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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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하게 되는 두가지 질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카메라가 대중에게 급속히 보급되면서 그림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 장면을 그대로 정지시킨채 또는 머릿속에 담아두고서 붓을 휘두르는 대신, 그 순간 손가락만 까딱하면 파일의 형태로 눈앞에 재현되는 시대에 그림이 처하는 위치는 굉장히 불안할 듯싶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미술은 대중이 처하고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굽어다보고 있다.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몸값을 지닌채 거만한 몸짓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 현대미술을 대하는 대중은 왠지 주눅이 들어있다. 무엇인가 위대한 것이 숨어있을것 같은데 도대체 알 수가 없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혹시 알 수 없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애기하는 걸 보면... 그러니까 저 뒤에는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중략)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죽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백년, 혹은 그 이상 된 작품이나 예외적인 작품에서만 살아 있다. 현재라는 공간은 쓰레기 하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31쪽)

정말 속 시원하다. 현대의 추상화를 보면서 또는 설치미술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던가. 또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눈에 이해가 되던가. 순전히 비평가나 작가의 구라(말솜씨)로 빚어낸 예술은 아닐까 의심도 간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는 자격지심이 이런 비난을 함부로 뱉어낼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넌 그러니까 무식해"라는 소리가 두려워 그런가보다 라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인 에프라임 키숀은 과감히 속엣말을 꺼낸다. 간질간질하던 곳을 속시원하게 긁어준다.

실제로 지적인 속물근성은 한도 끝도 없다. 최근 나는 한 오페라 공연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지휘를 하는 15분 내내 아무런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 그리고 진보적인 관객들로부터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71쪽)

지적 허영심은 꼭 미술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음악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영심을 이용해 비평가와 작가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현학적 어휘를 구사해 그림의 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 그림은 각 가정에서 소장할 수 있는 생활예술을 뒤로하고, 투자를 넘은 투기개념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림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 그림이 지니고 있는 금전적 가치가 현대미술을 지탱하는 힘이 된 것이다.

요셉 보이스가 전적으로 즐겨쓰던 "그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표현처럼 진정 예술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만을 지껄였다. (132쪽)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직도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교양을 지닌 식자층이다. 이 겁 많은 식자층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거만한 직업적 평론가들에게 변함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시종 난처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168쪽)

예술을 끌어내리자. 이상하고 기이한, 그래서 폭등하는 몸값을 지니면서 전문가인체 하는 사람들만의 예술이 아니라, 내 옆에서 호흡하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에 눈뜨게 만들며,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도록, 예술을 말이 통하는 친구로 곁에 앉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선 솔직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족
물론 그러면서도 혹시 아마추어의 눈에 프로의 실력이 비쳐보이겠는냐는 질문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당구 300의 실력자가 선보이는 3쿠션을 30의 초보의 눈에는 한번의 쿠션으로밖에는 비쳐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위의 우려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꼭 하고싶다. 30의 초보자도 3쿠션의 현란한 모습을 천천히, 차분하게 설명해주면 다 이해한다. 그런데 대중을 벗어난 예술은 도대체 난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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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MBC에서 정치에세이 '달콤 쌉싸레한 인생'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현재 모습을 비쳐주면서, 그들의 입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누군가에게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을 성싶고, 이미지 전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것 같다. 물론 프로그램이 이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절대 아닐 것이며,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한 그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무튼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의원직을 그만두고 나서 콘테이너에서 생활하는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돈을 쏟아붇고, 의원직을 수행하면서도 세비를 온통 활동비로 쓰면서 돈 한푼 모으지 못했기에,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는 집 한칸 없이 콘테이너나 단칸방을 전전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이르지 못했기에 발생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안타까운 마음도 가득하다. 어찌보면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과연 그들은 그래서 당당하고 떳떳하며, 또한 행복하다고 생각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들이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지...

실은 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식욕과 성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한계를 깨닫고 만족할 줄 알게되죠. 그런데 권력욕은 한계가 없어요.라는 정신과 의사의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기억이 희미한데, 달라이라마였는지, 틱낫한 이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교계의 선승이 했던 이 말도 기억이 난다. 가장 끊기 어려운 욕망은 명예욕이다.

권력욕과 명예욕은 얼핏 달라보이지만, 이름만 다른 뿌리가 같은 욕망이지 않을까 싶다. 식욕과 성욕과 다른 점은 이 두 욕망은 상대적 잣대를 들이대야만 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나 명예는 '남들보다'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성욕과 식욕은 일어나지만,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망은 반드시 타인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대접받고 싶은 생각,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욕망일 수도 있다. 상대적이라 함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 그래서 달콤하고, 따라서 끝내는 내려와야 하기에 쌉싸레한.

정치의 끈을 놓아버리고 나서야 평온한 얼굴을 되찾은 그들의 얼굴 속에서 쉼없이 계단을 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잠시 놓고, 털썩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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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았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욕망의 고리지요. 그게 다 뭐라고 말입니다.^^

하루살이 2007-08-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 어쩌지 못하기에 욕망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지요? 그 욕망이 꿈틀댈 때면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때론 진정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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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최면에 걸려 행동했다. "누구냐 넌?" 이라는 전화 통화 속에서 오가는 말 하나로 인해 산낙지를 한입에 집어먹고 쓰러진다. 과연 최면이란 이토록 강렬하게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인가?
실제로 최면의 과정을 지켜봤다. 한겨울 감기처럼 최면도 누구나에게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차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렬한 최면이 아니라면 최면은 누구에게나 걸릴 수 있는 현상이다.
최면치료사가 자신의 눈과 마주보기를 요구하다 어느 순간 최면을 건다. 최면에 걸린 당사자는 눈깜짝할 사이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식이 100% 깨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최면상태에 대해 우습게 생각된다. 하지만 최면치료사가 "당신의 발은 땅에 접착제로 착 달라붙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발을 움직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꼼짝도 못하는 것일까.
"움직일려고 마음 먹으면 움직일 수 있을것 같아요. 그런데요. 그 마음을 못 먹겠어요. 왠지 움직이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최면치료사가 저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움직이면 왠지 불안할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수 있다니까요."
"그럼 움직여봐요"라는 요구에 꼼짝도 못한다. 그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연방 웃는라 정신이 없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마음 먹는 걸 거부하는 걸까.
그것의 정체는 불안감이라고 한다.
"자, 그럼 불안감을 먼저 없애봅시다.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움직일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자, 발을 한번 떼 보세요. 먼저 심호흡을 하고, 편안하다 생각하고..."
그제서야 최면에 걸린 사람이 발을 움직였다.
최면이란 그런 것이었다. 의지도 의식도 모두 깨어있지만 불안감으로 인해 의식과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한 상태.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제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자기최면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 마음만 먹으면 까짓거 할 수 있는데..."라며 주저하는 일들. 꿈이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혹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금 현재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도전을 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두려움과 맞서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데... 라며.
최면에서 깨어나자. 마음 속 두려움을 벗고 최면에서 깨어나보자.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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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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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거칠게 평가하자면, 흥미진진하지만 다소 투박하다라고 해야할 듯싶다. 기대되는 끝없는 상상력, 하지만 어딘가 모를 비약과 다급한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현재 지구처럼, 환경오염과 전쟁, 기아가 끊이지않고, 권력에 대한 투쟁과 자본에 대한 끝없는 탐욕 등으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구를 탈출하고자,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을 만든다. 이 우주선은 새로운 인류를 시험하기 위해 14만 4천명을 선발해 태우고, 새로운 은하계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행성으로 1200년을 넘게 항해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결국 마지막에 남은 세대 중 남녀 두명만이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고, 인류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려 한다.

소설의 재미는 과연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파피용에 올라탄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베르나르의 풍자가 돋보이기도 한다.

제 생각에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인, 군인, 목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과 폭력, 신앙 이 세가지야말로 대표적인 의존 형태지요.(98쪽)

하지만 정작 우주선의 사회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세가지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기폭제가 된 원인은 바로 치정에 의한 살인이었다. 그전까지 범죄 한 건 발생하지 않으면서도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회는 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도입되면서 급격하게 지구의 현 모습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 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 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중략)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역설이야. 더군다나 사람을 세뇌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포라고.(216쪽)

지구와 닮은 사회로 나아가다 행성에 도착한 단 두명의 남녀. 과연 이들은 지구와는 다른 새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들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번식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물론 인공수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해내기는 하지만. 그것도 아담을 연상시키는 갈비뼈의 세포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순전히 창세기를 연상시키는 의도적인 장면들이다.

어쨋든, 파피용이라는 우주선에서 최초의 범죄와 제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치정이었던 것처럼, 새로운 지구의 첫 인류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유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때문이다.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거대함의 시발점을 남녀간의 사랑에 두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반면 거대담론에서 내비치는 인간에 대한 관점도 대비되고 있어 흥미롭다.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진보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아담과 이브, 야훼에 대한 창세기가 우주 어디에선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이다. 상상력에 놀랍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이 개미와 쥐 사이에 놓여있는 사회라고 보고 있다. 이타적 혼연일체의 개미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쥐는 지구에서 가장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스스로를 파멸시키려는 폭력적 유전자를 지닌 종족인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유토피아를 산산조각낸 파피용이라는 소설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계속 머물러야만 하는 종족이 바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새까만 우주 속에 푸른 빛을 띠는 지구. 세상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왠지 지금과 같은 현실은 파피용을 어디에선가 만들어봐야 겠다는 상상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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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동행 - 인생의 가르침을 준 스승과의
오쇼 라즈니쉬 지음, 손민규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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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쇼의 책은 90년대 초반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마음을 흔들었던 부분은 상대적인 삶, 즉 남과의 비교를 통한 삶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대입에 실패하고, 다시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나의 절대적 점수보다는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위한 상대적 우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어느 정도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냥 내 실력대로 가면 되지라는 마음이 한곳에서 자라나면서 우직하게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거의 15년여만에 다시 오쇼의 책을 접했다. 한때 사기꾼으로 몰리는 위기를 겪었다는 외신을 잠깐 접했던 기억만 있을뿐 다시 그의 책을 접하리라고는 또는 그의 이름을 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서야 그의 책을 읽어보니, 그가 자신의 생각처럼 살기 위해 꾸렸던 공동체가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항상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말이 혁명이지 실은 일신우일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물론 전진이나 상승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의 개념에서 쓰인다는 점이 본뜻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쇼의 강의를 모아 펴낸 이 책 [동행]은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삶은 가십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현은 심각한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우회적 표현이다. 삶은 일회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것이며, 따라서 그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선 가십처럼 가볍게, 재미있게 누려야 한다는 뜻일게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신경써야 할 부분은 바로 관계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과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모든 것을 이용하되 아무것도 소유하지 마라. 사람들과 교류하되 관계에 빠지지 말라. (중략) 사람들을 사랑하라. 하지만 질투나 소유욕에 빠지지 마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라. 교류하면서도 나와 너가 서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라. (167쪽)

이것은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 그 소유로 인해 자신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지금 이순간에 빠져든다는 것이 핵심이다.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느끼는 것. 소리와 표정, 촉감 등 모든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의 길이다. 지금 바로 이순간을 느끼는 길이 꼭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내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긍정적인 것은 항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극단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편함과 안락을 선택하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대는 편한 것만을 택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놓친다.(208쪽)

즉, 복종과 규칙, 도덕 등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 그 길은 자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상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 길이란 나눔의 길이 되어야 한다. 꼭 퍼주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을 나누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듯 싶다. 하지만 이런 길도 반복을 거듭하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항상 새로움을 창조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한 창조, 그것은 나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유기농을 짓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유기농을 지어야 하듯이) 타인과의 교감을 통한 창조는 따라서 도덕이나 윤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것들을 느끼며 생활하는 것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먼저 웃으라. 행복하라.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매순간을 느끼면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실은 여기까지가 책을 읽으면서 정리한 부분이고, 책을 읽는 동안 고양된 마음이다. 실제론 과연 매 순간을 느끼며 즐기는 것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웃어야 할 일이 있어야 웃고 행복해 할 일이 있어야 행복하기 보다는 먼저 웃고 먼저 행복해한다면 삶이 그것을 따라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에 머물되 집착하지 않는 삶이란 분명 어렵다. 그러기에 도전해 볼만 한 일이기도 하다. 이 도전은 한번의 성공으로 끝낼 수 없다. 그래서 평생 이 도전을 향해 가야할 것이며, 따라서 그 도전의 길이 웃음과 행복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듯 싶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기전 먼저 웃어본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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