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 <곽재구의 포구기행>

조금 외로운 것은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다.(P38)

존재의 비상. 그것은 쓸쓸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 아니겠는지요(P176)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씨는 저녁6시 이후에 약속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그 자신만의 시간이란 대부분 독서와 사색을 의미하는 것일게다.  아마 피해야 했던 약속의 상대로는 TV나 라디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롯이 혼자만이 대하는 자신과의 대화. 그 속에서 사람은 성장할지도 모른다. 외롭고 쓸쓸함은 나의 영혼이 자랄 수 있는 거름이 되줄 것이다.

날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즐거운 날들을 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지 모른다. 사람들과의 대화속에서도 반성하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돌이켜보라. 1년 365일을 그렇게 보낸다면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쓸쓸하고 외로워야 떠나지 않겠는가? 나의 영혼을 찾아서 말이다. 물론 그 여행은 굉장히 외로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때론 둘보다 하나가 되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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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님의 "[퍼온글] 천 상병님의 '강물'"

사진이 참 좋습니다. 아니 혹시 그림인가요? 물이 고요하군요.
바다로만 흘러가는 강물이라기 보다는 내 마음속에 고요히 머물러 있는 호수같습니다.
내가 온종일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마음깊이 감추어둔 호수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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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떨어지는 요즘, 부고도 없이 가버리는 요즘, 상여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요즘, 김광석 노래를 자주 듣습니다. 잠이 들기전 꼭 그의 CD를 틀어놓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슴 한 구석에 쓸쓸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김광석의 노래는 그런 나의 영혼을 위무합니다.

비디오를 빌려왔습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아,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도 쓸쓸합니까? 살아가는게 그렇게도 쓸쓸한 일인가요?  정호승 시인이 말하듯 외로우니까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책을 펼칩니다. <곽재구의 포구기행> 시인은 여행의 쓸쓸함을 그대로 전해주는군요.

마치 운명같습니다. 쓸쓸한 느낌이 한번 들기 시작하자 제가 만나는 모든 것이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전화벨은 없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울린다면 마음이 흔들릴까요? 술을 잘 먹진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라면 취할 수 있을까요?

혼자 누워있는 방안에서 적막한 공기 속으로 파장을 보냅니다. "아~" 아주 조용히. 이와이 슌지<러브레터>의 오겡끼 데스까 라는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아무도 없지만 속으로 혼잣말을 외칩니다. <와따시와 겡끼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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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9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괜히 ; 까닭이나 필요가 없이

살아가다 보면 괜히 그랬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밥 해리스(빌 머레이)가 촬영차 온 일본에서 미국의 부인에게 전화를 건 후 내뱉는 말이 괜히 였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의 기대를 가졌지만 무참히 깨져버리는 순간 자신의 모든 행동은 괜히가 됩니다.

여자 주인공 샬롯(스칼렛 요한슨-옆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곡선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얼굴입니다)은 남편을 따라 일본에 왔지만 하루하루가 무료합니다. 아직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다 남편이 일에 빠져 자신에게 관심조차 갖질 않습니다. 우연히 밥을 만난 샬롯은 침대 위헤서 밥에게 묻습니다.

살다보면 결혼생활은 더 나아지나요? 살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더 나아지나요?

살다보면 정말 나아질까요? <괜히>우린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둘은 일주일간의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군요. 살다보니 말입니다.

무척이나 쓸쓸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는 김광석의 노래가 그리웠습니다. 쓸쓸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노래를 불렀던 그는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가버렸는지... 그래도 그의 노래가 남겨져 이렇게 저의 마음을 위로하는군요. 살아가는 그 쓸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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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치인리 십번지
현진 지음 / 열림원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저에게 말하곤 합니다.  "넌 산속에 들어가 살아야 돼"

이 때 산속이란 대부분 절간을 의미했을 겁니다. 그러면 전 이렇게 말을 하죠.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단순히 사람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체라고" 여기서 제가 말한 조직체의 의미란 정말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규율에 살아야만 하는 그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규율이 없는 완전한 삶이란 결국 죽음을 의미하겠지만 나 스스로의 규율이 아닌 타인 또는 조직에 의해 주어진 규율을 지킨다는건 억압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기 <산문 치인리 십번지>란 책은 3보 사찰 중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말연시의 세배풍속이라든가 안거의 모습, 행자승과 선승의 모습 등이 자동차와 40화음 휴대폰 등 현대문명과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냅니다. 역시 이곳의 생활은 제가 우려했던대로 9시에 잠을 자고 3시에 일어나는 꽉 짜인 스케줄과 공양시간, 예불시간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물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분명 끊임없이 부정해야한 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절에서의 삶이 세속의 삶과 똑같을 순 없겠죠. 책을 읽다 내가 그렇게 자유롭고자 했엄음에도 얼마나 많은 것에 얽매여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1. 올 초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많이 생각했던 것은 내가 아프거나 혹은 죽었을때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나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는냐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글펐던 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었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날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글퍼했던 그 사실이 꼭 그렇게 서글픈 것만은 아닌것 같네요. 만약 저에게 그런 사람들이 몇명 있다면 저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었겠습니까? 저에게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건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에 깊숙히 개입되어 나의 삶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적어진다는 것,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쓸쓸하지만 자유로운 순간인 것입니다.

2. 한 때 잡초에도 이름이 있고 그들도 살아가야 할 고귀함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풀한포기 뽑는게 쉽지 않았었죠.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초같은 삶을 살고 있는냐며 그들에게도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잡초를 제거해 주는 것이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단순히 꽃밭을 보호하는 일보다 공존을 모르는 잡초의 독선을 조절해주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는 현진 스님의 말씀은 귀에 쏙 들어옵니다. 공존을 모르는 잡초의 독선. 생명에 대한 집착이 때론 독선이 될 수도 있음을. 공존은 그렇게 희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살아가야 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삶이 아름다워진다(P197)

스님은 운전하는 자세를 통해 이걸 깨달았군요. 단순히 목적지에 닿기 위한 운전은 정말 짜증나는 노역이었을 겝니다. 하지만 운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자연 운전이 즐거워지겠죠. 인생도 그러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목적만을 향해 살아간다면 지금 이순간의 삶은 힘든 노역일뿐일겁니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삶은 즐거워지리라 믿습니다.

4. 불교에서 원하는 건달의 역할은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일이다. 진정한 자객은 상대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단다. 다만 그 사람이 가진 증오와 복수심을 죽인다.(P77)

증오와 복수심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떤 종류의 증오와 분노가 역사를 한 발 앞으로 끌어당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랍니다. 그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잉태하지 않기만을. 폭력은 분노를 낳는 씨앗일 겁니다. 저는 자객이 되렵니다. 분노를 거세하고 폭력을 거두는 자객. 그런데 그 자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요?

 

세상에 눈먼 저에게 길을 가르쳐줄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책은 그런 지팡이를 만들어가는 칼이 되겠지요. 서두르지 않을렵니다. 어차피 지팡이를 만드는 과정도 즐거운 삶의 일부임을 이젠 알게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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