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성격을 띤 글입니다.

 

반전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 앞부분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지금까지 전개됐던 이야기들이 반전을 통해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요소는 없는지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거나, 그 결말로 인해 앞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지면 이내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 영화, 진 핵크만과 모건 프리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언더 서스피션>은 반전으로 인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용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오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륙으로부터 떨어진 섬. 세금 변호사인 진 핵크만은 13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것은 2주전 12살 소녀의 살해에 이은 연쇄살인 사건이다. 핵크만은 56세때 20살 이었던 모니카 벨루치와 결혼한 사이다. 형사는 2주전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핵크만의 자동차와 또 다시 일어난 살인사건의 목격자로 우연히 겹치는 핵크만을 용의자로 생각한다. 더군다나 그에게 심문을 해갈수록, 또 조사를 해갈수록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각방을 쓰고 있는 이들 부부의 불화 원인도 나이 어린 여자 조카에 대한 은근한 눈빛으로 인해 발생했다. 게다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핵크만의 현상실에서 살해된 두 여자아이의 사진까지 발견된다. 심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끝내 핵크만은 살인을 자백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은 예상가능한 반전.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핵크만의 범행동기와 증거들로 인해 오히려 불편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통 반전은 그저 하나의 충격일뿐인데, 이 영화 속 반전은 충격이라기 보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가지이나, 그 중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약해지는 자리에, 질투는 자리한다. 그리고 그 질투의 힘은 사랑을 좀먹고, 드디어 파괴시킨다. 영화는 그 파괴성을 드러낸다. 과연 반전으로 드러난 사실로 인해 부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금이 간 사랑을 불량품이 되어버린 믿음이라는 접착제로 부서지지 않게 붙여낼 수 있을까? 산산조각나 버린 사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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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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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승자가 바뀌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변한다면 그 인물의 성격 또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재탄생하는 인물들이 곧바로 교과서 속으로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도권 밖에서 활약하는 학자들이 펼쳐내는 역사서나, 제도권 내에 있더라도 독특한 관점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접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재미가 솔솔하다.

이덕일 씨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약용과 정조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후반부에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에 그 이야기의 중심을 두고 있다. 특히 노론이라는 집권당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와 그를 보좌해 줄 역량있는 신하로서 남인 정약용과의 관계는 눈물겹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던 해에 태어난 정약용은 그의 향후 행보 또한 사도세자와의 운명적 관계를 유지한다. 화성으로 가기 위한 한강위의 배다리나 화성 축조를 비롯, 처음으로 임금과 접하고서 나누었던 대화 또한 모두 사도세자와 관계가 있다.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것이 권력투쟁과 연계된다는 점에서 항상 피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노론에 대한 견제를 위해 남인 세력중 실력있는 자들을 궐내에 두려했으나 끝내 그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정조의 모습이 특히 애틋하다. 그의 죽음을 앞둔 장면에서 주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한채 스스로 자신의 병을 고쳐야만 했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수가 없다. 또한 이런 왕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항상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정약용의 모습 또한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정약용의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 성균관에 있을때 논어 시험에서 전날 슬쩍 문제를 유출했다가 다른 문제를 내본 정조나, 특혜를 받지않고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험범위 전체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답안을 냈던 정약용의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또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될때 정약용을 감싸주기 위한 정조의 노력과 자신의 무고함을 알리려고만 하지 않고, 왕과 노론과의 권력관계를 파악해 나아가고 물러남을 조절했던 정약용의 외로운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말리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말년에 귀향지에서 약전형과 나눈 편지의 내용이나, 가족들 특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초연함, 그리고 만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동생을 그리워하며 우이도에서 숨진 약전의 모습과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산 위에 서 있던 약용의 모습이 눈에 밟혀 섧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궁금증이 커가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 절대악과 절대선이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어찌 이 책속에선 노론은 절대악이며, 남인과 정조는 절대선으로만 보여지는가? 물론 이런 명확한 구분을 바탕으로 책을 써 나가는 것, 정약용의 입장에서 그를 위한 변명이나, 그의 자전마냥 써내려가는 것이, 독자들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노론은 그야말로 절대 악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커진다. 저자가 정약용을 대신해 변명한 많은 것들이 어찌보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천주교 박해때 끝내 비밀을 지키지않고 발설하는 장면, 지방관리로 있을때 권력서열을 무시하고 직접 왕의 비호를 이용한 정책들, 왕세자의 병환을 구해내지 못한 것 등등 노론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같은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정약용과 정조의 거대한 1당 독재에 대항하지만 어찌해볼 수 없는 숙명에 슬퍼하면서도, 한편 노론은 왜 그다지도 폐쇄적인 모습으로 끝끝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들었는지에 대한 알고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들이 진정 절대악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사족: 최근 토지 소유자 상위 1%가 전체 국토의 47%를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땅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주어진 자연이라는 것을 빌려 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것 같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투기라는 바람을 일으켜 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돈이라는 화폐를 증식시킨다는 점에서 화가 난다. 그래서 차라리 이 시대에도 이익의 균전제나 정약용의 여전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어떨까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해본다. 땅은 땅을 가는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을 지킬 수 있는 사회. 공산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만, 노자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헛된 꿈을 한번 꾸어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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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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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다치바나가 도쿄대 교양학부 강의시절에 했던 강의 내용을 새로 고쳐 활자로 내보인 것이다. 책의 주된 테마는 세계 지식의 대충 훑어보기정도가 되겠는데, 특히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지의 스펙트럼을 경험해야 할 것과 그 스펙트럼의 넓이를 보여주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지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근거로 다치바나는 뇌에 대한 연구자료들을 내놓는다. 생명체들은 감수성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대상을 어머니로 인식하듯, 일정시기에 접하는 것들이 평생의 경향을 좌우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예로써 고양이의 눈을 가리고 행하는 실험이 있는데, 어렸을 적 한쪽 눈을 가린 고양이는 그 시력을 통해 이뤄지는 뇌의 작용이 활성화 되지 않게 되는 반면, 다 큰 고양이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이것은 뇌의 작용(지적인 것이든, 성격과 관련된 것이든)이 어떤 일정 시기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며, 이 시기를 감수성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 발달을 좌우하는 뇌의 시기가 바로 20세 전후이며,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다양한 지의 스펙트럼을 만나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스펙트럼의 다양화를 외치면서도, 특히 자연과학 분야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놓여져 있는 사회가 과학분야를 근간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양자역학과 분자생물학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상. 따라서 세상을 바로 이해하고, 그것에 그치지않고 세상에 주역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연과학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학이 이런 중요한 자연과학에 대한 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의 또다른 책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등에서 이미 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계속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찌된 것이 정말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런 지식, 즉 교양이 필요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더 강하게 든다. 분명 신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인간복제나, 환경, 에너지 문제등과 직면해 있고, 그런 기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에 대한 밑바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또는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따르던가? 하는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런 자연과학적 지식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는가, 그리고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 그 사람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주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든단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듯 보이는 자연과의 합일점을 찾는 삶이 보다 행복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발전하는 것인가나 행복이란 무엇인가 와 같은 철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전제되어야 할 듯 보이지만, 아무튼 교양인의 소양이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 되어줄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저 지적유희라고 한다면 또 모를까? 세상을 한눈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며, 앞으로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재미말이다. 따라서 이 책 제목이 말하듯 뇌를 단련하는 의미는 교양인으로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적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승급쌓기 정도로 이해되어진다.

반쪽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반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마음에 딴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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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외지사 1 - 우리 시대 삶의 고수들
조용헌 지음, 김홍희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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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방외지사란 쉽게 말해 월급쟁이 말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그 분야에서 고수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연금탈수 있는 한계까지만 월급생활하고, 시골로 내려와 그림그리며 사는 박태후씨,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싣고 산을 떠도는 이원규씨,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씨, 품영가 손성구씨, 역술가 박청화씨,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 곽종인 씨 등 13인의 삶은 샐러리맨이나 사업가 들과 달리,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하지 않고, 일정한 돈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입에 거미줄 칠까 조마조마하며 살아가지 않고, 그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순간순간 회사 그만 다녀야지 하면서도 끝끝내 월급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이들은 그야말로 풍류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풍류는 방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서야 존재한다.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마치 정답인마냥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벽에 갇힌 잠잠한 바람이 아니라,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태풍처럼 격류하는 바람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이 결코 인생의 유일한 답이 아님을 보여주고, 기상천외하다거나, 오답일 것처럼 보이는 갖가지 인생살이 속에서 인생은 오직 한가지 답만을 가지고 있지 아니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자리보다 남의 자리가 부럽듯이,방외지사들의 삶이 행복한듯 보여도, 그들의 삶 또한 얼마나 신산스러웠는지를 감춰진 글 사이사이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비록 그들이 먹을게 없어서 굶주려 죽지 않는 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하나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부분은 저자의 인터뷰 밑바탕엔 사주팔자와 풍수의 사상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 말이 막히거나, 또는 글의 서두를 풀어갈 때 상대방의 생시나,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한 풀이로 글과 말의 얽힘도 풀어간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선 우리가 방외로 보는 그들의 삶이 어찌보면 타고난 길이라는 운명의 방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들의 삶을 부러워했다. 어찌됐든 그들은 그들이 살고싶은 대로 산다. 그리고 그 마음대로 사는 것이 타인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큰 도움이 되어준다. 굶어죽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안전에 대한 욕구를 뛰어넘는 그들의 용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을지라도...

방외지사 이들의 삶을 나는 한마디로 표주로 표현하고싶다. 화산파 장문 곽종인씨가 3년간 행했다는 수련의 과정이 표주다. 수중에 돈 한푼 없이 세상을 떠도는 것이 표주다. 마음의 공부를 다하고, 몸의 공부를 하기 전, 그 사이에 행했을 때 효과가 큰 수련법이라는 표주. 돈 없이도 굶주리지 않을 수 있는 여행. 표주를 행할 수 있는 능력만 지닐 수 있다면 이 세상 두려울게 아무 것도 없을 것 같다. 언제 나는 빈털털이로 나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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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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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매력은 그것이 끝없이 변주된다는데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수에 대한 테마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그 절정기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몽테크리스토의 변주일뿐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호학을 밑바탕으로 하고, 역사를 얼개로 해서 그려낸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은 움베프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현대적 의미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다빈치 코드>는 여러모로 보나 이 <장미의 이름>의 변주곡이다. 변주가 꼭 질의 낮음을 의미하거나 원본의 복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주는 변주 자체로 훌륭한 음악이 될 수 있다. <다빈치 코드>또한 이런 훌륭한 변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진다.

<장미의 이름>이 엄숙함과 권위에 파묻힌 당대의 종교적 독선과 편견을 비극으로 표현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희극으로 나타냈듯이, <다빈치 코드>는 예수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준다. 이것 또한 남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종교적 권력에 대해 여성성을 드러냄으로써 편중된 힘에 대해 균형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여성성의 드러냄이 이 소설의 전체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드러냄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예시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다. 소설을 읽는 도중 정말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작가가 설명한 대로 일까 하는 궁금증에 잠시 책을 접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펴든다. 그리고 찾아보는 다빈치의 그림. 도판의 그림 자체가 워낙 희미해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얼핏 예수 오른편의 인물이 매우 여성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순간 찾아오는 전율.

<다빈치 코드>는 같은 작가의 전작 <천사와 악마>보다는 조금 재미가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남성과 여성, 음과 양의 조화에 대한 추구,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감추어지고 왜곡되어지는가에 대한 관찰은 역사가 왜 승자의 기록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퍼즐맞추기 식의 조롱 비슷한 다빈치의 장난등을 보면서, 다빈치를 그리는 작가의 시선이 정겹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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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5-02-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른 것 같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이제 SF영화계의 '스타워즈'요, 갱스터 영화계의 '대부'가 된 듯 싶습니다. ^_^

하루살이 2005-02-2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도 추리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면 더할나위 없을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