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의 영화가 고독한 개인에서 가족관계로,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로 시선을 옮겨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또한 거친 남성의 이야기가 대부분인 그의 영화가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나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처럼 감성적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인상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은 바로 이것이다.

성공을 앞에 두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어젯밤 잠을 잘 못이루어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그만 포기하고 맙니다. 자신의 재능을 갉아먹는 것이죠.

정확하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영화중에 캐릭터들이 이런 경향을 많이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주로 다루고자 했던 인물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캐릭터로 잘 들어맞는 것은 재즈 연주자 찰리 파커의 삶을 다룬 '버드'나 '밀리언달러 베이비'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이런 캐릭터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듯하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서 물러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를 애정을 갖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회상해보건데 왜 이들이 성공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파헤치지는 않은 것같다. 그래서 애정을 갖지만 그들과 동화되지는 못한다.

정말 그들은 왜 성공 앞에서 성공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윗자리로 올라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 누구나 다가서려하는 그 성공이라는 태양앞에서 왜 동굴로 사라지려하는지,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아니라 온통 앞이 보이지 않는 혼탁한 블루에 휩싸인 사람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처럼 변명따윈 늘어놓지 말고 부닥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마 이들은 결코 변명을 집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명은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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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가 인기를 끌면서 그 주인공들 또한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나선재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가 시끌벅적하다.

일일드라마를 볼만한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 자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선재에게 관심이 쏠리는지 궁금하다. 잠깐 본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끄는 건 봉수아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절 때 고향집에 내려가면 하는 일이 드라마 보는 것이다. 부모님은 저녁 때가 되면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시간순서에 맞추어 채널을 돌려가며 보신다. 부모님과 대화를 피하고 싶을 때도, 또는 반대로 부모님과 대화를 하고 싶을 때에도 이 드라마는 가장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

각설하고 그 많은 드라마 중 부모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은 미우나 고우나 였다. 물론 이 드라마 방영 시간대가 황금시간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쩃든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할 캐릭터로 선재를 꼽으신다. 도대체 그 성격과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선재보다도 수아에게 관심이 쏠렸다. 어른들은 그냥 철부지 며느리라고 치부해버리고 넘어가지만, 수아는 정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많은 생각거리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봤던 수아는 이 시대 결혼이라는 제도의 의미에 대해 돌아보게끔 만든다. 설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친정집으로 가겠다는 수아. 난 내 할아버지를 모시고, 남편인 선재는 선재의 조부를 모시는게 당연하다는 생각. 그래서 같은 시간에 제사가 이루어진다면 궂이 함께 있을 필요없이 각자의 집에서 각자 따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말한다.

또 한번은 카드로 인한 말썽. 시아버지 월급보다 더 많은 카드 영수증. 하지만 그 카드는 친정집에서 대주는 것이다. 내가 시댁에 피해 안 끼치고 친정 집 돈으로 마음껏 쓰겠다는데 무슨 문제인가라고 주장하는 수아.

수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말도 안되는 처사이기 때문에 충격을 주었다기 보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 차원을 넘어 공감할 수는 없다.

도대체 수아의 기존관념을 뒤엎는 이런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수아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개인과 개인을 넘어 집안과 집안의 관계맺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 자신은 개인이라는 울타리보다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행동의 준거로 삼는다. 수아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가족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 새로운 관계가 탄생했음에도 이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다. 그녀의 결혼은 자신의 가족이 선재의 가족과 혼연되지 않고 잠시 거주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수아에게 이혼은 큰 일이 아니게 된다. 그저 잠시 옮겼던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관념. 즉 나 또는 내 가족이라는 누군가 넘어올 수 없는 담을 가진 정체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심중에 모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이다. 배타적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나 가족이 가족일 수 있는 이유로 인해 자아는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한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 의해 그 자아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순간 자아는 외부로부터 도망을 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퇴행을 보여준다.

수아는 이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표상이다. 그래서 일견 이해가 되면서도, 그것이 마땅한 자세가 아니라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땅한 자세라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가치관이나 전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마땅함은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오고감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그 자체일 뿐이다. 그래서 수아의 굳건함은 불편하다. 수아의 굳건함이 현대인의 한 단면을 비추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마땅함이 이 시대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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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TV 에서는 인간탐구 대기획 5부작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1부는 남과 여, 2부는 도덕성, 3부는 자아존중감, 4부는 다중지능, 5부는 나는 누구인가로 이루어진 다큐는 아이의 사생활을 넘어 인간의 뇌와 심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많이 소개했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1부 남과 여의 차이가 생체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

여성은 공감형 뇌를, 남성은 체계화형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렸을 적 남아와 여아간 행동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망막의 두께 차이로 인해 여성은 색의 변화에, 남성은 동작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도 새롭다. 이러한 차이는 성호르몬과 손가락 길이의 관계를 밝힌 존 매닝 교수의 연구가 더해지면서 흥미를 더욱 끌게 된다. 남성적 뇌를 가진 사람은 네번째 손가락이 두번째 손가락보다 훨씬 길고,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통계를 통해 보여준다. 다만 이 비율상 애매모호한 17%가 있는데, 이들은 남성이면서도 여성적인 뇌, 여성이면서도 남성적인 뇌를 지니고 있다. 이런 소수가 존재하는 이유는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갑작스러운 변화로 동시에 모두가 소멸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이런 연구들은 남아와 여아를 키우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과, 소수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런 차이를 인정하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4부 다중지능에서도 드러난다.

기존의 아이큐라는 단편적인 인간 뇌의 측정이 아니라, 8가지로 나뉜 다양한 영역에서의 지능, 즉 다중지능을 통해 개인이 가지는 적성과 능력, 그리고 그것에 맞춘 직업을 갖게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가지 영역은 공간, 언어, 음악, 논리, 신체, 자기이해, 대인관계, 자연 친화로 나뉜다. 이 8가지 중 가장 뛰어난 세가지 영역이 자신의 소질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음악과 대인관계, 자기 이해 능력이 좋다면 음악가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분류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기 이해 능력이다. 반대로 현재 직장인들 중 직장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자신의 상위 3개 능력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라는 것이 놀랍다.

이런 결과들은 게놈 프로젝트에서 말한 게놈이라는 것이 마치 주역 등을 통한 운명과 많이 닮아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유전자이든 운명이든 자신의 능력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능력에 맞추어 발전시킨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이런 점에서 3부의 자아존중감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또 인생을 즐기며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자아존중감이 높고 낮은 원인에는 선천적인 기질도 있지만 부모의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부모가 자식을 설득하려하거나 가르치려고만 들지 않고, 먼저 공감하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모와 어린 자식간의 관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듯 싶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이 5부작 중 가장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2부 도덕성과 성공확률이다. 도덕성은 단순히 착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도덕성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심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 능력도 중요하다. 도덕성의 3대 요소로 민감성, 판단력, 용기를 꼽는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 있다. 도덕성이 체제 순응적 인간을 양성하는 것인가에 대한 접근이다. 성공이란 의미도 체제 순응적 성공만을 말하는 것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체제에서라면 과연 도덕성은 어떻게 작용해야 할까. 그리고 그 체제에서는 어떤 사람이 성공한 것일까.

도덕성이 가치 판단을 필요로 하듯 도덕성과 성공의 관계 또한 가치에 대한 접근이 필요할 터이다.

아무튼 이 다큐멘터리는 은연 중 소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남성과 여성의 뚜렷한 구분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는 17%의 소수와 제대로 된 도덕성을 갖춘 소수자들(?), 아이들에 억압적이지 않고 행복을 대물림할 수 있는 소수(?)의 부모들 등등. 타인과 같은 또는 비슷한 행동을 통해 또는 소속감을 통해 안심하고 안주하던 때로는 불평하던 것에서 탈출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의 길을 또는 아이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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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3-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나!
제 네번째 손가락이 (양 손 모두) 두번째 손가락보다 길어욧!
내 뇌의 정체성이...*.*

하루살이 2008-03-0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럼 17%에... 오히려 이런 분들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그래서 희망의 부피도 크다는 것을 ^^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DMZ는 자연의 보고로 알려졌다. 6.25이후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그래서 뭇생명들이 그 조그만 곳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뢰밭 위에 자연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손길, 발길이 닿지 않음으로써 회복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은 의외로 많다. 폴란드의 비알로비에자 숲은 수령 500년이 넘는 참나무들로 빽빽하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 철의 장벽이 여전히 남아있어 철조망 사이로 넘나들 수 없는 몸집 큰 동물들은 이동이 제한됨으로써 점차 그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의 모습은 또 어떤가. 강제적으로 추방(? 이주?)된 사람들 덕분에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가 다시 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물론 이들의 유전자가 어떤 변형을 일으켜 후손들의 변이가 일어날지는 아직 모른다. 또한 동물뿐만 아니라 정부의 눈을 피해 사람들도 조금씩 돌아왔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폭력과 살생의 참혹함일 것이다. 인간이 없어진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우니까.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외계인들이 현재의 지구인들을 바라보면 자살하려는 줄 오해하기 십상이라고.

저자는 상상을 해봤다. 정말로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지구의 멸망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만 송두리째 없어진다면 말이다. 그런 상상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저자는 한국의 DMZ를 비롯해 자연이 숨쉬는 곳은 물론, 도시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인간이 사라진다면 도시 또한 사라질테니 말이다.

도시가 사라진 후의 극명한 모습은 뉴욕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뉴욕뿐만은 아니다. 지구위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가 이와 비숫한 상황이다. 도시는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한 전기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래서 인간이 사라지면 화석연료의 사용도 없어지고, 전기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뉴욕 지하철의 경우 지하철을 흐르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하수구로 뱉어내는 것이 멈추게 됨으로써 반나절이면 물로 넘쳐나게 된다. 아스팔트와 도로 위에 고개를 내밀던 식물들도 득세를 하게 된다. 물은 제 갈길을 찾고 동물들은 빌딩을 은거지로 모여든다. 몇년만 흐르면 빌딩 숲은 생명의 숲으로 변하게 된다. 지붕에 뚫린 주먹만한 구멍 하나만으로도 수십년 후엔 건물이 쓰러진다.

눈길을 과거로 돌려보자. 아프리카엔 하마나 기린, 코끼리 등 거대한 동물이 살고 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에는 덩치 큰 생명은 사라졌다. 물론 예전엔 있었다. 화석이 그 존재를 입증한다. 그런데 왜 사라진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갑작스런 출연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인류와 함께 거대한 동물이 같이 진화해갔지만 북아메리카에선 갑작스레 인간이 나타나면서 몸집 큰 동물들이 사냥감으로만 여겨져 이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렇게 동물을 죽이는 것은 직접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아메리카에서만 1년이면 조류가 2억마리가 죽어나간다. 물론 사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전깃줄이나 송신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의도하지 않은 살상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예전에 인류는 자연과 공존해왔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이토록 변해버린 것일까. 저자는 그것을 인간이 포획물 또는 상품이 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즉 노예로 여겨지거나, 근대화 이후 노동력으로 여겨지면서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잉여의 인간들로 잉여의 가치를 얻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착취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착취는 자연에 대한 착취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게 된다.

인간이 세계 곳곳에 도착하면서 지옥이 되어버린다는 마틴의 전격전 이론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인구감소를 그 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누군가는 2억 정도의 인구가 지구와 공존할 수 있는 최대 숫자라고 하지만, 저자는 그정도까지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부부가 1명의 자녀만을 갖도록 하는 출산억제를 통해 차근차근 인구를 줄여나가자고 한다.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인구는 이미 노동력이자 상품의 힘이고, 또한 경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출산감소로 애타하는 각국의 정부들을 보라. 그런 정부들에 출산억제를 이야기하면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저자의 해결책이 현실에서 발을 떼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물론 세계정부가 꾸며져 그 정도의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의 인구로도 화석 에너지 사용을 줄일 수 있는 억제력 또한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무튼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연이 아님을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연을 통해 위안을 얻고 힘을 얻는다는 것도 깨닫는다.

사족

1. 지구에 대한 보호에서도 엇갈린 제안이 있다. 종의 다양성을 확보할 것인가, 생태계 유지라는 기능성 위주의 생명체를 키울 것인가.

2.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건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바다는 이미 오염되어 있음을 책은 말하고 있다. 바다는 물론 모래사장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엄청난 플라스틱 가루들로 꽉 차 있다고 한다. 그 플라스틱을 버린 곳은 문명국들이지만 실제 피해를 입는 곳은 어떤 곳도 가리지 않는다. 우리가 황사 피해를 입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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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의 인기가 거세다. 잔인한 화면이 눈에 거슬릴수도 있겠으나 영화 관람 내내 지루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럴만하다고 생각된다.

추격자라는 제목이 풍기는 이미지에 걸맞게 도망치고 쫓아가는 장면들이 심장을 죄어온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재미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 범인에게 근접해가는 것이 아니라, 범행이 이루어진 장소를 찾기 위한 과정에 있다 하겠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범행의 장소를 찾는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장소라는 것은 외딴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옆집이다. 바로 이 부분이 영화의 섬뜩함을 극대화시킨다고 본다.

시골도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집과 집 사이가 담이라기 보다는 울타리라고 여겨진다. 고개를 살짝 들어 서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곳. 물론 이런 삶은 꼰대가 있어 괴로운 부분도 있다. 소위 말하는 사생활이라는 것의 영역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담이 갖는 소통의 부재가 주는 고통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 집을 찾은 손님은 단 1쌍의 부부였을 뿐이다.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범행은 태연하게 계속될 수 있었다.

영화의 또다른 재미는 살인 동기에 있다. 경찰이 기소를 하려해도 그 동기때문에 힘들어한다. 마땅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동기를 성적 불능으로 암시한다. 하지만 범인은 그것을 승화(?)시킨다. 범행 전 죽음을 당하는 피살자에게 물어보는 한 마디.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과연 범인을 납득시킬만한 생존의 이유를 댈 수 있는 피살자들이 있었을까? 지금 당장 나 자신에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보자. 과연 나는 무었때문에 생명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당위성이란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가를 느낄 것이다. 논리로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없는 존재의 이유.

삶은 살아있음으로 인해 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뿐이다. 그것을 이해 못하고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범죄가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삶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자. 그것이 밤하늘에 빛나는 빨간 십자가가 구원이 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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