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때론 그 관계의 끈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혼자서 있고 싶다고 외쳐댈 때도 있겠지만, 잠시다. 외로움이라고 부르든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간에 그 고독 때문에 또다시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관계의 소멸과 생성의 반복을 인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소설은 이제 갓 스무살의 치즈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라는 무대로 들어가기 전의 두려움과 고독을 이야기한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게 되는 사람은 먼 친척뻘의 할머니 깅코. 나이를 먹을 수록 지혜도 커지는 걸까. 아무튼 깅코의 삶이 치즈의 삶에 서서히 스며들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치즈에게 다가왔다 떠나가는 남자친구, 깅코의 남자친구 할아버지 등이 정말로 아주 잔잔하게 삶이란 관계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그 관계란 어떻게 형성이 될까.

그렇게 아는 사람들을 교체해간다. 낯선 사람들 속에 자신을 내던져본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저 눈을 뜨면 닥쳐오는 그날그날을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간다. (188쪽)

치즈가 비로소 사회로 발을 내디디면서 느끼게 되는 관계의 정의다. 관계란 때론 희망으로 때론 절망으로 다가온다.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때로는 딱딱하게 굳은 심장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갈 뿐이다. 누군가가 그 관계맺기의 방법을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의 수많은 순간들마다 정답이 있다면 또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누군가 옳다 그르다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불안한 것이다. 산처럼 쌓인 바나나들 속에서 한 송이를 골라내는 일에도 나는 이걸 고르길 잘한 걸까 하고 먹을 때까지도 끙끙 고민을 하겠지.(178쪽)

젠장. 정말 내가 잘 한 것일까. 고민도 하고 후회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인 사람들간의 관계맺기. 

나는 누군가를 나와 튼튼히 연결해두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혼자서 살아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한 번은 자신이 먼저 떠나보고 싶다. 나갈까? 깨끗하게 연을 끊고,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겠지.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면, 파국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 의미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되풀이하고 있다 보면 인생도 결국 끝이 나게 될까?(150쪽)

극도의 허무감이 밀려올 때 차라리 나이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사람들에 치이고, 혼자서도 치이고. 늙는다는 것은 이런 치임에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노인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젊을 때가 정말 좋은 땔까요? 매사에 끙끙 앓고, 비관적이고, 피곤해요. 그런거, 이제 다 지겨워요. - 젊을 때는 다들 무턱대고 손을 뻗으니까... 나처럼 나이가 들면, 내밀 수 있는 손도 점점 줄어드는 법이야.(151쪽)

내밀 수 있는 손이 줄어드는 게 나이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점점 무덤덤해지는 삶일까.

전, 젊을 때 허무감을 다 써버리고 싶어요. 노인이 됐을 때 허무하지 않게.-치즈 짱, 젊어서 그런 걸 다 써버리면 안돼. 좋은 것만 남겨두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죽는 게 싫어져.-싫으세요, 죽는 거?-그럼. 당연히 싫지. 괴롭거나 아픈 건 몇 살을 먹어도 두려운 법이야.(60쪽)

아마, 그럴 것이다. 10대 때보다 20대 때보다 30대가 되면 세상을 좀더 잘 알고, 잘 대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절대 아니었다. 다만 관계 속에서 터져나오는 감정의 일렁임을 표정에 드러내는 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 마음 속에서의 일렁임은 큰 차이가 없지만 표정은 점점 무덤덤해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슬퍼진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바라볼 때면.

사람은 변한다는 것도요. 그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말이에요. 변했으면 하는 부분은 안 변하고... 그 반대로 될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은데.(176쪽)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마음 먹은 것과 하등의 상관없이 흘러가고, 그 흘러가는 세월은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때론 가벼운 긁힘 정도에서 끝나지만 때론 깊은 상처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덧나기도 할 것이다. 아픔은 나이와 상관없이 전해져온다. 다만 펑펑 울거나 조용히 흐느끼는 정도의 차이일뿐. 또는 눈물을 집어 삼키기도 하고.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오늘도 아픈 가슴을 쥐어잡고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누군가가 깊게 패인 상처를 쓰다듬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나 또한 누군가의 상처를 덧내기 보다 후시딘이라도 발라줄 수 있기를... 하지만 오늘도 난 스스로의 절망감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았다고 혼자 슬퍼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되는 두가지 질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카메라가 대중에게 급속히 보급되면서 그림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 장면을 그대로 정지시킨채 또는 머릿속에 담아두고서 붓을 휘두르는 대신, 그 순간 손가락만 까딱하면 파일의 형태로 눈앞에 재현되는 시대에 그림이 처하는 위치는 굉장히 불안할 듯싶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미술은 대중이 처하고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굽어다보고 있다.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몸값을 지닌채 거만한 몸짓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현대미술을 대하는 대중은 왠지 주눅이 들어있다. 무엇인가 위대한 것이 숨어있을것 같은데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혹시 알 수 없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애기하는 걸 보면... 그러니까 저 뒤에는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중략)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죽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백년, 혹은 그 이상 된 작품이나 예외적인 작품에서만 살아 있다. 현재라는 공간은 쓰레기 하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31쪽)

정말 속 시원하다. 현대의 추상화를 보면서 또는 설치미술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던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눈에 이해가 되던가. 순전히 비평가나 작가의 구라(말솜씨)로 빚어낸 예술은 아닐까 의심도 간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자격지심이 이런 비난을 함부로 뱉어낼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넌 그러니까 무식해"라는 소리가 두려워 그런가보다 라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인 에프라임 키숀은 과감히 속엣말을 꺼낸다. 간질간질하던 곳을 속시원하게 긁어준다.

실제로 지적인 속물근성은 한도 끝도 없다. 최근 나는 한 오페라 공연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지휘를 하는 15분 내내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 그리고 진보적인 관객들로부터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71쪽)

지적 허영심은 꼭 미술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음악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영심을 이용해 비평가와 작가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현학적 어휘를 구사해 그림의 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 그림은 각 가정에서 소장할 수 있는 생활예술을 뒤로하고, 투자를 넘은 투기개념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림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지니고 있는 금전적 가치가 현대미술을 지탱하는 힘이 된 것이다.

요셉 보이스가 전적으로 즐겨쓰던 "그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표현처럼 진정 예술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만을 지껄였다. (132쪽)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직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교양을 지닌 식자층이다. 이 겁 많은 식자층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거만한 직업적 평론가들에게 변함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시종 난처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168쪽)

예술을 끌어내리자. 이상하고 기이한, 그래서 폭등하는 몸값을 지니면서 전문가인체 하는 사람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내 옆에서 호흡하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에 눈뜨게 만들며,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도록, 예술을 말이 통하는 친구로 곁에 앉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솔직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족
물론 그러면서도 혹시 아마추어의 눈에 프로의 실력이 비쳐보이겠는냐는 질문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당구 300의 실력자가 선보이는 3쿠션을 30의 초보의 눈에는 한번의 쿠션으로밖에는 비쳐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위의 우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꼭 하고싶다. 30의 초보자도 3쿠션의 현란한 모습을 천천히,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다 이해한다. 그런데 대중을 벗어난 예술은 도대체 난감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일 MBC에서 정치에세이 '달콤 쌉싸레한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현재 모습을 비쳐주면서, 그들의 입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누군가에게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을 성싶고, 이미지 전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물론 프로그램이 이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절대 아닐 것이며,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한 그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의원직을 그만두고 나서 콘테이너에서 생활하는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돈을 쏟아붇고, 의원직을 수행하면서도 세비를 온통 활동비로 쓰면서 돈 한푼 모으지 못했기에,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는 집 한칸 없이 콘테이너나 단칸방을 전전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이르지 못했기에 발생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안타까운 마음도 가득하다. 어찌보면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과연 그들은 그래서 당당하고 떳떳하며, 또한 행복하다고 생각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들이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지...

실은 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식욕과 성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한계를 깨닫고 만족할 줄 알게되죠. 그런데 권력욕은 한계가 없어요.라는 정신과 의사의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기억이 희미한데, 달라이라마였는지, 틱낫한 이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교계의 선승이 했던 이 말도 기억이 난다. 가장 끊기 어려운 욕망은 명예욕이다.

권력욕과 명예욕은 얼핏 달라보이지만, 이름만 다른 뿌리가 같은 욕망이지 않을까 싶다. 식욕과 성욕과 다른 점은 이 두 욕망은 상대적 잣대를 들이대야만 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는 '남들보다'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성욕과 식욕은 일어나지만,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망은 반드시 타인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대접받고 싶은 생각,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욕망일 수도 있다. 상대적이라 함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 그래서 달콤하고, 따라서 끝내는 내려와야 하기에 쌉싸레한.

정치의 끈을 놓아버리고 나서야 평온한 얼굴을 되찾은 그들의 얼굴 속에서 쉼없이 계단을 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잠시 놓고, 털썩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고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7-08-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았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욕망의 고리지요. 그게 다 뭐라고 말입니다.^^

하루살이 2007-08-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 어쩌지 못하기에 욕망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지요? 그 욕망이 꿈틀댈 때면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때론 진정이 되겠지요.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최면에 걸려 행동했다. "누구냐 넌?" 이라는 전화 통화 속에서 오가는 말 하나로 인해 산낙지를 한입에 집어먹고 쓰러진다. 과연 최면이란 이토록 강렬하게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인가?
실제로 최면의 과정을 지켜봤다. 한겨울 감기처럼 최면도 누구나에게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차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렬한 최면이 아니라면 최면은 누구에게나 걸릴 수 있는 현상이다.
최면치료사가 자신의 눈과 마주보기를 요구하다 어느 순간 최면을 건다. 최면에 걸린 당사자는 눈깜짝할 사이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식이 100% 깨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최면상태에 대해 우습게 생각된다. 하지만 최면치료사가 "당신의 발은 땅에 접착제로 착 달라붙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발을 움직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꼼짝도 못하는 것일까.
"움직일려고 마음 먹으면 움직일 수 있을것 같아요. 그런데요. 그 마음을 못 먹겠어요. 왠지 움직이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최면치료사가 저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움직이면 왠지 불안할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수 있다니까요."
"그럼 움직여봐요"라는 요구에 꼼짝도 못한다. 그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연방 웃는라 정신이 없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마음 먹는 걸 거부하는 걸까.
그것의 정체는 불안감이라고 한다.
"자, 그럼 불안감을 먼저 없애봅시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자, 발을 한번 떼 보세요. 먼저 심호흡을 하고, 편안하다 생각하고..."
그제서야 최면에 걸린 사람이 발을 움직였다.
최면이란 그런 것이었다. 의지도 의식도 모두 깨어있지만 불안감으로 인해 의식과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한 상태.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제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자기최면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 마음만 먹으면 까짓거 할 수 있는데..."라며 주저하는 일들. 꿈이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혹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 현재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도전을 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두려움과 맞서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라며.
최면에서 깨어나자. 마음 속 두려움을 벗고 최면에서 깨어나보자.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이 책을 거칠게 평가하자면, 흥미진진하지만 다소 투박하다라고 해야할 듯싶다. 기대되는 끝없는 상상력, 하지만 어딘가 모를 비약과 다급한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현재 지구처럼, 환경오염과 전쟁, 기아가 끊이지않고, 권력에 대한 투쟁과 자본에 대한 끝없는 탐욕 등으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구를 탈출하고자,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을 만든다. 이 우주선은 새로운 인류를 시험하기 위해 14만 4천명을 선발해 태우고, 새로운 은하계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행성으로 1200년을 넘게 항해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결국 마지막에 남은 세대 중 남녀 두명만이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고, 인류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려 한다.

소설의 재미는 과연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파피용에 올라탄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베르나르의 풍자가 돋보이기도 한다.

제 생각에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인, 군인, 목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과 폭력, 신앙 이 세가지야말로 대표적인 의존 형태지요.(98쪽)

하지만 정작 우주선의 사회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세가지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기폭제가 된 원인은 바로 치정에 의한 살인이었다. 그전까지 범죄 한 건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회는 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도입되면서 급격하게 지구의 현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중략)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역설이야. 더군다나 사람을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포라고.(216쪽)

지구와 닮은 사회로 나아가다 행성에 도착한 단 두명의 남녀. 과연 이들은 지구와는 다른 새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번식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물론 인공수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해내기는 하지만. 그것도 아담을 연상시키는 갈비뼈의 세포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순전히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의도적인 장면들이다.

어쨋든,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에서 최초의 범죄와 제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치정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지구의 첫 인류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때문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거대함의 시발점을 남녀간의 사랑에 두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반면 거대담론에서 내비치는 인간에 대한 관점도 대비되고 있어 흥미롭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진보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아담과 이브, 야훼에 대한 창세기가 우주 어디에선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이다. 상상력에 놀랍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이 개미와 쥐 사이에 놓여있는 사회라고 보고 있다. 이타적 혼연일체의 개미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쥐는 지구에서 가장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스스로를 파멸시키려는 폭력적 유전자를 지닌 종족인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유토피아를 산산조각낸 파피용이라는 소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계속 머물러야만 하는 종족이 바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새까만 우주 속에 푸른 빛을 띠는 지구. 세상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왠지 지금과 같은 현실은 파피용을 어디에선가 만들어봐야 겠다는 상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