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일기 2 - 1994.11 - 1995.11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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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편에서 작가는 소설가란 소설속 인물의 변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은근히 주장했다. 주인공들의 변화가 없는 소설이란 아무래도 석고와 같이 무생물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작가의 관점은 책을 읽는 곳곳에 드러난다. 특히 밀란쿤데라의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기장은 그러한 영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쿤데라는 신앙과 진보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신앙이란 종교요 진보란 크레물린을 상징한다. 이 둘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식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의 향상성을 믿는다. 인간에게 향상성이 없다면 절망과 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쿤데라는 향상성 대신 우매와 우연, 절제없는 욕망, 고상하게 위장된 허영 따위가 바로 인간의 총체라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쿤데라가 염인론자가 아닌 것은 인문주의적 요양과 성찰에 힘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장정일은 보고 있다.

즉 장정일은 변화, 전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소설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변화의 긍정적 방향이라는 향상성도 일견 소설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쿤데라에게 있어서 그런 진보, 향상성은 거짓인 것이다. 그러기에 쿤데라를 헐뜯을만도 하겠는데 그게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 바로 그의 인문주의적 힘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사회라는 것과 소설이라는 것 모두 변화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변화라는 것이 꼭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 않을까 그의 독서일기장을 훔쳐보며 질시의 눈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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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1 - 여명편 은하영웅전설 1
다나카 요시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서울문화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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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1> 2001년 1월 15일

SF 삼국지

SF소설이라는 게 대부분 재미만을 추구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마광수 교수가 말하는 하수도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 재미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재미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이 그야말로 유치한 구성과 설정에 있다면 정말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재고해 봄직하다.

그런 측면에서 <은하영웅전설>은 삼국지만한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니 재패니메이션의 한 획을 긋는 에반게리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은하제국과 동맹에서 각각 한명의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웅이 되는 과정이라든가 개인적 캐릭터의 차이는 단순한 대립차원을 넘어 여러가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웅이라는 것은 개인적 의지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구조적 압력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삼국지의 유비). 그리고 영웅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괴로워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에반게리온의 신지) 영웅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또한 이런 캐릭터의 우수함 이외에도 우주로의 확정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보다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가령 자전, 공전 주기가 서로 다른 여러행성들간에 시간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다시 한번 지구라는 공간에 위치한 인간의 사고 개념의 유한정성을 생각하게끔한다.

아직 2편까지 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이 책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날 보고 있자니 과연 결말로 치닫는 과정에선 또 얼마나 책속으로 빠져들어갈지 상상이 간다.

<은하영웅전설 10> 2001년 3월 13일

민주공화정에 대한 찬가

이 소설은 많은 부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게 빚지고 있다. 독재자에게의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심리상태는 결코 우리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앞에 나서서 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생각, 고민없이 그저 주어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설속의 얀 웬리라는 주인공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살기좋은 전제정치제도와 살기 어려운 우민정치로 이어지는 민주공화정 중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갈등상황이다.

로엔그람 왕조의 패도정치가 그 썩은 내를 더해가면서 라인하르트라는 새로운 독재자와 얀 웬리라는 민주공화정 지지자의 두 정부로 우주는 나누어진다. 라인하르트는 전쟁에 있어 천재적 수완을 발휘하고 덧붙여 민심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반면 얀 웬리는 항상 인간적 고민에 둘러싸여 있는 고뇌하는 인간이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라인하르트 못지않은 수완을 발휘해 명성을 얻는다. 특히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전쟁에 앞장서야하는 얀은 그야말로 모순속에 살아가는 인물로서 소설 속 주인공중 색다른 묘미를 준다. 우주는 라인하르트에 의해 평정되고 민주공화정의 싹은 얀의 희생으로 부활의 씨앗을 품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은 계속해서 민주공화정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치제도라고 주장하지만 한편에선 우민정치로의 전락을 두려워하교, 또 진정한 지도자의 표상, 즉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독재자가 나온다면 그 정치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는냐는 고민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에게 지루한 관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전투씬 만큼이나 절절하게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의 힘을 가져다주고 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재패니메이션이 가져다 주는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체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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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범우 한국 문예 신서 79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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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장정일의 독서량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거야? 책을 보고 있으면 평균 하루에 1권정도 읽어대는 그의 책에 대한 집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렇게 읽다보면 내가 언제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터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라도 독서일기장은 꼭 필요할 터.

이런 독서일기장은 개인적 기억창고이지만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작금의 세대에게는 그야말로 단시간에 수십권의 책을 읽을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의 글 중 이런 세태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으나 그 자신의 책이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고 있음은 알고 있는지.

아마도 그 자신 또한 이런 모순된 점을 인정하고 슬쩍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음으로써 또 다른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자신의 책은 그런 좋은 책을 수십권이나 가르쳐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이냐고... 아무튼 이 일기장을 보면서 장정일이 갖고 있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건 행운이라고 볼 수 있겠다.

P128 소설이란 작중인물들의 존재이전이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 즉 주인공의 인생유전을 다루는게 문학이다는 생각은 많은 생각거리를 가져다 준다. 특히 구조에 의한 유전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를 통한 유전이 보다 좋은 소설이라고 말한 점은 전자가 학문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볼 때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어떤 문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1993년과 1994년 사이의 장정일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는 재미를 가져다 준다.

무엇보다도 일기장 속에 드러난 여러 읽을거리중 나도 몇권 읽어야 되겠다고 추려놓은 책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어느정도 평가되어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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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문학사상 세계문학 13
밀란 쿤데라 지음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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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앤,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외계에서 온 것처럼 엉뚱한 사람들. 물론 그들이 나를 보는 눈길도 마찬가지일련지도 모른다.

그들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엔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계선이라는 것이 손바닥만한 것이라 어느새 반대편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쿤데라는 이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축장에서 송아지를 죽인다고 법석을 떠는 사람은 없다. 송아지가 인간의 법테두리 밖에 있듯이 타미나도 아이들의 법 테두리 밖에 있었다.(P246)

이 테두리, 경계선의 증가는 점차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 그 소통의 부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됨을 의미하고 급기야 모든 사람들이 작가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그렇기에 국경을 넘어 들어온 탱크는 모기같을 수밖에 없고 옆집의 사과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나의 경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망각을 가져온다. 잊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것은 없다. 나의 정체성은 실로 나의 기억들이 아니던가? 또, 세상의 웃음이란 경계가 서로 충돌할 때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도구가 된다. 웃음과 망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경계속에 사는 이들이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것을 그 경계의 차이로 인해 오해를 갖게 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하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기억하자. 웃음으로 어색함을 달래지 말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경계선을 인식하자.

왜 사냐면 웃지요

그 경계선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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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파괴 - 깨달음과 사유의 인도 이상의 도서관 50
이거룡 지음 / 거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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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철학,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 많은 인도의 사유들을 깊이 파헤칠려면 어디 한권의 책으로 가능하겠는가?

쉽게 읽힐 수 있는 다이제스트를 원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인도철학사라는 4권의 두꺼운 책을 감히 들춰보지 못하고 그저 수박 겉핥기에 만족하려는 나의 마음가짐에 어찌보면 이 책은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책은 인도의 종교중 힌두교에 대해서 불교와 비교하며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업과 윤회, 그리고 속세에 대한 생각등에서 어떻게 불교와 다른지 비교하다보면 어느새 힌두교란 이런 것이었구나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욕망의 긍정, 그리고 그에 따른 속세간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욕망과 속세를 벗어나 해탈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생각, 따라서 몸을 근본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그들의 생각은 삼매의 경지가 하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곳에 있구나 하고 깨닫게 만든다.

모든 것은 바로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과연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인지 야금야금 깨물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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