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라고 할만한 내용 있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 것일까? 아니면 메트릭스와 같은 사고의 유희?

액션을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할 영화다. 두세장면 조금 눈요깃거리가 있을뿐 화려함은 없다. 섬세함도 없다. 더군다나 영화 속 지옥에 대한 묘사는 차라리 기대를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같은 지표면에선 화면만 타오를뿐이지 그곳에 나오는 생명체들은 멀쩡하다. 그리고 도대체 그것들은 지옥의 개도 아니고 무엇을 묘사한 것일까? 기독교에 대해 문외한이다 보니 저것이 과연 성경 속 지옥인지, 불경 속 지옥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겠다. 어찌보면 터미네이터의 미래 모습같기도 하고... 도대체 그 지옥같지 않은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아우성대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실망말자?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있으니?

세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데, 갑자기 그 균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현세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되는 악마들이 세상 속으로 튀어나오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퇴마사로 콘스탄틴이 등장한다. 콘스탄틴은 오직 자신의 천당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의 눈밖에 난다. 자기 희생이 없는 한 천당은 절대 갈 수 없다는 협박까지 받는다. 그리고 끝내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악마의 아들을 세상 속에 불러내려 한다.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야 비로서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비뚤어진 생각으로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그려본다.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아무 거동도 않는다. 다만 마지막,  악마 루시퍼가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할 때 나타나 천당으로 이끌려고 한다. 마치 사람을 놓고 쟁탈권을 벌이고 있는듯이... 그러고 보면 선과 악은 이미 균형상태가 아니다. 루시퍼는 힘없이 신에게 자신의 노획물(콘스탄틴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을 빼앗기고 마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만 당할수 없다는 자세로 루시퍼는 감히 '애비도 몰라보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콘스탄틴을 천당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살려두고, '나중에 너 어떻게 되나 보자' 라는 심보를 부린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인 마냥. 지옥도 천당도 현세도 인간의 의지로 선택되기 보다는 신과 악마의 밀고 당기는 놀음에 좌지우지되는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여기에 재미를 더하는 것은 가브리엘의 능청맞음이다. 거봐라, 콘스탄틴. 네가 이렇게 변하고 있지 않는냐? 오직 자신만을 위하던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 희생을 이뤄내지 않는냐? 이건 모두 다 내가 세상을 악마의 지배로 이끌려고 한 나의 덕분이다. 말같지 않은 자기 변명. 아~ 아마도 이것은 지식인들에 대한 비꼼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비겁한 자기 변명입니다. 라는 실미도의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는 장면이다.

오호 그렇다면 이 영화는 콘스탄틴의 자기희생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런 자기희생이라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지만 말이다. 결국 사랑은 위대한것? 영화가 끝나면 바라는 것은 제발 둘이 균형을 이루어 저 세상에서 살아갈뿐 이곳에선 관심도 두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담배를 피워 폐가 시커멓게 된 콘스탄틴이 끝내 담배를 빼어 물든 말든 가만 놔두라. 그리고 그런 후에 어디로 데려가든 신경쓰지 않을련다. 악마를 천당으로 보내니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곳을 따로 염두에 두지말고 살아보자고 말이다. 현세가 이미 천당도 지옥도 모두 갇추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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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2-2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이 영화를 교회홍보, 금연공익광고, 금주공익광고 라고 보죠. ㅋㅋ

하루살이 2005-02-23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트릭스의 네오가 금연홍보대사로 나섰다는 설도..^^
 
짚 한 오라기의 혁명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한살림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한마디로 자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이란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고 해서 숨쉬기조차 거부한다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아무 것도 하지말라는 의미는 인위적인 것을 하지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방임과 구별해야만 한다.

자유와 방임의 차이는 과수 작물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무가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가지치기를 했을 경우, 그 이후 나무에 손을 대지 않게 되는 경우엔 모두 고사해버린다. 반면, 어렸을 적부터 자연그대로 커온 나무는 스스로 잘 자란다. 병충해도 없고, 농약도 비료도 그외 잡다한 작물 기술도 전혀 필요없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교육에도 도입된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안다. 새소리와 물소리 등을 음악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에 잡음이 끼어든 순간 어린이의 귀는 혼돈을 일으킨다. 그래서 음계를 배워야 하는등 처음부터 다시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해야만 한다. 진짜 음악이 사라진 자리에 인위적인 음악이 들어선다.

저자는 이런 자연과 방임, 또는 인위적인 것과의 차이를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이며 증명해보인다. 25살 이후 40년간 자연농법을 통해 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농법보다 우수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쌀과 보리를 연이어 지으면서 땅을 갈아엎거나, 제초제, 비료 등도 쓰지 않고, 오직 추수할때의 짚만 땅에 흩뿌려 둠으로써 이 모든 작물들을 풍족하게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 농사법에선 잡초도 없다. 잡초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잡초라고 여긴 그 모든 것들이 수확하고자 하는 작물과 공존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즉 천적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거름이 되어주기도 한다. 풀과 벌레가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는 평화적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농기계를 도입하고 비료를 뿌리고 제초를 하며, 농약을 치는 것일까? 증산이라는 목적이었다면 이건 거짓말임이 저자의 40년 농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무엇? 아마도 맛의 질을 높이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철이 아닌 때도 마음껏 즐길 수 있고, 보다 맛좋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종자를 개량한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맛을 즐기기 위해 쌀의 껍질을 벗기고, 하우스를 짓고해서 생겨난 것들이 진짜 맛이 있을까? 영양도 맛도 상실한 그 거짓된 것에 사람들이 중독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렸을 적 가지치기를 당한 어린 나무와 같다. 그래서 자연스런 맛을 잃고 인위적인 보살핌이 죽을 때까지 필요하게 된다. 물론 농기구나 제초제, 비료와 같은 석유관련 사업들의 팽창으로 인한 압력 또한 무시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3인 가족이 1500평이면 자급자족하고도 남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는 목표를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삶은 아무 목표도 없이 그저 삶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즐거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개개인 각각은 물론 이런 삶을 영유하고 싶어하고, 또 영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유토피아일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람이 하나 둘 모여 조직이든 공동체든 어떤 모습을 띠는 순간, 개개인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 즉 안주하는 삶보다는 모험을 택하는 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기생자, 즉 무임승차라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모두가 평화롭게 자신의 땅을 일구면 좋을테지만 착취하는 자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그 착취여부를 떠나서 안주하는 삶을 택하지 않고 돌아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안주하고 싶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실은 불가능한 혁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성스러움에 절절매지 않고, 목표를 향한 절대 의지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도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증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게 된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거나 자연과의 합일 등의 묘사 자체도 거추장스럽고, 그 원뜻을 상실케 할 정도라고 생각될만큼 청정한 삶이 가능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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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체험 상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중 사후세계만큼 강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 이후의 세계이기에 그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후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현세에 있지 아니하기에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죽음 바로 직전에서 살아난 사람들중 그것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카시는 이런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정말로 이것이 실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이것이 진짜 사후세계라는 가정을 했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다. 문화적 배경이나 사람 개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후세계라는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수만큼의 세계가 각기 존재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공통적으로 한단 말인가? 하나의 설명방법으로서 뇌의 환각을 들고 있다. 저산소로 인한 엔돌핀 증대로 환각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터널이나 빛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으로는 인간이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했을 경우 느끼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설명이 임사체험에 가장 근접한 듯 보여지지만 이것 또한 빛과 터널에 대한 설명을 말끔히 해내지 못한다.

이런 임사체험과는 별도로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그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어떤 힘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힘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 반대편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죽음을 통해서 빛으로 분산됨으로써 에너지 불변은 유지하되 사후세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책은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을 공통된 요소와 그렇지 못한 것들로 분류하고, 그것의 신빙성을 얻기 위한 여러가지 실험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사후세계가 아닌 뇌의 환각임을 증명하기 위한 갖가지 실험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책을 끝맺음하지만 무모한듯 보이던 임사체험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했다. 게다가 책이 전하고 있는메시지를 들여다보면 더욱 이 책에 끌리게 되는 점이 있다.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밝고 활기찬 것이든 어둡고 공포스러웠던 것이든, 진짜 사후세계라고 믿든, 그저 환각이라고 생각하든, 모두가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후세계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위한 삶으로의 경이적인 태도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임사체험을 경험해보기 위해 유사체험을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할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카시가 직접 체험했던 캄캄한 탱크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꼭 그것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삶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숨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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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스의 산 I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76년 한 가족이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 10살짜리 아이는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아서 4시간이나 되는 산길을 걸어 사람들에게 발견된다. 그즈음 그 산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삽으로 사람을 때려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8년 살인을 저질렀던 노동자는 절도범으로 몰려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자살가족에서 살아남았던 아이는 정신병동에서 간호사를 죽여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3년후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 발견되는 시체, 그리고 또 하나의 시체...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피해자들은 오직 똑같은 무기로 화를 당한 것 같다는 단서만을 가지고 범인찾기는 시작된다.

이 소설은 다른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확하게 범인이 누구라는 것은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범인의 심리상태를 보여줌으로써 불안감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하나 이 소설의 매력은 사건의 동기와 개요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지고 나서도 소설의 재미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해자이면서 피의자로 남아있는 마지막 인물과 형사간의 설전을 통해 사건이 어떻게 변형되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사실에 접근했던듯한 사건은 조금은 다른 결과를 남겨두고 끝내는데, 과연 범인에 대해서 독자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것인지를 의문으로 남겨둔다.

천인공노할 살인자인지, 아니면 끝내 자신의 정신병을 극복못한 가련한 사나이인지 혼란스럽다.

고다(사건을 맡은 형사다)는 범죄의 동기와 범인의 인격을 성장과정에서 설명하거나 조리에 맞추려고 하는 것을 극력 피하는 주의였다.(161쪽)

그럼에도 범죄자에게 조금의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인격이 분명 성장과정으로 인한 것이라는 추측과 생태적 결함, 즉 유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수사요원도, 아무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범죄라고 미토 가도를 걸으면서 혼자말을 했다.(188쪽)

소설의 주된 배경인 산.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는 이유가 아니라 작가는 죽음을 통한 생의 의지로서 산에 오른다고 말하는것 같다. 구원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버팀목이 될 수 있는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참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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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조금 지루했다. 그의 71년 인생 중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 몇년을 너무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지우지 못하겠다. 물론 주인공에 대한 이런 상세한 묘사가 그의 집념을 잘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심했다 싶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성격은 어렸을 적 어머니의 교육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아래 진행되는 그의 꿈은 결코 쉬운 길을 선택한 법이 없었다.

지옥의 천사라는 영화를 위해 쏟아부은 천문학적 돈은 문제가 아니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뒷 배경의 구름을 위해 8개월이라는 시간을 기다린다거나, 무성에서 유성으로 영화를 다시 찍는 등 그의 열정은 보통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특히 비행기에 대한 그의 집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워드 휴즈라는 실제 인물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돈이나 권력 따위엔 관심도 없고 오로지 가장 빠른 비행기에 온 정신을 빼앗겨 있다. 중간중간 불안한 그의 모습 속에서 언뜻 언뜻 비쳐지는 천재적인 발상에 놀라기도 한다. 그의 이런 신경증적인 모습을 디카프리오는 정말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연기해내고 있다.

그러나 조금은 지루하다 싶은 이런 전개는 실상 마지막 청문회의 모습으로 집약시키기 위한 의도된 것이라는 의심을 가져본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하나둘씩 현실로 이루어진 모습에 희열하다가도 그의 흔들리는 정신에 불안해하던 모든 것들을 마지막 15분동안 말끔히 씻어낸다. 영화 중간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 몇 장면들은 청문회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더구나 그의 순수성을 증명해주는 비행선의 모습은 전율마저 가져온다. 그러나 이런 전율을 위해 2시간 넘게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내하기엔 조금 버겁다.

다만 남들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보이는 무모한 것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의 주인공은 마치 휴즈를 두고 말하는 것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계산없는 열정. (여기서 중요한건 <계산없는> 이다.) 아무 것도 그의 꿈을 가로막진 못했다. 그것은 순전히 계산하지 않은 그의 열정 덕분이다.

무모함과 열정은 종이 한장 차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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