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치인리 십번지
현진 지음 / 열림원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이 저에게 말하곤 합니다.  "넌 산속에 들어가 살아야 돼"

이 때 산속이란 대부분 절간을 의미했을 겁니다. 그러면 전 이렇게 말을 하죠.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단순히 사람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체라고" 여기서 제가 말한 조직체의 의미란 정말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규율에 살아야만 하는 그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규율이 없는 완전한 삶이란 결국 죽음을 의미하겠지만 나 스스로의 규율이 아닌 타인 또는 조직에 의해 주어진 규율을 지킨다는건 억압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기 <산문 치인리 십번지>란 책은 3보 사찰 중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말연시의 세배풍속이라든가 안거의 모습, 행자승과 선승의 모습 등이 자동차와 40화음 휴대폰 등 현대문명과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냅니다. 역시 이곳의 생활은 제가 우려했던대로 9시에 잠을 자고 3시에 일어나는 꽉 짜인 스케줄과 공양시간, 예불시간등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 물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분명 끊임없이 부정해야한 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절에서의 삶이 세속의 삶과 똑같을 순 없겠죠. 책을 읽다 내가 그렇게 자유롭고자 했엄음에도 얼마나 많은 것에 얽매여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1. 올 초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많이 생각했던 것은 내가 아프거나 혹은 죽었을때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나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는냐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글펐던 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었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날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글퍼했던 그 사실이 꼭 그렇게 서글픈 것만은 아닌것 같네요. 만약 저에게 그런 사람들이 몇명 있다면 저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었겠습니까? 저에게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건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에 깊숙히 개입되어 나의 삶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적어진다는 것,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쓸쓸하지만 자유로운 순간인 것입니다.

2. 한 때 잡초에도 이름이 있고 그들도 살아가야 할 고귀함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풀한포기 뽑는게 쉽지 않았었죠.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초같은 삶을 살고 있는냐며 그들에게도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잡초를 제거해 주는 것이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단순히 꽃밭을 보호하는 일보다 공존을 모르는 잡초의 독선을 조절해주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는 현진 스님의 말씀은 귀에 쏙 들어옵니다. 공존을 모르는 잡초의 독선. 생명에 대한 집착이 때론 독선이 될 수도 있음을. 공존은 그렇게 희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살아가야 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삶이 아름다워진다(P197)

스님은 운전하는 자세를 통해 이걸 깨달았군요. 단순히 목적지에 닿기 위한 운전은 정말 짜증나는 노역이었을 겝니다. 하지만 운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자연 운전이 즐거워지겠죠. 인생도 그러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목적만을 향해 살아간다면 지금 이순간의 삶은 힘든 노역일뿐일겁니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삶은 즐거워지리라 믿습니다.

4. 불교에서 원하는 건달의 역할은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폭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일이다. 진정한 자객은 상대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단다. 다만 그 사람이 가진 증오와 복수심을 죽인다.(P77)

증오와 복수심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떤 종류의 증오와 분노가 역사를 한 발 앞으로 끌어당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랍니다. 그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잉태하지 않기만을. 폭력은 분노를 낳는 씨앗일 겁니다. 저는 자객이 되렵니다. 분노를 거세하고 폭력을 거두는 자객. 그런데 그 자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요?

 

세상에 눈먼 저에게 길을 가르쳐줄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책은 그런 지팡이를 만들어가는 칼이 되겠지요. 서두르지 않을렵니다. 어차피 지팡이를 만드는 과정도 즐거운 삶의 일부임을 이젠 알게 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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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던가? 재작년이었던가? 요즘의 기억력으로는 확실하지가 않다.

순천의 조계산엔 선암사와 송광사가 있다.  송광사는 조계종 3보사찰중 승보사찰로 규모가 엄청 크다.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으로 정말 아름다운 절이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마주치는 승선교라는 돌다리는 달력 사진에 꼭 등장하는 풍류가 넘치는 곳이다. 조계산을 종주하다보면 양 쪽에 위치한 이 두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가 있다.

아마 낙엽이 다 떨어져가는 늦가을이었던게 보다. 조금은 스산한 기운에 가을비도 살랑살랑, 어깨를 적신다. 선암사는 더욱 신비로워 보였고 나의 개인적 습성에 따라 꼭 절의 뒤모습을 보려 또박또박 길을 재촉한다. 남들은 잘 가지 않는, 그리고 잘 보지않는 절의 뒷모습. 난 왜 그곳에 집착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절 뒤에서 평온히 서 있는 소나무나 대나무, 동백나무들로부터 평온을 얻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대웅전 뒤나 극락전 뒤에 감추어진 절의 세간살이 보는 재미도 빼놓을수는 없다.

 아무튼 그렇게 뒤로 돌아가는 길에서 인적이라곤 들리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일까? 누군가 갑자기 문을 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천국의 느낌. 한 아주머니 보살님의 환한 미소는 정말 부처님의 미소를 닮아있었다. 부처님을 보지도 못한 내가, 그리고 오직 부처의 상만을 대한 내가 어찌 부처님의 미소를 알겠는가마는 그 분의 미소는 바로 부처님의 미소라고 생각 아니 그냥 생각이전에 온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음속에 찾아드는 평화. 자비심이 주는 그 아름다움.

내 평생 잊지 못할 미소다.

혼자 걷는 나그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그 미소가, 싱그러운 가을 바람에 실려 세상으로 퍼져나가길 기원한다. 아직도 가끔씩 나에겐 그 미소의 평온함이 내 몸에 남아 세상의 번민에 괴로워할땐 용천수처럼 솟아오름을 느낀다.

정말 그 보살은 부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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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로 한 밥은 말고 현미로 밥을 하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쌀을 불리는 것에서부터 뜸을 들이는 것까지 모두가 공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 밥은 그 먹는 시간도 많이 걸리게끔 된다. 현미를 백미먹듯이 먹었다가는 아마도 소화가 잘 안되 배가 고생할 것이다. 그래서 꼭꼭 씹고 또 씹어 먹어야만 하는게 현미다.

무척 다행히도 이렇게 현미를 꼭꼭 씹다보면 그 맛이 우러난다는 것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이 나는게 기분이 좋다. 그리고 이빨에 씹히는 그 질감은 부들부들한 백미와 비교할 수조차없다.

이렇게 꼭꼭 씹어 제 맛이 우러나는 것은 꼭 현미만은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깊이도 꼭꼭 씹어야지만 제대로 여문다. 꼭꼭 씹고 씹혔을때 나라는 사람도 맛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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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rk829 2004-09-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학교 공부로 만성 위염을 얻었는데 의사선생님이 꼭 현미밥을 먹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멋진 분이시니 안산 다농마트쪽 사랑의 병원 내과 과장님을 찾아가보시고 김예린 학생(캐나다에있는 매년오는)이 고마와하고 선생님같은분과 결혼하신 분은 좋겠다고 좀 전해주세요. ^^ 시간낭비는 아니겠지만 싫으시면 안하셔도 되고 해주시면 고맙습니다~ ㅋㅋㅋㅋㅋㅋ

2004-09-13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희재의 <간판스타>가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는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처럼 줌인과 줌아웃, 패닝으로 짜여진 만화의 한컷 한컷은 글보다도 훨씬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몽타쥬 기법과 같은 장면의 충돌없이도 서서히 감정을 격앙시키는 컷의 구성은 탁월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사회적 제도, 역사의 흐름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향해 폭발되어지는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판 어머니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원시인처럼 거친 근육으로 표현되어진 경쟁사회속의 타인들, 끌려가는 아버지때문에 또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때문에 토악질을 해대야 하는 주인공,  가난하기에 왕따 당하는 딸을 위해 손을 꼭 쥐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어머니 등등. 주먹을 뻗어 닿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되어 버린다. 가족과 동료를 향한 거침없는 분노. 실은 세상을 향한 분노여야 옳다. 그렇기에 한 컷 만화 속의 뒤틀어져버린 관계들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누가 우리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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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를 들었다 다시 놓는다.

왜 전화를 안 받는거지? 혼자 생각하며 자꾸 망설여진다.

발신자 표시가 있게 된 후론 쉽게 전화를 걸 수가 없다.

분명 내가 전화를 건 것을 알텐데.... 

상대방이 전화를 안 받는다는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자꾸만 작아져가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전화는 이제 이렇게 사람을 작게 만들어버린다.

 

잔인한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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