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19일 날씨 너무너무 좋음
비온후 갠 하늘. 정말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산에 오른 기억중 이번처럼 맑은 날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다. 전날 많은 비가 쏟아져 사실 산에 올라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비가 너무나도 맑은 하늘을 선물해 줬다.
지금 당장 힘이 들더라도 그 기간이 끝나면 분명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듯 말이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산에 안개가 덜 걷혔다. 법주사를 둘러보는데 그 광경이 사뭇 범상치 않다. 부처는 세상을 향해 서 있음을, 비록 속세를 떠난다는 뜻의 속리산이지만, 불상은 그렇게 세상을 향해 있는것 같다. 시름을 잊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때 금불처럼 빛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서서히 문장대를 향해 오른다. 문장대 오르기 20분전은 정말 힘들다. 어느 산에서나 만나는 깔딱고개. 그러나 숨을 깔딱거리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선다. 그리고 분명 산은 그 흘린 땀만큼의 아름다운 전경을 선사한다. 특히 이처럼 맑은 날씨엔 모든 고통이 사그라든다. 그저 맑은 하늘만으로도 세상의 시름은 모두 사라지거늘 왜 난 그토록 시름시름하며 살아갔던 것일까?
다시 길을 나서야 함에도 다리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대로 그냥 몇시간이고 있었으면 좋겠다. 자연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훔쳐간다. 그렇다고 영원히 훔쳐가지는 않는다. 또 다시 훔쳐갈 마음을 쥐어서 내려보낸다.
능선을 따라 신선대, 그리고 경업대로 내려선다. 경업대는 속리산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이라 10분 정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발아래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심산계곡. 임경업 장군이 7년간 도를 닦을 만한 곳임을 온 몸으로 실감한다. 고개를 들면 천황봉과 신선대가 모두 보인다. 그리고 발 아래 까마득히 펼쳐져 있는 나무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두 섞여 들어 나의 몸으로 가득차온다. 여기서도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올라섰으면 내려서는 법.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엔 관음암. 바위 사이로 난 틈을 따라 길을 쫓아가면 관음암이 나온다. 아주 조그만 암자. 그야말로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중은 산 속으로 들어갔으나 그 뜻은 분명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자연과 내가 서로 하나이듯이 세상과 나 또한 하나임을 다시 깨우친다.
바위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제 온 비로 온 산이 물을 머금고 있다. 그 물 밑에 얼굴을 댄다. 차가운 물은 땀을 식히고 발아래까지 흘러간다. 잠시 그 촉감을 느끼며 서 있는다. 그리고 또 한걸음 아래로. 10년전 머물렀던 비로산장을 지나 세심정, 그리고 다시 법주사까지, 산은 쉽게 나를 내보낸다. 자 이제 힘을 얻었으니 어서 속세로 돌아가라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