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가 하류로 전락한다 - 한 일본 지식인이 전하는 양극화의 미래
후지이 겐키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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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80의 사회를 넘어 점차 10대 90의 사회로 넘어갈 것 같은 조짐은 여러 곳에서 보여진다.

이 책은 이런 흐름은 세계화에 의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10과 90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이 낮아서 누구나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런 가능성을 위해 정부나 사회가 기본적인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층을 넘어 계급 사회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계급이라면 환영할 만하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런 열린 가능성이 자본주의를 끌어가는 힘이 되 왔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이런 가능성이 점차 닫혀지면서 발생할지 모르는 변혁이나 혁명의 위험성이라는 위기의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하니 이 책을 보면서 계속되는 생산성의 발달이, 또는 경제발전이 지구환경은 물론 사회까지 무너뜨리므로 세계화를 거부한다거나 자본주의 이외의 모델을 생각해보자고 한다면 그 전제부터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전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같은 전제하에서 자유로운 계급간의 교류가 가능한 사회라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할 듯 싶다.

저자도 이것을 인식하고

글로벌화는 최종적으론 세계 경제의 평준화를 초래한다. 즉 개발도상국에는 직장과 수익 증대를, 선진국에는 공동화와 수익 감소를 가져오고 종국에는 전세계의 물건이나 서비스가치가 같아진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요소가격 균등화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임금도 포함돼 있다. 임금 평준화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발전 지역의 노동자가 아니라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에 얘기가 복잡해진다.(77쪽)고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분이 생활 수준의 상승을 원한다면 결국 자본가나 투자가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승리하는 길이다.(78쪽)

이런 현실에서 그나마 계급간의 벽을 넘나들기 위해서는 실력이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력 지연 혈연 국가 문화 인종 등등 여러가지 차이가 차별로 굳어지는 대신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된다면 불평등한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누구나 똑같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미국과 같은 풍부한 장학금 제도나 복지국가의 제도적 장치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실력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야지만 상류로의 진입이 가능한 사회, 그리고 그 진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

저자가 제시하는 상류로 향하는 10가지 방법을 적어본다.

1. 해외명문대학에 유학하라. 2. 공무원은 절대 되지마라. 3. 기업에 취직하려거든 세계를 상대로 기업활동을 하는 곳을 선택하라. 4. 최소한 영어회화, 그리고 영어 이외의 외국어도 1개 정도는 해야 한다. 5. 전문직을 선택하고, 세계 공통의 자격을 취득하라. 샐러리맨이 아니라 비지니스맨이 되라. 6. 컴퓨터 지식과 기술을 익혀라. 7. 해외 뉴스를 주목하라. 8. 금융, 경제 지식을 익혀라. 9. 온리 원 따위의 가치관을 버려라. 10. 애국심을 가져라.

10번이 조금 뚱딴지 같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아무튼 이 방법을 읽고 정말 실용적인 사고라고 생각이 드는가. 지금까지 나태하게 살아온 나를 꾸짖게 만드는가. 아니면 이런 사회로의 방향을 거부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행동을 모색하고 싶은가.

(영국은) 계급이란 반드시 부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인생을 보내는 방법의 문제라는 의식이 강하다.(176쪽)라는 말을 다시한번 되새겨봐야 할 듯싶다.

이 책은 쉽게 부정하지도, 또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는 중류의 소시민들의 약점을 잘 파고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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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유인원, 인간을 말하다를 보고 있자니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인간들의 사냥에 죽어간 고릴라 가족과 침팬지, 그리고 남겨진 젖먹이 침팬지의 겁먹은 눈동자. 애완용으로 팔려간다는 그 젖먹이 침팬지는 자신의 어미를 죽인 사냥꾼의 발을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직 따듯한 체온이 필요했기에 옆에 있던 사람의 발이라도 안고 싶었던 것이다. 사냥꾼은 매몰차게 침팬지를 떼어놓으면 낑낑 대고 다시 사냥꾼의 다리에 매달리려 한다. 그 사냥꾼은 소위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부모의 원수인데도 말이다.

침팬지 새끼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간다. 어미는 아이를 등에 걸쳐놓고 애지중지 먹이도 주고 애정을 주지만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어미는 새끼가 죽은 것도 모르고 끝까지 안고 다닌다. 말라 비틀어진 미라가 되었건만 끝내 새끼를 놓지 않는다.

유인원들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하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솟는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들에게 시련을 안겨준 인간만을 욕할 수는 없다. 숲사냥에 나선 사람들은 호사거리나 취미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냥 이외에는 생존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의 생존방식이 왜 사냥으로 몰리도록 만들었는냐에 있다 하겠다.

밀림이 개발되기 전에도 분명 사냥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이 뚫리고 나무가 베어지기 시작한다. 밀림이 사라지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유인원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개체수가 줄다보니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이 등장한다. 하지만 토박이 주민들은 예전 그대로의 삶의 방식 이외에는 생존의 방법을 모른다. 사냥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굶어죽는다. 문제의 원인이 개발인 셈이다. 하지만 개발을 포기한다면 국가의 발전은 요원할 것이다. 해결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 대안으로서 관광산업으로의 길을 방송은 제시하고 있다. 고릴라나 침팬지의 자연 환경 그대로를 관광상품화하고 현지 주민은 가이드로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의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다면 문제의 해결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방송에서 이야기하고 있진 않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밀림의 개발이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냐다. 밀림은 대부분 커피와 카카오를 키우기 위해서 사라진다. 커피와 카카오는 기호식품이다. 세계인의 기호식품을 위해 생존의 터전이 사라지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있다. 또한 그 기호식품의 혜택은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농장을 소유한 자에게 돌아간다. 내가 먹는 커피 한 잔, 초콜릿 하나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선택인가? 나의 기호식품을 포기함으로써 유인원과 원주민들을 살릴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어느 한국가의 발전을 무시할 수도 없다. 대안은 환경관광국가임을 학잗들이 제시하지만,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젖먹이 침팬지의 눈망울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아와 에이즈로 뼈만 남은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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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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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의 재미는 상상력이 어느 부분에 개입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와 신윤복, 그리고 정향과 김조년이라는 네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윤복의 경우엔 그의 역사적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 소설의 주인공임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백미는 신윤복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에 있다고 하겠다.

소설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남겨진 그림을 해석하다 떠올린 상상이 그 밑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홍도의 황갈색 바탕의 담담하지만 힘찬 그림과 서민들과 남자의 힘찬 근육과 희망과 웃음이라는 반대편에 신윤복의 화려한 색채와 여인들의 알듯 모를듯한 심리가 충돌하고 어우러지면서 소설이 탄생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림을 보는 것을 넘어 읽을 줄 몰랐다면 전혀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그림을 읽는 재미가 소설의 재미를 한 층 더해준다.

게다가 정조가 조연으로 나타나면서 10년전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 놓여진다. 그리고 그 살인사건에 대한 진범을 찾는 과정은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을 하나로 엮어낸다. 그 과정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잘 짜여져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다.

그렇지만 이런 매력들을 일일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소설이 밝히고 있는 비밀들을 발설하는 것은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 것이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이 비밀을 말하지 않고서는 또한 리뷰를 쓴다는 것도 개인적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포기한다. 다만 바람의 화원이라는 제목이 말하듯이 바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통해 바람의 존재는 증명된다. 불교의 선문답이 문득 생각난다. 이병헌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도 나온 그 선문답말이다.

저것은 가지가 흔들리는 것입니까, 바람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아니다 그것은 너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니라.

한번쯤 이런 경험을 해봤는지 모르겠다. 혹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것도 이런 의미로 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이나 풍경을 보더라도 나에게 근심이 있거나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령 단풍구경 갔으나 화장실이 너무 급한 상황이라면 울긋불긋한 색의 향연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화장실 표지만 찾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누군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는다면...

아름답다는 느낌은 마음에 있다. 바람이든 가지든 그 흔들림도 마음에 있다. 마음이란 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그것이 추한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름답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음을 넘어 사랑을 전제로 한다. 바람은 왔다가 사라진다. 바람이 가져다주는 것은 봄날의 꽃일 수도 있고, 나뭇잎들의 속삭임일수도 있다. 그 꽃도 나뭇잎도 시간이 지나면 질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고 그 아름다움에 탐닉하고 싶어진다. 사라질 것에 대한 집착은 사랑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을 때만이 눈에 보여진다. 그 대상의 아름다움이 말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 이외에 감추어진 모든 것도 다 보여진다. 소설 속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려낸 그림들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도 사랑으로 대상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인물들의 감추어진 것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아름답다. 소설을 통해 되살아난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바람처럼 사라져버렸기에 더욱 아름답다. 이는 이들을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소설은 두 인물을 살려내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으로 소설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의 숨겨진 것들을 보고 읽게 만들었기에 그들을 대하는 독자들은 두 화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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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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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재작가라고 불리는 오츠이치의 단편모음집인 이 소설은 한마디로 죽음의 향연이다. 10편 단편 모두 죽음이라는 소재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 죽음의 색깔은 단편마다 모두 다르다.

절대적이고 압도적이고 부당하기 짝이 없는 죽음...(401쪽)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라는 단편에 나온 대화 중 한 대목이다. 10편의 소설이 말하는 죽음이 제각각이지만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정도 일까.

아무튼 이 책에서 뿜어내는 상상력에 혀를 내두른다. 추리 소설과 호러, SF, 스플래쉬 등등 장르 불문에 영화 큐브나 식스센스, 올드보이, 또 고전에 가까운 소설 왕과 거지 등등을 연상시키며 종횡무진이다.

소설 속에 꼭 등장하는 죽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하고, 잘 됐다고 통쾌해하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게 만들거나, 또는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등 묘한 느낌을 전한다. 도대체 작가는 이런 죽음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냥 단순히 이야기의 한 소재로만 쓰였을 뿐 어떤 의미를 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도 계속되는 죽음을 대하다보면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인가? 죽음이란...

책의 표제이기도 한 [zoo]에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살인자를 찾는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나는 생각한다. 빨리 편해지고 싶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이야기하고 죄를 인정하고 싶다. 아니면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연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수라는 하나의 선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무서워져서 문제에서 눈을 돌리고 거짓말하기를 선택하고 있었다. (113쪽)

zoo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심리가 아마도 전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하다. 자신이 직접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그 일을 하도록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상태.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며 변명을 하고 싶어한다. 내 의지로 하지못하고 세상의 흐름이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한 어중이 떠중이 상태의 심리를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명확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찬찬히 그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이런 심리와 맞닥뜨린다. 그런데 또하나 이런 심리를 가진 주인공들은 순간적 충동에 일을 저질러 버리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충동과 억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그래서 소설은 어두운 색채를 지닌 듯하면서도 밝은 모습을 찾아내곤 한다. 삶을 회피하려 하면서도 간혹 깊숙히 개입하기도 한다. 숲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새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심정. 실은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태연해하는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표현되지 않았던, 또는 감추어졌던 심층의 심리를 자극한다. 어둡고 음습한 세계와 밝고 화사로운 세계가 죽음을 앞두고 충돌한다. 자, 소설 속에서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살인과 죽음이 당신의 어떤 마음을 자극할 것인지 한번 만나보라. 이토록 죽임과 죽음이 쉽다면... 죽이는 자의 입장과 죽는 자의 입장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소설은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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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산책 - 바람과 얼음의 대륙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고경남 지음 / 북센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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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펭귄, 빙산, 눈보라......

이 책을 읽고 나면 여기에 태양을 하나 더 넣어야 할 것이다. 남극의 유빙 하나 녹이지 못하는 나약한 태양이 빚어내는 빛의 향연은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말 그대로 하얀 구름을 불태우는 일출과 일몰의 붉은 빛과 그 붉은 빛에 물들기 전 황금빛 하늘은 이 힘없는 태양의 마음이다. 남극의 세찬 바람에 얼어붙은 태양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을 텅 비우게 만들고 그 쓸쓸함 속으로 바람이 휑하니 불어온다.

이 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진에 먼저 시선이 쏠린다. 펭귄의 깃털 하나, 빙산을 이루는 얼음 조각 하나, 구름의 수증기 한 방울 마저도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름답다. 게다가 이 사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편집의 힘이다.

'일상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모든 것에 시큰둥한 채'라는 짧은 글이 들어간 8쪽에는 정말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펭귄 사진이 실려있다. 그리고 사진 이외의 바탕은 까만 색으로 물들어 있고 활자는 선명한 흰 색으로 찍혀 있다. 다시 그 바탕엔 희밋하고 여린 흰 색의 일상=바이러스=일상=바이러스.... 글자들이 깔려 있다. 이 글자들이 머릿속에서 맴을 돌더니 펭귄과 함께 가슴을 찍어댄다. 이런 식의 편집이 중간 중간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타나면 잠시 숨을 가다듬어야만 한다. 고맙게도 이런 감상을 남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유구한 남극의 얼음 들을 마주치면서 유한한 삶을 생각하고, 펭귄과 갈매기들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가벼운 듯 진중하다. 쓸쓸한 듯 따사롭다. 귀여운 듯 사나운 듯 애처로운 듯 보이는 펭귄들의 모습과 먹이로 변해버린 한낱 고기 조각의 펭귄, 그리고 앙상한 뼈만 남은 펭귄 등등 아름답게만 꾸미지 않으려는 지은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남극에 있을 때와 서울에 있을 때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 결국 세상을 대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남극에 있을 때 서울을 그리워하고, 서울에 있으면 남극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또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남극의 빙산 하나가 햇빛의 장난에 얼음 한 조각 떨쳐내고, 그 얼음 한 조각이 17240km를 내달려와 내 가슴 속에 박힌다. 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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