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중 제일 재미있게 본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입니다. 나이를 먹고서도 절대 늙지 않는 감독의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3년 만에 내놓은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녀가 마녀의 저주로 할머니로 변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모험담이라고 짧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센과 치히로 보다는 다소 웃음이 준 것 같습니다. 대신 마법은 보다 풍성해졌고요. 음악은 역시 짱입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정말 만화와 똑같이 환상입니다. 심금을 울리죠.

주인공 소피라는 소녀와 함께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구성하는 것은 하울이라는 미소년 마법사입니다. 어렸을 적 캐서피(?)라고 했던가, 악마의 불씨를 삼키고 심장을 내놓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심장을 내놓는 것이 양심을 판다거나 악마로의 변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전쟁에 대한 반대, 사랑의 아름다움, 나이 먹는다는 것의 의미 등등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계속해서 추구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보다는 소피가 하울에게 심장을 돌려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울은 심장을 받은 후 그 무게에 힘겨워합니다. 마음은 그만큼 무거웠던 것이죠.

하지만 그 무게말고 하울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하울은 마음을 받기 전에도 착했습니다. 마음을 줄 상대가 없을 뿐이었지만요. 실은 그런 것 같습니다. 꼭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세상에 온정을 베푸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냥 무감각하게 착할 수도 있습니다. 하울처럼 말이지요. 사랑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꼬마아이의 모습을 보면 하울이 과거에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무거워진 마음은 어떻습니까? 심장이라는 마음을 전해받은 하울은 그 전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또는 달라질까요? 혼자 상상해봅니다. 때론 그 마음이 무거워 힘에 겨워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마음이 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을겁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껍질을 벗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좋은 건지, 행복을 줄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거워진 만큼 분명 삶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깊이 가라앉듯 말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더라도 불처럼 그렇게 환하고 크게 번질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어두운 삶을 환히 밝혀줄 수 있을테니까요. 비록 그 모습이 추할지 아름다울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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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대한 느낌은 정말 십인십색인가봐요~ 님은 하울의 마음에 뽀인트를!!

잘 읽고 갑니다!!!

하루살이 2004-12-3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넘게 사랑해 온 감독의 작품. 알고보니 어렸을 적 코난부터. 그럼 20년도 훨씬 넘게 애정을 갖었던 것이죠. 정말 놀라웠죠. 나우시카 라퓨타 토토로 키키 붉은 돼지 ... 잊어버릴 수 없는 캐릭터들. 그래서 이제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집착하려 합니다. 때론 이것이 영화를 즐기는데 방해가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언제나 실망시키는 법은 없었으니까요
 
약속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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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생이 추리소설 같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사필귀정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은 삶이라니. 1+1=2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의 삶은 단순하지만 명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우리네 인생이 그러던가? 느닷없이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또는 우연한 만남 때문에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리기 일쑤다. 잠깐 한발자국만 떨어져 바라보면 그런 삶이 재미있을련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무미건조한 일상보다는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이나 환상, 모험들을 쫓아 나서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괴로울 뿐이다. 거의 미쳐버릴만큼. 거의 손아귀에 잡을 만큼 쫓아간 그 무엇이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듯이 우연은 그렇게 순간 불어와서 우리네 인생을 날려버린다.

소설은 천재적인 한 경감의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천재성이 결국 인생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미치광이로 고꾸라지는 비참함만 드러낸다. 빨간 치마를 입은 어린 소녀의 연쇄적인 죽음. 경감은 그 패턴을 이해하고, 함정을 만든다. 기어코 걸려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 덫. 하지만 경감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거기엔 누구도 예상못한 우연한 사건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겠다는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누가 되었든. 아~  알고보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이 책 속에선 약속 말고도 <사고>라는 단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사고>또한 우리의 사고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고를 일으키는 재미를 준다. 세일즈 맨의 자동차가 멈춰 서버리자 그는 하루를 인근 마을에서 보내기로 한다. 젊은 여자를 생각하며 모험심에 가득차 마을로 향하지만 여관은 이미 만원이다. 그래서 향한 곳이 민박(?). 주인은 은퇴한 판사. 집에 찾아온 친구들은 검사,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이들과 재미삼아 재판을 받는다. 자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살았다며 자신하는 주인공. 포도주 한 두 잔이 창자 속을 파고들면서 호기가 발동한다. 자기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일즈계의 규칙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좋은 차도 얻고 승진도 했다. 물론 이런 초고속 승진은 상사의 죽음으로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지만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검사의 추긍으로 점차 상사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세일즈맨의 고도의 책략으로 발생한 살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세일즈맨은 끝끝내 자신의 순결을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행동들이 과연 순수했는지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세일즈계의 도리를 다한 삶 그것 자체가 이미 문제를 발생할 여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무결하다고 주장해도 그가 걷고 있는 길 자체가 이미 피로 이루어진 길이라면 그의 온 몸은 이미 피투성이일 뿐인 것이다.

세일즈맨의 심리적 변화를 쫓아가는 것은 흥미롭지만 섬뜩하다. 지금 내가 무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길이 이미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도덕적인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현대의 이런 경쟁사회 속에선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음흉한 웃음이 내 가슴 속에서 몰래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양분은 무죄다. 그러나 그 열매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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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미스터리 북스 6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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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을 읽다 단서를 찾을 때만큼 기쁠 때도 없다. 분명 이것이 감추어진 사건을 들춰낼 무엇인가로 작용할 것이라고 직감하고 나서, 그것이 탐정에 의해 설명되어질 때, 내가 비록 그것을 설명하진 못했어도 단서로 작용했다는 것을 맞췄다는 것만으로도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설들은 이내 독자들이 사건을 쫓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저 지적게임의 방관자로서 지켜보는 재미만을 주기 십상이다.

그러나 크로프츠의 통은 독자가 중간에 자포자기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화물선에 실려온 통 속에서 발견되는 시체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 책은 초반부 형사들을 통해 이 사건의 단서들을 쫓아간다. 그리고 단서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중간 정리 형식으로 서장과 형사가 모여 토의를 벌린다.  그 토의 과정은 마치 독자를 옆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듯 해서, 내가 사건과 따로 떨어져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해결해야 할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초대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소설은 3부에서 사건을 바로보는 시각을 달리한다. 즉 이번엔 범인으로 몰렸던 인물을 변호하는 변호사와 사립탐정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단서들을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찾아내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되풀이되는 단서들이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보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사건 전체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힌트가 무엇인지를 저자와 똑같은 호흡으로 맞이한다. 소설 중간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 속의 인물들과 함께 해결해 갈 수 있는 의지를 남겨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최고 장점이 있다고 하겠다.

독자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있지 않는 주인공들로 인해, 즉 독자와 평등한 입장의 주인공들 때문에 소설은 마치 즐거운 게임이나 퀴즈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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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추리 소설에 골몰하신가 봅니다~!

단서 만이라도 맞추었을 때의 희열... 알만합니다~ ㅋ

하루살이 2004-12-2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솔로들의 생존법 중 하나라고 할까요?^^

1주일서 열흘가량 겨울잠도 잘 수 없고 말이죠. 방법은 그냥 만사 잊게 만드는 무엇에 집중하는것. 추리 소설이 최고 아닐까 해서ㅋㅋ
 
가짜 경감 듀 동서 미스터리 북스 80
피터 러브제이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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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은 뭐니뭐니 해도 사건이 중심이다. 아니면 그 사건을 요리조리 해결해 나가는 수퍼 액션 히어로 탐정이던가. 그런데 이 추리 소설은 조금 생뚱맞다고 할까? 주인공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이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데 책의 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보통 추리소설은 사건이 터지고 주인공이 그 범인을 잡아가는 형식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이 책은 범인이 등장하고, 그(그들)의 범행동기에서부터 범행순간까지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탐정이 등장해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갑자기 모든게 뒤바뀐다. 범인이었던 인물이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경감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즉 범인이면서 그 범인을 쫓는 형사로 주인공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하나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도대체 우리는 그 주인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잡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맡고 있는 사건 또한 그가 해결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부지불식간에 갖게 되는 것이다.

즉, 가짜 경감 역할을 하던 범인이 과연 정체가 탄로날 것인지 두근두근 거리면서 지켜보게 되고, 과연 그가 새로운 사건을 잘 해결할 수 있을것인지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새로운 범행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 마저 갖게 만들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한 주인공에 대한 이렇게 다중적인 마음을 갖게 만든다는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주인공에 대한 캐릭터만의 매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소설 도입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그냥 에피소드로 그치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는데서 뒤통수를 치게 만든다.  채플린의 금의환향, 그리고 실제로 일어났었던 어뢰에 맞고 침몰하는 유람선 사건.  그 사건 들 속에 살짝 픽션을 가미한 후 소설은 본격적인 무대로 옮겨져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자(나)는 도입부 이런 묘사들이 그냥 시대적 배경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단순히 넘어가게 되는데 사건 종결 부분에서 앗차 하고 머리를 치게 된다. 추리 소설이 그렇듯 그냥 씌어진 대목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아무 상관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넘긴 밑배경들이 실은 이야기를 완결시키는 중요한 키포인트가 된다는 것에 무릎을 치고만다.

주인공에 대한 애증 속에서 찾아오는 엔딩.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그냥 이대로 끝내도 될까 라는 미련이 남는, 재미가 솔솔 넘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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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anafish 2006-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별로 반전에 반전을 꾀하는 추리소설형식은 아니라고 해도...좀..스포일러성 리뷰아닌가요??

하루살이 2006-01-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굉장히 주의 하면서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추리 소설을 많이 읽으신 분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되는군요. 그래도 답은 말 안했으니 용서해 주시죠^^
 
독 0-157 1
로빈 쿡 지음, 서창렬 옮김 / 열림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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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쿡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 책 또한 의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한 때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O-157에 대한 원인과 그것의 위험천만한 실상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위험성은 최근 <수퍼 사이즈 미>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다시 논쟁이 일고 있지만, 이것은 패스트푸드가 안전하게 만들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패스트푸드는 그 제조과정에서 이미 맹독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유명한 심장외과의 주인공은 어느날 딸과 함께 외식을 한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딸은 식중독 증상을 보인다, 이내 O-157에 감염된 HUSS 상태를 나타내고 결국 죽게된다. 주인공은 딸의 죽음에 분노하고 그 원인을 파헤치려 패스트푸드점과 고기 패치를 만드는 곳, 그리고 고기를 제공하는 도살장 등에 몰래 들어가 이유를 밝혀보려 한다. 그리고 농림성과 축산협의 커넥션 등, 패스트푸드라는 산업 뒤에 감추어진 추악한 이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과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숨막히게 전개되면서 책 읽는 재미를 솔솔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가지 불만인 점은 이것이 추악하고 거대한 이권의 거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음식이 가져올 수 있는 전 지구적 차원의 시각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패스트푸드가 분명 미국의 음식이며 그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절대 무시못할 측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의 딸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은 우연한 실수의 연속 때문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다. 도살 과정의 실수, 즉 잘려진 소머리가 공장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그 고기로 만든 패치가 패스트푸드점에서 쓰여질 때 조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겹쳐지는 바람에 잘 구워지지 못해, 결국 O-157 균이 살아남아 독이 퍼져나갔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잘못 조리되어졌을 때 목숨에 치명적인 독을 지닌 복어를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핑계거리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해 미국에서만 500명이 O-157로 죽는다는 것은 이런 실수가 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이것은 이미 실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도살과정에서 쓰여지지 않아야 할 부분이 최대의 이익을 내기 위해 쓰여지고, 비위생적인 처리과정상의 문제점, 그리고 마지막 패스트푸드 상점에서의 불성실함이 결국 가져오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과정이다. 실수가 우연히 겹쳐 일어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온에서도 죽지 않는 광우병 인자는 그것이 10년, 30년 후에나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 원인규명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패치로 만든 햄버거를 먹고 30년 후에 광우병에 걸리더라도 우린 전혀 그 원인을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싼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서 열대의 우림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소들이 들어차게 되며, 이것은 원주민(미개인의 뜻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자급자족적 경제를 무너뜨리고, 환경파괴를 가져온다. 게다가 물부족이라는 커다란 우를 범하는 것 또한 염려해야만 한다. 게다가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로 키워지는 동물들은 인간의 몸에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갖는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며, 건강 자체를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대량생산속에 놓여진 소, 돼지들의 삶은 도덕적으로 보지 않더라도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다.

근원적으로 패스트푸드는 잘못되어진 음식이다. 그것이 축산협과 정부의 밀약으로 더욱 교묘하게 우리 생활 속에 침투되어지고, 의학계의 방관으로(아픈 사람이 늘어나면 누가 이익을 볼 것인가) 아무 의심없이 한 끼 식사로 대체되어지는 것인지는 확실하게 그 사실여부를 알 순 없다. 소설 속에서나 그려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 때문에 무차별적인 죽음으로 초대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 이 소설은 경고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무서운 공포 소설이다.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독인줄 알면서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설은 바로 그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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