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봤다 - 작가정신 소설향 8 작가정신 소설향 23
성석제 지음 / 작가정신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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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가 주창한 <하수도 문화>는 경건주의 엄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문학이라는 것이 꼭 교훈을 준다거나 지식을 전달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억눌려진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면 그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온 문학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직된 그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에게도 일종의 자유를 심어준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성석제의 이번 <호랑이를 봤다>라는 소설은 하수도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갑자기 드는 생각,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난 소설을 잘못 읽었음을 알았다. 도대체 이 소설이 뭘 이야기하려 한 것일까 생각한 순간 나는 벌써 소설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마실나가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감정, 성석제의 소설은 바로 그 감정을 가져다준다. 해학가득한 농짓거리를 한바탕 듣고나서 실컷 웃고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책 표지의 그림처럼 호랑이의 실체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저 꼬리만 보이면 그것만 쳐다보고 오면 된다. 꼬리의 실체를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책으로 행하는 즐겁고 유쾌한 마실을 또 한번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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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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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영원히 나방을 이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인간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가 가능한 것은 궤도를 이탈한, 비정상적인 인간들끼리다.(P220)

이상은 나에게 신비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신비스럽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범주를 뛰어넘은 곳에 거처하고 있어 다가설 수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야만 한다. <꾿빠이 이상>은 이 신비한 세계를 한꺼풀이라도 벗겨보고 싶은 요량에 집어들게 됐다. 그리고 책이 말하고자 했던 진짜와 가짜(책은 이상의 데드 마스크와 오감도 제 16편의 진위여부와 맞물려 이야기가 진행된다)의 사이를 넘어 과연 존재란 무엇인가를 되새김질 하게 됐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김태익은 이상의 전집에서 드러나는 단어의 빈도를 통해 독보적인 위치에 선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단어의 빈도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책 중간중간 마치 주인에게 잊혀지지 않으려고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나타나는 '변형'이라는 개념에 눈길이 갔다.

데포르마숀(변형)은 원래의 성질이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물이 얼음이 되고 아이가 아버지가 되고 김해경이 이상이 되듯이 (P147)

데리다가 얘기했듯이 우리가 어떤 뜻을 찾기 위해 사전을 찾았을 때 우리는 해설된 말 중 또다른 단어를 사전으로 계속해서 찾아야 하고 그것은 미끄러지듯 유영하다가 결국 처음의 단어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즉 처음 단어의 원래 뜻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등반에서의 링반델룸과 같다. 귀신에 홀린듯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상.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몇번의 변주를 거치는 동안, 애초의 주제 프레이즈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됐다.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처럼 애당초 무엇때문에 벽돌을 쌓는지는 잊어버리고 단순히 거기 벽돌이 있기 때문에 벽돌을 쌓는 것처럼(P220)

그렇다. 우리는 지금 무엇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잊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생각마저 갖지 못하고 살고 있을지도. 우리가 그나마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그 첫자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거대한 설계도가 있고 그 설계도의 일부분을 조금씩 변형시킨 것이 <오감도>를 비롯한 이상의 시 작품인 셈이다. (P181)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의 설계도를 기억해내야만 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는 설계도를 쳐다보았을 때야 비로소 알아낼 수 있다. 얼마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는지를. 그 궤적을 이탈해서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이제 새로운 설계도를 구상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다시 그 설계도의 변형에 갇혀 같은 자리에 서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설계도를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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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의 제국
에릭 슐로서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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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초등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 피자와 같은 패스트푸드라고 한다. 김치와는 담을 쌓고 콩이나 야채는 젖가락 한번 대지 않는다.(그게 건강에 최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한 결과로 비만에 제 살마저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그만 아이들이 성인병으로 고생한다. 그러면 병원으로 찾아가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해결하려 한다. 자신의 병이 이런 음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패스트푸드는 절대적으로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햄버거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담배가 폐암을 일으킨다고 해도,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해도 쉽게 줄어들지 않는 흡연자처럼 우리에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제국은 바로 이 부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가 단순히 건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드러나는 동물학대, 노동자 착취, 환경오염등도 가져온다는 것을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그들은 이익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대한 기업체일 뿐이다. 이 책은 패스트푸드의 발생부터 그것이 현재와 같이 다국적 기업으로 승승장구하기까지의과정을 과거로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치권과의 온갖 비리는 왜 그들이 제국이라는 이름을 갖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 쎄계 많은 국가들이 대면하고 있는 심각한 도전은 시장의 효율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시장의 편협한 명령이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가치에 우선하자 자유를 약속하는 경제 체계는 너무 자주 그 자유를 부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349)

자본주의 세상이라 해서 현실의 모든 것이 이윤추구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경제적 이익만이 최상의 선이 된다면 굳이 마약을 단속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독성이 가져오는 끝없는 이익에 모든 사람들이 군침을 삼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약을 금지한다. 아직 도덕은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희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난 모든 것을 싸게 만드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목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356)

자신의 건강과 아이의 행복을 넘어 노동자를 생각하고 동물을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정신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실천의 첫걸음은 유기농축제품의 구입에 있다. 제국은 화학품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춰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이 사실 앞에서 여전히 두려운 것은 패스트푸드가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담배를 쉬 놓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손에서도 햄버거는 쉽게 떠나지 못할 것이 두렵다. 그러나 천사가 악마를 이기는 해피엔딩을 꿈꾸는 자유마저도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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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흡 3
이승헌 지음 / 한문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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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를 하면 집안이 깨끗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직접 청소를 하지 않는 한 집안은 깨끗해지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이 실천으로 행해지지 않는 한 그것이 이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몸을 비롯해 주위의 환경, 자연, 지구,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다 라고 알고 있더라도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지식의 풍요속에 실천의 가난이 문제인 것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강요되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발현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선택과 의지는 바로 깨달음을 통해 실천의 길로 통하게 만든다. 즉 앎보다는 깨달음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또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책은 깨달음은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느낄 뿐이다. 이미 깨달음은 우리 안에 있으니 그것을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이루는 방법으로 뇌호흡을 제시하고 있다.

몸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그대도 지켜내며 진동하는 것, 살아있는 것을 포함, 세상의 모든 것은 진동한다는 전제하에 생명의 진동에 몸을 맡기라고 한다. 그랬을 때 바로 세상의 천지 기운이 바로 나의 천지기운이며 천지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이런 깨달음으로 가는 준비자세, 즉 자율진동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한 진정한 소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내가 왜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고 그것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을 때 우리는 진정 하나된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깨달음의 첫발로 가는 간절한 소망을 가슴 속에 품고 매일 매일 나에게 하늘에게 우주에게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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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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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첫발부터 삑걱거리기 시작한 이들은 그 삐걱거림을 체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체념의 시간은 그들의 성장과 함께 희망의 빛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고로 원전했던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있어 장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다.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며 인정한다는 것, 체념만으론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버린 상태를 어찌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잠수복과 나비는 바로 이렇게 갑작스런 사고로 <로크드 인 신드롬>상태에 걸린, 잘 나가던 여성잡지 <엘르> 편집장의 메모들로 이루어졌다. 로크드 인 신드롬이란 일종의 식물인간 상태로 보면 될 것이다. 성공적 사회생활을 이끌어 가던 중년의 남자가 갑작스레 자신의 육체가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로 몰리게 된 이후(그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열쇠를 잃어버린 잠수복을 입은 상태라고 표현했다)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 교탁위에 올라선 학생들에게 교실이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온 것처럼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대충 챙겨먹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던 과정이 기계처럼 느껴졌었는데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모두 행복의 순간으로 비쳐진다. 햇살, 바람, 소리... 바깥에 비록 나갈 순 없으나 살아있는 정신으로 그는 상상의 날개를 편다.(그는 이순간을 자유로운 나비의 훨훨거림으로 표현했다) 스쳐지나가던 보잘것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드러내보인다.

게다가 평상시 아무 불편없이 지내던 것들, 무심코 툭 내뱉던 말 한마디등이 실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장벽이 되어 나타나는 가도 실감하게 된다. 마치 자동차 운전자 입장에서 보행자 입장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의 장점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한번 뒤돌아보게 만든다는데 있다.

캥거루는 벽을 넘었습니다.
동물원의 벽을,
하나님 맙소사, 벽이 어찌나 높던지요.
하나님 맙소사, 세상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P172)

자신의 장애를 나쁜 번호를 뽑은 돌연변이로 바라보다 낙엽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 그의 삶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코가 시큼해진다. 그리고 바라본 하늘은 왜 그리도 가슴시리도록 파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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