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결국 내 자신의 판단이고 결정이었다. 그간 가장 두려웠던 점은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생활을 그만두면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퇴사 후에 하고 싶은 공부가 분명했지만 그 길에 들어설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소속 없는 삶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와 달려나갈 트랙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선택을 하는 데만 해도 몇 년이 걸렸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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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어요.
"지난 몇 달간 상황이 정말 암울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다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시 일이 잘 굴러갈 가능성도 있지만, 미래를 향하지 않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만 같아요. 나는 매일 조금씩 더 홀가분해집니다. 나쁘지만은 않아요, 머물 곳이 없는 삶도."
나는 그것이 오직 남자만 -부양가족이 없는 남자-즐길수 있는 감각이라고 말했어요. 제퍼스, 내가 겨우 참아낸 말은 그것이 머물 곳을 제공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인심에 의존하는 생활이라는 거였어요! 하지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웬일인지 L이 내 속내를 알아챘거든요.
"내 삶이 비극적이지 않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그가 부드럽게 말했지요.
"결국 나는 거지에 지나지 않고 줄곧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그렇게 말했어요. 애초에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행운이지요. L이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가 그 뿌리부터 부정당하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 P97

"내 의견이 궁금하시다면요."
브렛이 말했어요.
"변화하는 건 그가 아니라 온 세상이에요. 그는 과거의 세상이 더 좋은 거예요. 그래서 삐친 거고요. 당연하게 누리는 척했던 모든 것을 다시 갖고 싶은 거예요." - P128

그 후로 알게 된 것은 내가 순진했다는 사실이라고 내가 말했어요. 내가 변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하다니, 내 변화가 그들의 이익에 명확히 반하는데도 내버려둘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순진했지요. 그리고 내 삶이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비겁한 이기심을 숨기는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충격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빼앗아가면 무슨 짓이든 할 테고, 한때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했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 살고자 선택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이자 비극이라고 나는 말했어요.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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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초, 나는 인생 최대의 무모한 여행을 감행했다. 영국 런던의 킹스칼리지에서 열린 한국학 학술대회에 가서 세월호 추모 방식에 대한 발표를 한 것이다. 학술대회는 6월 4일 토요일이었고 6월6일 월요일이 현충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6월 3일 금요일에 수업을 마치자마자 인천공항으로 가서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방콕을 경유하여 17시간 비행 끝에 - P24

(예산과 일정에 맞는 비행기가 그것뿐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6월 4일 아침에 런던에 도착해 곧바로 학술대회장에 가서 발표를 한 뒤 숙소에서 쓰러져 자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 6월 5일은 공중에서 사라지고 6월 6일에 귀국해 잠시 쉬고 6월 7일 화요일에 수업하러 가는 일정이었다.
왜 그런 짓을 했냐면, 2016년에 접어들자 아무도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년 1주기 때처럼 광화문 현판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경찰이 와서 차벽으로 막고 아버지들 목을 졸라 연행하고 어머니들 눈에 최루액을 뿌리거나 하지 않았다.
농성장에 보수단체들이 쳐들어오지도 않았다. 언론에서도 세월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종료 저지라든가 선체 인양이라든가 진상 규명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은데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학술 발표라도 해서 어딘가의 논문 데이터베이스에 자료라도 남기기로 결심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한국 민속학을 연구하는 교수님과 공동으로 세월호 추모의 방식과 노란 리본의 기원에 대한 논문을 두 개 썼다. - P25

그러니까 이제는 경찰 개인이 노동자 몇 명을 대공분실로 끌고 가서 사람 대 사람으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21세기 대한민국 경찰은 기계문명의 화려한 결과물을 활용해서 무방비한 개인을 때리고 죽이고 위협한 뒤에 위협과 폭력과 살상에 사용된 비용을 피해자에게 물어내라고 강요한다. 그엏게 끝없는 재판과 소송이 빙글빙글 돌면서 노동자의 생명을 빨아먹고 가족의 삶까지 전부 으깨놓는다. - P110

2022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나의 지역학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검증된 논문을 조사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뉴스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모은 정보를 근거로 하여 내린 결론이다. - P137

전쟁은 끝나지 않고, 2023년 10월 7일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계속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 하는데, 가자지구에는 독립된 군대가 없다. 한쪽에만 군대가 있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폭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학살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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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는 일엔 어느새 무덤덤해졌다. 정작 견디기 어려운 건 수술을 받은 친구들이 이십대로 돌아가는 바람에 혼자가 되고 만 외로움이었다. 인간은 이제 노화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 깊게 파인 주름, 드문드문 검버섯이 올라온 피부, 굽은 등허리 같은 것들을 본 적이 없다. 만약 노인이 길거리를 지나다닌다면 동물원우리를 탈출한 원숭이와 다름없는 볼거리가 될 것이다.
수술을 받지 못한 노인들은 선글라스를 쓰거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 해가 지고 난 뒤 돌아다니는 쪽을 택했다. 사람들의 혐오스런 눈빛을 견딜 자신이 없는 것이다. 다들 젊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실은 죽기 전에 모두 노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셈이다. - P8

나는 노인들이 왜 젊어져야 하는지 묻고싶었다. 또 저기 수술실 침대에 누운 젊은이가 왜 자기 건강을 해쳐야만 생존이 가능한 건지도 알고 싶었다.
우리는 왜 늙어서는 안 될까? 길거리에 늙은이들이 돌아다니도록 왜 그냥 놔두지 않는가? 피부가 늘어지는게 흉하다면 아기에게 근육이 없는 것 또한 괴이해 보여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 전염되지도 않는 검버섯을 누구를 위해 제거해야 하느냔 말이다.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미치광이 취급만 받을 뿐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 P22

나이 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노인은 자기가 산 생만큼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시력이 나빠지고 이가 빠지는 일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한준비 과정일 뿐 이겨내야 할 질병이 아니다. 노화를 혐오하게 만들어 젊음을 팔게 하는 호르몬 체인징 수술은의학계에 돈만 벌어다 줄 뿐 인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도움은 커녕 제 삶을 살아야 할 젊은이들의 생을 통째로 앗아가는, 이기적이고 콧대 높은 의학기술의 몹쓸 진보다. 호르몬 체인징 수술로 인해 나는어머니를 잃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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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4-2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6쪽 인용문 때문에 이 책 궁금해지네요ㅠㅠ 저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5-04-29 12:42   좋아요 1 | URL
책은 얇고 금세 읽힙니다. 저는 [서브스턴스] 생각난다는 추천에 읽었는데, 음 그거랑은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다는 혐오를 소재로 계급과 빈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여겨집니다.

관찰자 2025-04-2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Y존 필러‘와 맞닿아 있네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대학생 때 봤던 <섹스 앤더 시티>의 어느 에피소드에서 항상 연하만 만났던 사만다가 자신의 음부의 털을 염색하는 일화가 있었는데, 그때는 저게 뭘까, 유행인가? 아니면 왁싱처럼 개인의 기호에 따라 염색을 하는건가 싶었거든요. 근데 그 에피소드의 후반에서 나오듯이 흰색 음모를 염색하는 거여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면 머리카락이 희어지면 몸에 있는 다른 부위의 털도 희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나이 들어 감에 따라 몸도 변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주 이야기 되어 졌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25-04-29 12:44   좋아요 1 | URL
세상이 변하면 나 혼자 꼿꼿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자식은 과열교육에 합류하도록 두지 않아, 라고 해도 막상 학교 보내고 여기저기서 학원들 보내는 걸 보면 우리 아이만 뒤쳐질까봐 보내게 되잖아요. 이 책에서도 초반에 나오는데, 노화는 자연스러운것이라 받아들이려고 하고, 오히려 호르몬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인물 조차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호르몬 치료를 하고 거리에 노인이 없어지니 어쩔 수 없이 나도 해야겠다, 하고 하게 되거든요. 와이존 필러도 맥이 다른듯 하면서도 당연히 비슷한데, 그렇게 하는 것이 너의 질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그것은 너의 파트너에게 더 큰 만족을 줄것이다, 라는 몇 번에 걸친 세뇌가 결국 병원으로 이끈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요. 휴 세상 살기 진짜 너무 빡세지 않나요 ㅠㅠ
 

나는 겁쟁이가 아니었지만, 머리를 팔러 다니는 불그스름한 낯빛의 이 악한에 대해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다. 이 낯선 자 때문에 완전히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나로서는, 솔직히 말해 그가 한밤중에 내 방에 몰래 잠입한 악마만큼이나 무서웠다. 실은 그가너무 무서워서, 그에게 그냥 말을 걸어 그의 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요구할 정도의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 P71

이보다 더 의미로 가득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설교단이야말로 이땅에서 가장 선두에 자리한 것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그 뒤를 따르니 말이다. 설교단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하느님의 성마른 노여움이 제일 먼저 발견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뱃머리는 최초의 맹공을 견뎌내야만 한다. 순풍이나 역풍의 신에게 부디 순풍을 보내달라고 처음으로 기원하는 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출항한 배와 같고,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설교단이 바로 그 배의 뱃머리다. - P99

"아니, 지금 저 인간이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거야." 펠레그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선실을 당당히 가로지르며 외쳤다. "다들 저인간이 하는 말 좀 들어보라고. 한번 생각해봐! 당장이라도 배가 가라앉을지 모르는 판에 ‘죽음‘과 ‘심판‘이라고? 응? 돛대 세 개가 전부 뱃전을 처박아 계속해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대고, 앞뒤 좌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파도가 우리를 덮쳐오는데, 그 와중에 ‘죽음‘과 ‘심판‘을 생각한다고? 헛소리! 그럴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여유 따윈 없어. 에이해브 선장과 내가 생각했던 건 바로 ‘목숨‘이야. 어떻게 하면 선원들을 모두 살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임시 돛대를 세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가장 가까운 항구로 갈 수 있을지, 그런 게 내가 생각했던거야." - P186

만일 내가 나자신에게 완전히 솔직했더라면, 배가 망망대해로 나가자마자 철저한 독재자로 변할 사람을 단 한 번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 이렇게 긴 항해에 나선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그 문제에 이미 관여하고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 의심을감추려고 저도 모르게 애쓰곤 하는 법이다. 나의 경우가 딱 그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P196

피쿼드호의 나머지 선원들에 대해서는, 오늘날 미국의 포경업계에 평선원으로 고용된 수천 명의 사람들 중 미국 태생은 둘 중 하나도 채 되지 않는 반면, 간부 선원들은 거의 다 미국인이라는 사실만 말해두도록 하자.
이 점에서 미국 포경업계는 미국의 육군과 해군과 상선, 미국의 운하와 철도 건설을 위해 고용된 토목 기술자들의 경우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다를 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경우에서 미국 토박이들은 관대하게 머리를 제공하고, 나머지 나라 사람들은 아낌없이 근육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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