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갑자기 홍콩 느와르가 그리워진다. 이쑤시개를 입에 문 주윤발의 모습과, 코피를 흘리는 유덕화,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국영 등. 고등학교 시절 푸른 빛이 감도는 홍콩영화에 반해 프라모델 소총까지 샀던 기억이 있다. 동생과 함께 BB탄을 날리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착각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홍콩 느와르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세월이 하 수상키 때문일련지도 모르겠다. 홍콩 느와르라는 것이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자꾸 우울하기 떄문에 당시의 기분으로 되돌아가고싶어하기 때문이지 않는냐는 것이다.

1980년대말, 1990년대 초 홍콩영화의 소재이자 테마는 의리였다. 주인공들이 비록 조직폭력배이거나 범죄자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동경했던 것은 목숨을 내주고서라도 의리를 지키는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이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악용이 되다보면 처참한 복수의 연쇄로 이어지겠지만, 당시 피끓는 나이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목숨도 바칠만큼 끈끈한 그 무엇을 나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의 의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웅본색에서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는 주윤발의 모습의 영향이 가장 클 듯 보인다. 돈이면 다 될 것 같은 세상, 돈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세상을 대하다보니, 너무 우울하다. 그런데 그 돈을 불쏘시개 정도로 생각하며 친구를 위해, 가족을 위해 피를 바치는 모습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감동적이다.

그렇게 불쏘시개마냥 돈을 대할 순 없을까? 그렇게 목숨을 바칠만큼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순 없을까? 점차 시대에 묻혀가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 홍콩의 푸른 빛 밤거리를 떠올려본다. 영화 포스터처럼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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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TV에선 세계적 항공사진작가 얀 베르트랑이 한국을 찾아 항공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UN의 허가를 받아 남방한계선을 죽 따라가며 사진을 찍기도 했고, 동해안을 따라서, 남해안, 내륙지방 등 전국방방곡곡을 다 누볐다. 그것도 하늘에서. 일종의 특혜인 셈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세계라는 풍경사진이 준 막강한 영향력 덕분이었을 게다.

아무튼 이 프로그램이 한창 방영되고 있을 즈음, 숭례문(남대문)은 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얀의 카메라에는 서울 4대문 안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풍경 속에는 온전한 남대문의 모습도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3시간 뒤 모든게 사라져 버렸다. 

...

얀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사진으로 남긴 풍경들은 매우 아름답죠. 하지만 10년이나 20년 후엔 이 풍경들이 전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아름다움도 변하는 법이니까요.

이제 그 변화의 모습마저도 감지할 수 없게된 남대문만이 그을린 뼈대만을 흉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보 1호라는 타이틀이 갖고 있는 무게감이 더욱 이 사건을 안타깝게 만든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는가. 얀의 이야기를 통해 머지않아 아름다운 국토마저도 어떻게 변하게 될지 걱정이 됐다. 얀의 사진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증명해주는 사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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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진시황은 불멸의 묘약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수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불멸에 대한 욕망은 진시황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스트럴드브러그는 불사를 얻었으나 노화는 계속 진행된 종족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티토노스는 신들로부터 영생을 약속받았으나 젊음을 약속받지 못해 백발의 몸으로 부패해가며 삶을 지속한다.

불사, 불멸에 대한 이런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공포감이 죽음을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용기를 빼앗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욕망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죽음이란 것이 꼭 그렇게 피해야만 할 문제일까.

또하나, 만약 당신이 불멸의 힘을 얻었다면 그 긴 생애를 어떻게 지낼지 생각해 보았는가. 과연 진시황은 세계를 제패하고 나서도 죽지않는 삶을 계속 살아야한다면 무슨 일을 하며 보내려 했을까.

소설 두개골의 서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소설이다. 주인공 일라이는 유대인으로,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대학생이다. 일라이는 자신의 룸메이트 등 친구 세 명과 함께 두개골의 서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두개골의 서는 영생에 대한 기록이다. 네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사원을 찾아가면 한 명은 나머지 친구들을 위해 자살을 선택하고, 한 명은 나머지 친구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희생을 통해 나머지 두 명이 영생을 얻는다는 예언서. 일라이는 믿음에 대해 반은 진담, 반은 농담으로 친구들은 함께 여행을 나선다. 친구는 동성애자인 네드와 백인귀족 티모시, 시골 목장에서 자란 자수성가형의 올리버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않은 이 네 명의 친구들이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닿아 상상이라 여겼던 사원을 실제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두개골의 서가 말한 시험에 돌입하게 된다.

두개골의 서가 말하는 두 명이 나올 때까지 지속되는 수련의 과정. 사원 밭을 갈고, 침묵 수행을 하고, 강의를 듣고... 따분한 일상처럼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그들을 가르치는 수도사들은 작은 체구에 나이를 알 수 없는 외모를 지녔다.

이들은 수련 과정 중 자신의 과거를 고백,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단, 한 명이 한 명에게만 비밀에 부친 채 가르쳐주는 잘못이다. 그런데 이 고백이 충격적이면서도 또한 평범하다. (그 고백은 스포일러가 될 듯하여 밝히진 못한다)

누군가에겐 엄청난 일일 수도 있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일로 치부될 수 있는 마음 속의 짐. 그런 것이었다.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누구나 자신의 발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다. 남의 눈엔 그것이 10키로그램도 5키로그램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자신에게는 100키로그램이 넘는 그런 것일 수 있다.

이 회개와 고백의 과정을 거치면서 두개골의 서의 예언은 완성될 계기를 얻는다. 그리고...

소설은 읽다보면 참 황당무계해 보인다. 영생이란 것이 정말 가능하다고 믿고, 길을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거야. 그것밖에는 희망이 없으니까(109쪽)

우리네 삶도 돌아보면 이런 경우가 얼마나 허다하던가.

 

그래서 혹 희망을 발견하게 됐을땐... 그땐 그 희망에 모든 것을 건다. 그것을 위해 내 발도 묶이는 것을 허용한다.

 

복종의 문제지. 복종으로부터 계율을 받아들이게 되고, 계율이 있어서 제어를 할 수 있고, 제어를 해야 육체의 부패를 정복할 힘이 생기는 거야. 복종은 반 엔트로피적인 거야. 엔트로피는 우리의 적이고. (334쪽)

고정된 것으로부터의 탈출구 영생은 인생의 미로에서 벗어날 묘약이 맞을까. 책을 덮고 나면 영생이란 죽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 진짜 영생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삶의 자유를 최대한 만끽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영생을 얻은 소설 속 두 주인공의 미래가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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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세계 경제가 빨간불이다. 미국발 서브프라임으로 증시가 요동치고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숫자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속에는 절망만이 가득하다. 불과 반년전만 해도 희망으로 반짝였던 눈들이다. 숫자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세상이다.

최근 국내에 출판된 신간서적 중 은행과 보험에 관계된 책들이 꽤 있다. 은행과 보험사라는 것이 기업인 이상 고객의 이익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책들이다. 좋다고 해서 멋모르고 가입하는 상품들이 실제론 은행과 보험사의 배를 불려주는 일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알고, 신중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이 소설도 이런 이야기들이 녹아들어 있다. 빠찡코에서 노닥거리는 백수 주인공이 증권시장의 법칙을 깨닫는 모습이 주된 줄거리이지만, 그 과정엔 주인공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노인의 복수심도 들어가 있다. 바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겠다는 은행과 보험사로 인해 목숨까지 잃게된 일반 서민들을 대신해 투자로 자신은 이득을 취하고 은행사를 곤혹에 빠뜨리는 작전이 짜릿하다.

소설 속에서는 증권계에 퍼져있는 진리들이 담겨 있다. 기다리는 것도 투자의 한 방법이라는 것. 조금 일찍 소설 처럼 실감나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탁 쳤다. 지금과 같은 세계 증시 상황에서 혼돈으로 치닫는 일은 경제 자체의 전망 떄문은 아니다.

개개인의 자기 보신과 공포가 확산되면서 시장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타이밍과 상대만 잘 파악하면, 단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거대한 임팩트를 시장에 안겨줄 수 있다.(274쪽)

결국 증시와 같은 금융업은 심리게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리게임에 접어든 순간 그것은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예측 불가능성, 우리는 그것에서 예측 가능성을 기대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 희망의 조건은

정보가 타인에게 전달될 때 발생하는 시차와 왜곡(281쪽)에 있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판다는 것도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지난해 증시 대박으로 펀드가 인기였다. 그 열기는 이제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다. 시퍼런 칼날로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앞으론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을 듯하다.

사람이 먹고사는 일이란 실로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131쪽)

그러니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신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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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부익부 빈익빈의 극단 상황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굶어죽는 사람과 먹을 것을 함부로 버리는 사람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영화에선가 나왔던 맛을 음미하기 위해 나온 음식 중 한 입만을 먹고 물린다는 사람은 부의 표상일 것이며,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먹을 것을 찾아 입에 넣었다 식중독 등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요지경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은 음식이 굶고 있는 사람에게 전해진다면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터이지만 실제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하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세계 경제 질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뭄과 홍수같은 자연재해, 빈민국의 후진적 정치형태, 턱없이 부족한 구호단체의 지원, 전쟁이나 테러 등의 직접적인 이유도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실제 지구가 생산하고 있는 식량의 절대량은 모든 지구인을 살리고도 남을 수준이라는 점에서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 부차적인 문제가 부차적인 문제에서 끝나지 않은 것은 시장 제일주의와 함께 그 시장을 통해 이윤을 챙기려는 다국적 기업과, 독재 지도자 등의 부패한 부유층 등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런 이야기들을 굉장히 쉽게 풀어쓰고 있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듯 써내려간 글 덕분이다. 그럼에도 설명이 부족한 것은 다국적 기업이 빈민국의 지도층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으며 1차적 식량에 대한 권한을 갖는지, 그리고 그 혜택이 어떻게 주어져 작동되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례와 분석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문제의 근원을 세계 경제 질서로 밝히는 근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비약된 느낌이다. 이런 부족한 부분은 '굶주리는 세계'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을듯하다.

아무튼 책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이렇다.

어떤 나라가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도 사회정의가 이룩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144쪽)

그렇다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그런데 이 사회정의는 한 국가내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국적성과 독점성에 대한 충동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존재했다. (중략) 금융자본이 산업, 무역, 서비스 등의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것이다. (159쪽) 금융자본은 결코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161쪽)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의를 논할 것인가? 이제 아무도 그럴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세계시장밖에는...(163쪽)

그래서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손을 놓고 시장에게 놀림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169쪽)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1쪽)

그렇기에 우리의 희망은 새롭게 탄생할 전지구적인 민간단체에 있다고 책은 말한다. 사회운동, 비정부조직, 노조들의 세계적인 연대만이 워싱턴 합의와 인권 사이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찾아오는 이 무력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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