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위로 - 모국어는 나를 키웠고 외국어는 나를 해방시켰다
곽미성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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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원태연의 시 중에 ‘외국 애들은 생각도 영어로 하겠지‘ 라는 간단한 한 줄이 있었는데, 그러나 모국어로 생각하면서 입으로 외국어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얼마나 매력적인가. 특히 남편으로부터 불어를 배우며 사고조차 따라가는 것 같아 중심 잡으려던 작가의 이야기가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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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2-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가 떠오르네요. 언어를 넘나드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텐가. 근데 너무 매혹적인~~
 

25일은 아빠 생신이다.

토요일에 식구들이 모여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이모가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이번엔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새로운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딱히 성공적이진 않았고.. 이건 투비에 써야지. 하여간 와인을 마시면서 티비를 보려는데, 보통 여행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우리는 수다를 떠는데 이번에는 내가 <스페인 하숙>을 다시 보기 하기로 했다. 일전에 방영당시 몇차례 보긴 했었는데, 최근에야 그 프로그램에서 유해진이 매일 달렸다는 걸 알게된거다. 달리는 유해진을 보고싶은 마음에 다시보기로 1회부터 시작했는데, 오오, 아직 유해진이 달리기하는게 본격적으로 나오진 않았는데 뜻밖에 스페인어하는 배정남을 보게 됐다.


흐음. 일단 스페인어 하기 전의 배정남은 비호감이었다. 그전에 그의 존재를 모르다가 스페인하숙에서 처음 보게 됐는데, 그 나이 되도록 양파 한 번 까본적 없고 마늘 한 번 까본 적 없다는거다. 딱 봐도 서른이 넘었는데, 삼십대의 성인 남자가 아직까지 마늘을, 양파를 안까봤다고? 나는 여기에서 분노했는데 아빠랑 이모는 '안해봤으면 모를 수 있지' 라고 하는거다. 아니, 그러니까 안해보면 모르는거 당연히 맞는데 그걸 어떻게 안해보냐, 살면서 마늘이랑 양파를 안먹진 않았을텐데 그렇다면 그걸 누가 다 대신해줬다는거 아니냐, 했던거다. 지금 검색해보니 어린 시절이 불행했으며 외할머니랑 살았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는데, 음.. 고생을 '안해서' 양파를 까본 적이 없는건 아니구나.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른 삶이 뒤에 있었던 거였구나, 싶기는 하지만, 그런 대화속에 이모가 이모 아들도(삼십대) 해본 적 없다고 해서 내가 더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여러분, 내 말 뭔지 알쥬?


하여간 그런데 이 배정남이 세상에,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거다. 

정육점이든 야채가게든 가서 뭘 사는데 막힘이 없어. 단순히 하나 달라 두 개 달라가 아니라 조금 더 달라 같은 말을 한다니까? 내가 너무 놀라서 와 어떻게 저렇게 스페인어를 하지? 했더니 배정남이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는게 아닌가. 장을 보러 가기 전에도 뭘 사야할지 수첩에 항상 메모를 한다. 그리고 방송으로 배정남의 수첩을 찍어 보여줬는데, 와, 내가 너무 놀란건, 스페인어가 죄다 한글발음으로 적혀있는거다. 이를테면 스페인어의 mas 는 영어의 more 와 같은 뜻인데 그걸 mas 로 적어놓지 않고 '마스' 로 적어놓은거다.



와. 이건 정말 엄청난데?

저렇게 한글 발음으로 적어놓고 스페인어를 하려면, 정말이지 달달달달 외워야하는게 아닌가!! 이거 너무 대단하잖아? 체계적으로 배우려면 차근차근 스펠링부터 배우면서 듣고 그래야할텐데, 이건 무작정 외우기잖아? 와- 진짜 너무 대단한 거 아닌가. 한글 발음으로 써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진짜 엄청엄청 노력했을 것 같은거다. 사실 외우기에 소질 없는 나는 저게 엄두가 안나. 어떻게 저걸로 다 외우고 대화가 될까. 진짜 너무나 대박인것이다. 와...


그래서 대화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이렇게 한국어로 발음 써놓고 외우는 것은 좀 문제가 나타날 수 있는게, 한국어의 발음 그대로가 스페인어의 발음과 같지 않아 내가 외우고 아는 단어여도 상대에게 그 뜻이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배정남도 스페인사람에게 내일 가게 오픈하는지 물어보고 싶어 스페인어의 내일을 발음하는데, 스페인어의 내일은 manana 이고 흐음, 이걸 읽어본다면 만야나 정도가 되어야할텐데 배정남은 이걸 '마나나' 라고 발음하는거다. 상대는 그걸 자꾸 '바나나' 로 듣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어 표기 외우기의 치명적 단점.


그런데 진짜 대화 너무 잘한다. 차승원도 배정남과 쇼핑하고 와서 '정남이 오늘 스페인어 만오천단어 쯤 했어' 라고 말한다. 만오천 단어라는 건 과장이지만,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옆에서 들으면 그건 정말이지 엄청나잖아요? 배정남은 듀오링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수첩에다 냅다 쓰고 냅다 외웠는데 대화가 된다. 너무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야, 노력하면 안되는게 없구나. 저걸 외우다니, 증맬루 대단하다!


이게 내가 듀오링고로 스페인어를 조금 공부해보기 전이었다면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스페인어를 조금 보고 있고(진도 나가다보니 어려워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 있다 ㅎㅎ) 그러다보니 배정남의 회화가 증맬루 진짜루 최고로 대단해보이는 거다. 대단합니다..




책을 샀다.



















모든 학문은 어떻게든 공부하다보면 결국 철학으로 향하지 않을까, 라고 몇년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철학 관련 책을 이것저것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있지만, 그건 다른 모든 책도 마찬가지. 어제 회사 동료에게 책을 빌려주려고 책장 보다가 내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서 화들짝 놀라버렸다. 흐미.. 내가 가진 책장에 책이 죄다 두겹으로 쌓여있어서, 어제 추리소설 뭐 빌려줄만한 거 없나, 하고 앞쪽 책 들어내보니 뒤쪽에서 갑자기 툭, 마틴 에덴이 튀어나오는게 아닌가? 어어? '내가 이걸 팔 리가 없는데' 라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아 '그런데 팔았나보지?' 했건만, 뒤에 숨어있었구나! 나는 마티 에덴을 가지고 내 방으로 왔다. 회사 동료 h 에게 빌려주기 위해서.

















[언어의 위로]는 얼마전 친애하는 알라디너 분의 밑줄긋기를 보고 사게됐는데, 받아보니 작가 이름 '곽미성'이 낯설지가 않은거다. 하아- 나 이 작가 책 뭔가 있는것 같은데, 읽었나? 하고 검색해보니, 내가 가진 책은 이거였다.



산 지 얼마 안된 이 책 이었어.

이 책은 사는 당시에 이탈리아어 공부하는 걸로 알고 샀는데 [언어의 위로]를 읽다보니 작가는 프랑스어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에서 산 지 20년... 아아... 그렇다면 한국어도 하고 프랑스어도 하고 이탈리아어도 하시는거에요? 대단하십니다. 멋지다. 아, 그러고보니 위의 배정남과 연결되네. 아아, 외국어를 공부하는 건 너무 근사하고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근사하다!!









저 [7분]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샀는데, 인스타에서 낚이지 말자! 라면서도 자꾸 사버리는 나란 사람.. 제발 재미있기를요..



자, 다시 책장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그렇게 마틴 에덴을 꺼내와 h 에게 빌려주기로 한 책이 있고 또 이미 h 에게 빌려준 책이 많지만, 오늘 아침엔 [뱀이 깨어나는 마을] 가지고 와서 s 에게 빌려주었다.


s 의 작년 생일에는 내가 [미 비포 유]를 선물했는데 이걸 조금 읽고 여태 완독을 하지 못하길래, 아 어떤 사람들은 1년에 한 권 읽기도 힘들어 하는구나, 라는걸 다시 깨달았단 말이지. 그런데 최근에 s 가 이수정 교수의 [스토킹]이란 책을 구입한거다. 

















s 는 티비 프로그램으로도 범죄 재연물을 자주 본다는게 아닌가. 그래서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서점 갔다가 샀다는거다. 그런데 이 책도 얼마 못읽고 더 이상 읽지 않길래 왜 안읽냐 물어보았다.


"제가 생각한 그런게 아니더라고요."

"사례가 나올 줄 알았던거지?"

"네."

"그런데 통계가 잔뜩 나오지?"

"네."



그런 s 의 이번 생일에, 나는 [하우스 메이드]를 선물했다.
















아니, 이건 곧잘 읽는게 아닌가.

심지어 뒤에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내게 "이런 책 또 있어요?" 묻기까지 하는거다!! 나는 당연하지! 하며 여러권, 스릴러물 추천을 해주고 s 는 부지런히 받아 썼다. 자신은 무서운걸 좋아한다고 한다. 아아, 미 비포 유는 전혀 취향을 저격하지 못했고 하우스 메이드는 취향을 저격했구나! s 의 핸드폰 메모장에는 내가 알려준 책들이 가득해졌고, 오늘 아침, s 는 내게 주말동안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고 했다.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를 사려고 했는데 그 책은 없었고, 너무 무섭다던 [금지된 장난]을 샀다고.
















하우스 메이드 다 읽었고 이거 시작했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애초에 취향을 알았으면 미 비포 유는 안사주는건데.. 아니, 그래도 그 책이 한 번 읽어보면 좋다니까? 생각할 거리가 많아!! 




오늘은 옛친구 몇 명이 생각났다. 

젊은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다들 결혼하고 아이낳고 살면서 나랑은 자연스레 멀어진 내 친구들.

그 중의 두 명이 특히 더 생각나 크리스마스 겸 선물을 보내면서 연락을 했는데, 둘다 선물도 반갑지만 내 연락이 반갑다고 했다. 그중에 k 언니는 나의 이십대 시절 아주 친하게 지냈던 언니고 거의 매일 만났던 언니다. 나는 대학생이었고 언니는 대학원생으로 처음 아르바이트 하다가 만났고 그 뒤로 우리는 서로의 학교도 빠져가면서 만나 놀고 그랬다. 그러다 내가 취업하고 직장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는데, 이 언니랑 국내 여행도 같이 다니기도 했고 거의 매일 빼놓지 않고 만났던 터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연애를 할 때도 그 언니만큼 누군가를 자주, 열심히 만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오늘 언니가 내 연락을 반가워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십대 시절의 내가 제일 밉고 싫거든. 인생에서 들어내버리고 싶은데, 그런데 그 때 만난 언니는 참 소중했어. 아주 버릴 것만 있던 시간은 아니었구나 싶어.>


그러자 언니로부터 이런 답장이 왔다.


<내가 본 너의 이십대는 그렇지 않았는데.. 힘들어하긴 했지만 정말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았고 생각도 깊어서 내가 언니인게 부끄러울 때가 많았거든. 내가 본 이십대의 락방이는 멋졌어.>


이 답장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나 내가 버리고 싶어했던 이십대를 누군가 멋졌다고 말해준 일은 처음이었다.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니 '맞지, 내가 열심히 살긴 했지' 라는 20대에 대한 자기 긍정도 조금 할 수 있게 되었다. 좀 근사한 답장인 것 같다. 



오늘 점심 메뉴나 생각해봐야겠다.

며칠전에 인스타에서 본건데 <진짜 똑똑한 사람들은 "오늘 뭐 먹지"만 하루종일 생각해요> 라고 써있더라.

세상에... 나 이 세상 대박 천재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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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2-2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으면서 ˝자신은 무서운걸 좋아한다고 한다.˝ 이 문장을 이 페이퍼의 문장을 픽했는데 다 읽고 바꿨어요.
그 언니님의 답장으로요. 멋진 사람은 멋진 사람을 알아보나봐요!!

다락방 2024-12-23 12:05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가 아침부터 울컥 했네요. ㅠㅠ

2024-12-2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4-12-23 12:04   좋아요 1 | URL
그 걱정을 받아들여 수정하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2-23 12:06   좋아요 0 | URL
👍🫣🤣💗🎉

잠자냥 2024-12-23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그분들에게도 에이스 보냈나요? ㅋㅋㅋㅋ 맛나게 일년 동안 먹으면서 먹을 때마다 다락방 생각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카드보다 에이스가 더 좋았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천재 다락방님!

다락방 2024-12-23 14:17   좋아요 1 | URL
그건 님한테만 보낸건데요??

독서괭 2024-12-2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하루종일 먹을 거 생각하면서도 다른 일을 척척 해내니까 천재인 걸까요? 다락방님 대천재 인증!! ㅋㅋㅋ
이십대도 이미 멋졌던 다락방도 인증😍

“그건 다른 모든 책도 마찬가지.” 에서 🤣🤣🤣🤣🤣 웃고 갑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4-12-23 14:18   좋아요 2 | URL
저 뒤로 넘기면 다른 내용들 나오면서 결론이 저거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진 않았고, 하여간 먹을 걱정만 하는 나는 천재..로 결론 내렸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이십대의 저는 별로였습니다. 영 별로였어요. 그런데 누군가 저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ㅠㅠ

감은빛 2024-12-24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의 하루종일 뭐 먹지 라는 생각을 안 하는 편입니다. 뭔가 선택하는 잘 못 해서 누군가 정해주길 바라는 편이고, 만약 혼자 먹는다면 그냥 바로 떠오르는 익숙한 것들을 먹어요. 뭐 먹지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거 너무 귀찮고 힘들어요. 그럼 저는 똑똑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군요. ㅎㅎㅎㅎ

배정남이 누군지 몰라 또 검색해봤어요. 뭔가 알듯 말듯 그랬는데, 부산 사투리를 쓴다는 걸 읽고 나니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얼핏 본 기억이 있어요.

삼십대 혹은 사십이 다 되어도 혼자 제대로 된 음식을 해본 적이 없다면 마늘과 양파를 까 본적이 없겠죠. 아니면 이미 까서 씻은 걸 사먹었거나. 그런데 외국어를 저렇게 한글 발음으로 배우는 건 다락방님 말씀처럼 문제네요. 알파벳을 모르는 것도 아닐테고, 스페인어가 힌디어처럼 문자를 익히기가 매우 어려운 언어도 아닌데 말이죠.

스페인어 아주 잠깐 해보니 재미있었어요. 이탈리아어도 재미있었구요. 그런데 일단은 일본어와 중국어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어요. 힌디어는 문자를 조금 익혀보다가 요즘은 다시 손을 못 대고 있네요. 이건 일단 문자만 한번 제대로 배우고 나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금 제게 일본어가 그런 것처럼. 올해 초에 히라가나를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 아주 긴 시간 일본어는 자주 듣고 접해서 익숙한 언어이긴 했지만, 히라가나와 가타가나 등 문자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늘 한계를 느끼는 언어였거든요. 요 단계를 딱 넘어서니 정말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힌디어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자목련 2024-12-24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의 20대를 모르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열심히 사셨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요!
천재 다락방 님, 오늘 점심은 무얼 드실 건가요? ㅋㅋㅋ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사람들이 읽기를 싫어한다는 착각
김지원 지음 / 유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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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식구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는 한가로이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됐는데, 영화에서는 여자 등장인물이 남자 주인공인 킬러에게 사건을 의뢰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내게 보이는 건 남자 주인공의 얼굴과 여자 주인공의 가슴이었다. 화면의 앞부분은 여자 주인공의 살짝 드러난 가슴 그 뒤에 남자주인공의 얼굴인건데, 영화의 흐름으로는 남자주인공이 여자등장인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지만, 그걸 빙자해 시선을 여자의 가슴에 고정시키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불쾌했다. 보다말고 이 장면에서 내가 느끼는 불쾌함에 대해 설명해줄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영화보기를 멈추고 내 책장 앞으로 가 섰다. 지금의 내 기분을 적절하게 표현해준 어떤 책이 내 책장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책을 아마도 미리 사두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거다. 그렇게 꺼낸 책은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 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책은 내가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내용이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또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관점을 보여주어 밑줄도 그어가면서 읽었다. 기대한 걸 얻진 못했지만 얻을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걸 얻었던 셈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저자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어느 정도 공감하더라도 또 어느 부분에서는 나랑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건 좀 아닌데,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게 독서가 아닌가. 그런데 '김지원'의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에 있어서라면, 나는 독자로서 저자의 생각에 백프로 동의했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김지원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김지원은 책의 효용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나라 독서량이 매우 적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읽기 자체와 멀어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SNS나 유튜브, 인터넷의 기사등을 통해 읽기 자체는 더 늘었다는 사실부터 얘기한다. 그런데 독자가 읽기를 원하는 건 양질의 글이라는 당연한 사실도. 대충 훑고 읽다 말게 되는 이유는 수없이 만나게 되는 텍스트들이 모두 이 글과 저 글의 짜집기이며 그로 인해 글이 담고 있는 정보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거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정말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진짜 정보는 얼마나 되는가. 정보 면에서도 그리고 지식 면에서도 저자가 연구하고 조사하고 깊이 생각한 책만한 것을 따를 것은 없다고 얘기하는거다. 원천적 정보, 정확한 정보가 거기, 책에 있다고. 책이야말로 정보의 순도가 높다고 말이다.


그뿐인가. 책은 지식을 얻는 최고의 수단이며 심지어 읽는 동안 광고에 눈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하나를 얻으려고 펼쳤다가 곁가지로 뻗어가는 수많은 다른 것들을 얻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단순히 하나의 현상을 보고 그치는게 아니라 왜, 어째서를 더 파고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책이라야 가능하다. 그렇게 책에 대한 예찬에 이어 그 책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의 서문과 그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도서관까지. 알고자 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리가 책을 도구로 삼는다면 언제나 그 이상을 가져가게 될거라는 거다.


여기 어디 틀림이 있을까. 나는 이 모든 책에 대한 말들에 동의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답을 구하고 싶다면, 그 때도 역시 책으로 향하면 된다. 그러면 책은 나를 원하는 답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그보다 더 멀리 데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저자의 책에 대한 의견에 모두 동의하면서 나는 꼭 한가지를 더하고 싶다.

그건 책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SNS 를 통해 보여지는 단편적인 정보와 혹은 단편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의 인생에 대해 멋대로 추측하게 된다. 그들의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유함을 순식간에 판단하게 되는거다. 그 사진 뒤에 그 사람의 기분과 행동이 있고 나아가 삶이 있다는 것까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책에는 그 뒤에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사랑의 묘약]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나서 고통스러워하며 무얼할까 고민하다 감자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는 여자가 나온다. 어떤 사람은 감자 껍질을 벗긴다는 단순한 행위에 남편이 떠난 후의 고통을 담았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책이 들려줄 수 있는 거다.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장애인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비문명적이라 말했다는 자극적 기사가 나오면 그에 호응하며 역시 시위에 참여한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덧대진다. 그러나 '박경석'의 [출근길 지하철]을 읽으면, 그 지하철 시위를 하기 전까지 장애인들이 얼마나 오래 수많은 방식으로 싸워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경 쓰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도. 기사의 타이틀만 보고 비난하기는 쉽고 우리는 몰랐을 때 혐오하기 쉽다. 그러나 행위자의 행동 이면에 그 사람 고유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소식까지 인터넷의 수많은 기사 오려붙이기 혹은 요약하기가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왜'를 더 알고 싶다면 책을 펼쳐야 한다. 누군가의 생각없는 혐오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펼쳐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른 무엇이 아닌 책이 들려줄 수 있다. 그게 사람들이 '굳이' 책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나는 우리나라 독서 인구가 적은 이유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책을 일단 펼쳐서 읽으면,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정보와 지식과 무엇보다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다음 책을 그리고 또 다음 책을 자꾸 찾아서 읽게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일단 책이라는 문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두 권이 열두권이 되는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이야기에 더해, 답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 때문에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책장 가득 다 읽지도 못하면서 가득가득 책을 쌓아두는 건, 언제든 내가 가진 물음에 기꺼이 답해줄 수 있는 어떤 책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나의 이 의문에 답해줄 책이 내 책장에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책장 앞에 서서 책등을 살피곤한다. 그렇게 책을 꺼내어 답을 찾을 때도 있지만 답을 찾지 못할 때 조차도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게 가능해진다. 하나를 알고자 하면 조건없이 심지어 광고도 없이 그보다 많은 걸 내어주는게 책이다. 김지원은 내내 그 얘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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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2-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다...
책을 마구 쌓아둘 핑계로 아주 좋아!!!!!!! ㅋㅋㅋㅋㅋ
락방아 근데 이 글 서체가 평소랑 좀 다르구나?! 작업실 출근 안 함?!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12-23 10:57   좋아요 2 | URL
작업실 출근 햇습니다!! 이 서체가 더 좋은것 같아요. 노안에게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4-12-23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12-2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 온 국민 독서장려위원회 회장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저도 서체 보고나서 약간 놀라서, 어? 라고.... 말했답니다. 노안은 슬프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12-23 11:40   좋아요 1 | URL
대한민국은 나를 국민독서장려위원회 회장으로 모시고 연봉 일억 맞춰줘라! 그러면 내가 이 회사 퇴사한다!! ㅋㅋㅋㅋㅋ

2024-12-23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4-12-23 11:44   좋아요 0 | URL
관용차 필요없다! 연봉만 일억으로
맞춰줘라! 맞춰줘라! 맞춰줘라!!! 🔥🔥🔥

감은빛 2024-12-2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북플로 이 글을 읽으니 다른 분들이 서체 언급을 하시는 걸 이해하지 못 하는군요. 나중에 웹으로 다시 들어와봐야 겠군요.

저는 사실 이런 류의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뻔히 다 알만한 이야기라고 미리 생각해버리거든요. 뭔가 일부러 가르치려고 하는 책들. 이건 몰랐지 라는 느낌의 책들엔 잘 손이 가지 않아요. 이 책도 제목만 봤으면 절대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니 궁금하네요.
 
지구에 온 너에게 비룡소의 그림동화 283
소피 블랙올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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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좋고 이야기도 좋고 한마디로 최고다!
어린 아이들 있는 집이라면 이 책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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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2-2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난 패스!

다락방 2024-12-23 12:06   좋아요 0 | URL
패스~

독서괭 2024-12-2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추천한 사람으로서 뿌듯😘

다락방 2024-12-23 12:06   좋아요 1 | URL
읽으면서 ‘역시 독서괭 님은 틀림이 없군!‘ 하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에그박사의 이건 누구 똥?! 1 에그박사의 이건 누구 똥?! 1
김덕영 그림, 박송이 글, 이승현 감수, 에그박사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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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고 처음으로 어떤 똥은 향긋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를테면 팬더의 똥같은 것..

하여간 내 똥은 아님. 내 똥은 사자 똥 비슷할 듯...(냄새에 대한 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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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12-2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왜 냄새 이여기를 😭😭

다락방 2024-12-23 12:06   좋아요 0 | URL
냄새는.. 저의 과제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