싶으면서도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쪽으로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에게 자신을 전부 드러내고, 모조리 까 보이고, 그러고도 사랑해주길 바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은 언제까지고 계속 거부당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169쪽) 나처럼 그의 반응을 보고 상처입는 일도 없을거고,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신경이 쓰여 잠 못 이룰 일도 없을 거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다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없을 거다. (172쪽)

세상이 가르쳐주는 교훈엔 홀로서기가 있다. 성공의 지름길은 인맥관리에 있다고도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아마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일듯싶다. 그리고 자의식이 과잉 상태인 현대인에게 아야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서기란 죽음에 가까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아야는 곧 내 속에 감추어진 두려움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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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스포일러가 다분합니다.





 

인디아나 존스4를 보고나서 갑자기 생각난 영화가 있었다. 20년도 더 된것 같은데 왕조현과 원표가 주연으로 나왔던 홍콩영화다. 당시 홍콩느와르 풍의 영화가 득세하던 시절, SF라는 장르에 대한 홍콩영화의 접근은 너무 새로웠다. 물론 CG적 측면에서 보면 조금 어설퍼보이지만 그래도 그 상상력은 강하게 뇌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동양의 전설적인 동물인 용을 외계인의 우주선이라고 상상한 것이다. 전설을 전설 그대로 표현한 심형래의 이무기 영화 '디 워'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세계 7대 불가사의니 미스터리니 하며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것들이 있다. 도저히 현재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현상들을 어떻게든지 설명해보려 하지만 결국 갈팡질팡 하고만다. 현대에 들어와 생겨난 미스터리들은 외계생명체와의 연관성으로 해석하려 든다. 대표적인 것이 X파일 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미스터리들, 우리가 흔히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들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과학의 급진적 발전은 급기야 우주를 넘보는 시대가 되었고(최근 또다시 화성탐사선의 착륙으로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것은 외계생명체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의 자리에 외계인이 들어앉게 됐다.

인디아나 존스4에 나오는 고대유물이 바로 우주선이며, 벽화의 그림 또한 신의 상징이 아니라 외계인을 그린 것이라는 발상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실감하게 만든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는 더이상 신이 설 자리는 사라진 것이다. 신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오히혀 신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영원히 볼 수 없는 신보다는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는 외계인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외계인은 신의 또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노쇠한 인디아나 존스의 아날로그적 액션 신이 불러오는 향수와 그것을 만회하며 또한 해석에 대한 현대적 접근을 위해 등장한 외계생명체. 앞으로 인디아나 존스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결국 인디아나 존스의 아들이 X파일의 멀더와 동료가 되는 날이 올지도... 혹 그래서 X파일의 시리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시리즈가 하나가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에일리언과 프레데터가 갑자기 만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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