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비유되는 건 많다. 연극이 그렇고 바둑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특히 스포츠라는 것은 그것이 승부가 극명하게 갈라진다는 점에서, 승리를 위해선 엄청난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훈련의 과정에서 얻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련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들은 끊임없이 나오곤 한다. 특히 복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배고픔과 연관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인생의 굴곡을 잘 드러내는 소재로 자주 쓰여진다. 헝그리 복서의 헝그리 정신. 현재 우리나라에 챔프가 없다(1명 있나?)는 것은 바로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비슷한 소리도 결코 쉽게 무시못할 이유중의 하나일련지 모른다.

아무튼 밀리언달러 베이비라는 이 영화도 맨 처음 이런 스포츠를 통한 인생이야기 처럼 보였다. 복싱은 모든게 거꾸로 라는 모건 프리먼의 해석에 잔뜩 어떤 격언들이 쏟아져 나올 것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건질건 있다. 공격을 위해선 한발짝 물러날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멀리 물러서면 펀치가 다다르지 못한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이스트우드가 직접 말하기도 하지만 그의 체육관에 쓰여져 있던 tough ain't  enough.  즉 이말과 위의 말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인생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하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두기. 용감하게 나아갈때 나아가고 물러설 때 물러설줄 아는 지혜.

그러나 영화는 중반부 서서히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승승장구 하고 결국 챔프전까지 도달한다. 하지만 그의 행복을 시샘하는듯한 치명적 사고. 경추와 척추를 다침으로써 신경이 마비되고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매기. 이 때부터 관조적 입장에서 바라보던 영화는 점차 감정이입의 격류속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매기의 입장에 처해 과연 저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것인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이기심. 그것보다도 더 큰 복서로서의 꿈의 좌절. 복서가 손가락하나 까딱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건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이 전이되는 듯 하던 순간, 감정의 흐름은 이제 프랭키에게로 간다. 매기가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프랭키에게 부탁하면서 이내 프랭키의 고뇌에 같이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프랭키는 23년을 한결같이 매주 교회에 나간다. 교회에 가서 목사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는 늙은이. 매주 딸에게 보낸 편지는 반송되어져 문앞에 떨어져 있다.  언뜻 이 상황을 잘 이해못하다가 결국 프랭키가 매기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목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

그는 그 상처를 끝끝내 자신으로부터 털어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그는 23년의 세월로도 치유하지 못했던 그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짊어질지도 모를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는 트레이너 이기 전에 유능한 치료사였다. 어떤 상처도 그의 손을 거치면 흐르던 피가 멎는다. 하지만  뼈까지 깊게 파고들어간 상처는 결코 피를 멎게 할 수 없다. 프랭키는 자신의 몸에 그런 깊은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그것보다 더욱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그녀를 치유해준 영광의 상처다. 오직 복서로서의 꿈을 위해 늦은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만을 향했던 매기. 그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영광을 경험했고, 최고의 자리 바로 아래까지, 아니 정말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며, 꿈에 도달한 행복을 맛보았다. 그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관중의 함성이 잊혀지기전에, 고통스런 인생을 끝낼 수 있다면 그녀는 비록 짧은 영광이고, 짧은 인생이었지만 후회없으리라. 프랭키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욱 진한 그 무엇인가로 끈끈히 맺어진 사이였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오! 나의 <모쿠슈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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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2005-03-2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추천합니다.

하루살이 2005-03-26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프랭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의 역사 - 켄 윌버 시리즈 2
켄 윌버 지음, 조효남 옮김 / 대원출판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600쪽이 넘는 책. 솔직히 읽기가 겁난다. 잠깐 훑어보고 끝까지 읽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읽어본 40쪽 가량.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으면서도 상당히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마음먹고 읽어보기로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진화적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 관점은 또한 초인격심리학(트랜스퍼스널심리학)이라는 독특한 입장이다. 초인격심리학은 얼핏보면 신비주의적 색채를 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을 넘어서 혼과 영(sprit)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신비적이라거나 말도 안된다고 치부하기에는 그것이 기존의 종교를 모두 다 담아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외시하기 힘들다.

먼저 저자인 윌버는 세상을 온수준(all level)과 온상한(all quadrant)으로 나눈다. (나중에 그의 사상적 발달로 온계통이 추가된다) 온수준이라함은 물질-실체-마음-혼-영의 진화를 말하며,  온상한은 세상을 네가지로 분류한다. 그 기준은 내면과 외면, 개체와 공동체의 짝으로 이루어진다. 내면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맥락지향적, 즉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접근을 필요로 하는 것이묘, 외면은 그것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개체의 내면은 개인의 의지를 다루는 것으로 주관적 진실성을 담보로 해야한다. 개체의 외면은 객관적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뇌의 작용과 같은 것이 되겠다. 공동체적 내면은 문화 현상등이 속하는 것으로 상호주관적 상호이해를 바탕으로한 정당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공동체적 외면은 사회조직, 시스템 등을 말하며 기능적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네가지 분류는 다시 뭉뚱그려 나와 우리와 그것들(개체적 공동체적 외면)로 표현되어지는데, 이것은 미, 선, 진으로, 또는 미학 도덕 과학으로, 또는 불 승 법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이 각 분야는 그 분야별로 진화를 이뤄가는데 개체의 내면을 예로 들면 감각 지각 충동 감성 상징 개념 구체적 조작 형식적 조작 비전 논리 등으로 진화하고, 공동체적 외면은 은하계 행성계 가이아계 생태계 노동 분업사회 집단 부녹 촌락 초기 국가 국가 지구촌 등의 진화를 이룬다. 물론 이 네분야의 진화는 각각 진행되기보다는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즉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인간의 내적 성숙또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관계성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관계를 떠나 홀로 발전되어진 것들은 잠시만의 경험으로 남을뿐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은 어렵다.

이들 진화의 기본요소는 홀론이라고 표현되어지는 기본 구조를 갖는데 홀론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체의 부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분자는 분자로서의 전체이면서 동시에 세포의 부분이며 원자는 원자로서 전체이면서 분자의 부분인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홀론적 구조는 계층을 형성하는데 이것을 홀라키적이라고 부른다. 이 홀라키는 역으로 발생할수는 없는데 이것은 분자가 파괴되면 그 윗부분인 세포는 없어지지만 원자는 그대로 존속하지만, 반대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홀론은 4가지 인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작인, 즉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특성, 그리고 공존적 교섭, 초월과 소멸로 나타난다. 여기서 초월은 홀라키적 창발이라고 해서 창조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창조성을 영이나 空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물질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이나 영장류에서 인간이 탄생하는 과정등은 모두 이 창조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신과학등에서 설명의 방식으로 도입했던 우연이라는 것을 피하고, 또 띠의 요동으로 인한 갈래치기로부터도 벗어난다. 그리고 이 공이나 영은 개체의 내면분야의 마지막 진화점임과 동시에 네 분야의 기저에서부터 진화의 끝까지 언제나 존재하는 근본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바로 이부분에서 직선사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홀론들은 각자의 단계에서 한계점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창조적 비약을 맞이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데, 어떤 한 부분의 홀론이 위계를 찬탈하여 전체를 지배하고자 할때 병폐가 발생하게 된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바로 이런 지배자적 계층구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막강한 권력과 돈 위주의 사고,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문화 등등이 서로 얽혀 독재를 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진화란 한마디로 자아중심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라고 표현된다. 심리학에서 바라보는 인간 인지의 발달을 보더라도 마법적 신화적 합리적  등으로 발전하는데 이것은 나를 버리고 전체를 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顫湧?혼동하는 것은 전단계와 초단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아이가 맨 처음 태어나 생명과 물질을 구분못하다가 그것을 구분한 후 나와 세상의 움직임을 구분 못하게 된다. 즉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 하늘이 화를 낸 것이라는 생각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점차 나와 세계를 구별하고 다시 나 중심으로 바라보다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로 다시 지구촌 그리고 모든 생명과의 합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런 합일이 인간이 맨 처음 태어났을때 생명과 물질을 구분못했던 상태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홀라키가 역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구분의 모호함이 현재의 생택학이 처하고 있는 문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생태학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진화적 발달 상태로 치유하지 못하고 퇴행으로 치유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원적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인간의 정신적 발달을 저해하는 작용을 할 것이라는 관점을 내비친다.

 존엄성이란 다름 아닌 차별화였지만 재앙은 바로 분열이었습니다(225쪽)

즉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있을때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했을 때 비로소 진화의 과정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차별적 처우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현재 우리의 삶이 나나 가족 국가 민족 중심의 사고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데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태적 접근과 함께 정신과 마음에 대한 접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명상이나 요가 참선 등(서구사회에서는 이미 현실 속에 상당히 파고들어가 있다)이 단순히 개인적 평온을 뛰어넘어 참된 아름다움을 깨침으로써 진과 선, 즉 그 아름다움을 펼칠 수 있는 제도적 개선과 함께 문화적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 등의 방법적 측면들로 인한 空이나 靈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지고 상호 주관적으로 교류되어진다면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색즉시공 공즉시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자아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진화는 물론 홀론의 창발적 진화가 그렇듯이 분명 한계상황과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넘는 순간 새로운 홀론을 맞이할 것이라는 황홀한 상상이 우리를 이것으로 이끌 수 있는 자극이 되어줄련지도 모르겠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의 진화라는 측면으로 소화해낸 이 책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성만능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논리적 해법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세상은 제도만으로 또는 마음만으로 결코 바뀌어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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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1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 브라이슨이 쓴 건 뭐였죠...모든 것의 역사...아하..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구나...

하루살이 2005-03-1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도 만만치 않은 두께라 주저주저. 읽고 싶은 목록에는 버젓이 올라있지만 말이죠. 정말 책 제목이 <거의>비슷하죠^^

개미 2005-06-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가다... 이 책은 이 저자(켄 윌버)의 사상에 대한 거의 개론입니다. 좀 더 깊이 알려면 꼭  <Sex, Ecology, Spirituality> 이나 < A Theory of Everything>를 읽어보심이 ... 물론 번역도 안된 영어 원문 1000페이지 쯤 됩니다만, 이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는 있습니다.
 

하루살이 2005-06-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움은 마치 높고 날카로운 삶의 비명과 같다. 아름다운 것들은 처음부터 조용히 자신을 묻고 숨어 살 수 없다. (중간생략) 사람이 아름다움을 염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아룸다움 그 자체,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에 족한 절대의 가치.

미실은 <화랑세기>전반부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신라시대의 정치권을 쥐락펴락했던 색공지신(色供之臣ㅡ 임금에게 몸을 바치는 공양을 통해 임금의 신체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신하정도로 해석할수 있지 않을까)이다. 3대에 걸쳐 임금을 공양하면서 실질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통일의 의지를 갖었다기 보다는 그로 인한 정치적 흐름이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여성의 권력에 대한 상위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주체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듯 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오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미실은 경국지색의 미녀.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사랑에 실패(정작 그녀는 한번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하지만)하기도 하고, 권력투쟁에 휘말려들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만 정말로 이것은 오직 아룸다움에 대한 노래다. 그녀가 권력을 얻은 것도 오직 아름다웠기에 가능한 것이요, 힘든 삶을 살았던 것도 오직 아름다움으로 인한 자초다.

박애란 위선이거나 몽매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미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고 살고 죽는 모든 일에서 그러했다. 어쩌면 천지를 주관하는 신명까지도 아름답고 추하고 행복하고 불행한 일에 지극히 편벽되이 권력을 행사하기 마련이었다. 

이 시대의 삶은 아직 지금과 같은 도덕과 금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갖는 힘을 이용해 주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지언정, 그 아름다움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유뿐이다.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사는 삶이 그녀를 권력의 중추자리로 옮겨놓았다. 오직 이것은 아름다움 덕분이다. 아름답지 않은 미실이었다면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다. 즉 아름다움이 바로 힘의 원천이다. 여성으로서라고 단정지어 주체적 삶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팜므파탈과 다르다. 아름답지만 남자를 파괴한다거나, 권력을 파괴하는 악의 성질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 놓여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다. 몰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황제들의 힘, 꺾이어진 첫사랑, 다시 찾아오는 사랑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실에게 있어서 사랑의 완성이었을 뿐이다. 그 슬픔과 좌절과 희망과 사랑의 모든 감정이 녹녹지 않은 문장 속에서 삭풍에 메마르지 않는 솔과 같은 푸르디푸른 힘을 갖는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미실을 통해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찾아내는지도 모른다. 거리낌 없는 삶을 이루는 그녀의 꿋꿋한 걸음걸음을 찬앙해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도덕률도 싹트지 않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지금의 페미니즘-생태학자들이 주장하는 원시농경사회(우연인지도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도 이런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쟁기와 소를 이용하는 경작법의 발명을 통해 생산량의 증가가 이루어졌다라는 부분은 이제 머지않아 미실과 같은 여성성이 사라지고 남성의 시대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시 농경사회와 쟁기를 이용한 경작의 차이는 농사를 짓는데 있어 근력을 필요로 하는 힘의 시대, 즉 남성 호르몬을 직접적으로 필요한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 대한 동경을 미실은 한 몸에 지니고 있는듯이 보인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미실이 가지고 있다는 낭만적 생각을 품도록 만든다. 분명 그것은 일정부분 참이며, 여전히 우리가 아름다움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동의할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낭만적 이상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미실이 여자로서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라는 평가로 내려져서는 안될듯 싶다. (그녀처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를 바란다는 것은 여전히 황제와 백정의 구분이 있는 사회를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전쟁이라는 잔혹한 힘의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실이 돋보인 것은 이러한 신분이라는 깨치지 못할 계급적 상황에서 맨 상위부분을 차지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를 포함해 당시 힘의 원천은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은 好 不好중 호를 뜻하며, 이는 사람에 대한 引力이요, 따라서 권력을 품는다.

그러나 그녀가 나이를 먹어 이내 삶의 의미를 깨닫는 부분에서처럼, 행복은 권력을 쥐었다거나,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통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그녀는 죽음직전 해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이 모든 것을 함께 해 줄수 있었던 주위의 사람들, 죽음마저도 초탈한 사랑을 해준 설원, 그녀를 이해해준 황제들과 대비들 등등.

외모적 아름다움이 지고나서 주름살이 늘어나서야 비로서 미실은 참 행복을 깨우쳤다. 아룸다움은 힘이자 죄이므로 결코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 사람은 행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미실이 정녕 아름다움을 잃었을 때 비로서 아름다움을 찾았으며, 또 그때 비로서 행복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휘두른 아름다움의 힘에 눈이 멀어 그녀를 동경해서는 안될듯 싶다. 미실이 돋보인것은 금기와 도덕에 휘말리지 않고 권력의 중추에 서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진 말년의 모습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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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03-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제가 욕심이 많은 건가요? 자주라니요!!! 너무나 오랜만이라 언제적 일이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
 

EBS 에서 방영하고 있는 <지금도 마로니에>라는 프로그램은 60년대초 서울대생 3명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학과의 김중태, 불문학과의 김승옥, 미학과의 김영일(김지하). 그리고 동시대의 문화인들 천상병, 전혜린, 임권택, 신중현 등이 나오는데, 특히 앞의 세 주인공들을 둘러싼 고뇌와 그들간의 관계가 가슴을 저리게 만들곤한다.

항상 <죽고싶다>라고 소원하던 김지하에게 김승옥은 제발 죽지말고 살아달라고 말한다. 어렸을적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대한 강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던 김승옥은 진심으로 그가 살아있기를 원했다. 지하는 이 단어를 아마도 가슴 깊숙히 묻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 고향 원주. 이곳에서 그는 막 감옥에서 출소한 장일순을 만난다. 밥 한그릇에 담긴 우주와 밥 한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장일순을 뒤로 하고 김지하는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공산주의에 발을 담갔던 아버지는 <나는 실패자였다>라고 토로하고, 김지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님을 외친다. 그리고 다시 원주를 떠나려 역에 도착할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일순이 전해주는 서예 한 점. 화선지를 펼치면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다라고 쓰여 있다. 김지하는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천리를 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빨리 가려고 길이 아닌 곳을 가지 않는다. 그것이 길임에 바닥을 기어서라도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흙의 냄새를 맡으며 간다. 바닥을 김으로써 손과 발이 모두 흙과 함께다. 바닥을 김으로써 흘리는 땀방울이 땅을 적시는 것을 본다. 바닥을 김으로써 거친 숨의 의미를 안다. 바닥을 김으로써 삶의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렇게 한손 한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기어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간다. 그래서 끝끝내 천리를 가리라.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리라. 결코 잘났다고 까치발을 하지 않고, 결코 잘났다고 자동차로 씽씽 달리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바닥을 기어 천리를 가리라. 남에게, 세상에게 잘난체 말고, 기어 기어 그렇게 천리를 가리라. 온 생명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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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성격을 띤 글입니다.

 

반전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 앞부분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지금까지 전개됐던 이야기들이 반전을 통해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거나, 그 결말로 인해 앞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지면 이내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 영화, 진 핵크만과 모건 프리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언더 서스피션>은 반전으로 인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용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오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륙으로부터 떨어진 섬. 세금 변호사인 진 핵크만은 13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것은 2주전 12살 소녀의 살해에 이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핵크만은 56세때 20살 이었던 모니카 벨루치와 결혼한 사이다. 형사는 2주전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핵크만의 자동차와 또 다시 일어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우연히 겹치는 핵크만을 용의자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에게 심문을 해갈수록, 또 조사를 해갈수록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각방을 쓰고 있는 이들 부부의 불화 원인도 나이 어린 여자 조카에 대한 은근한 눈빛으로 인해 발생했다. 게다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핵크만의 현상실에서 살해된 두 여자아이의 사진까지 발견된다. 심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끝내 핵크만은 살인을 자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은 예상가능한 반전.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핵크만의 범행동기와 증거들로 인해 오히려 불편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통 반전은 그저 하나의 충격일뿐인데, 이 영화 속 반전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가지이나, 그 중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약해지는 자리에, 질투는 자리한다. 그리고 그 질투의 힘은 사랑을 좀먹고, 드디어 파괴시킨다. 영화는 그 파괴성을 드러낸다. 과연 반전으로 드러난 사실로 인해 부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금이 간 사랑을 불량품이 되어버린 믿음이라는 접착제로 부서지지 않게 붙여낼 수 있을까? 산산조각나 버린 사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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