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이라도 뜨거웠을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9
베벌리 나이두 지음, 고은옥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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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일일지라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그 인식은 확연히 달라진다.
<나는 한 번이라도 뜨거웠을까?> 바로 그러한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은 물론 허구이나 그 사건의 배경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1951년에서 1953년 사이의 케냐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케냐가 영국의 식민지배하에 있던 일들을 매슈와 무고라는 두 소년의 각기 상반된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영국 국민들 중 일부는 식민지배하의 케냐에 정착해서 거의 강제적으로 케냐 원주민들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 온 터전을 하루 아침에 빼앗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영토를 빼앗은 영국인들의 노예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게 된다.
원래 주인이였던 그들이 이방인의 하인으로 전략하고 만 것이다.

그 상황에서 케냐인들은 마우마우라는 조직을 통해서 영국인들(백인들)로 부터 자신의 땅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하게 되고, 이를 거부하는 자민족을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집의 아들인 매슈와 하인의 아들인 무고는 시대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우정으로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적어도 매슈의 집안에서는 백인이 매슈의 가족과 하인인 무고의 가족은 평화 속에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계급과 신분의 차이는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모든 상황을 뒤엎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아버지의 친구 아들이자, 매슈의 기숙학교 반친구인 랜스와 매슈가 도가머리뻐꾸기를 구어먹기 위해 마굿간 뒤에서 불을 피우고 이 불을 제대로 끄지 않아 그 날밤 화재가 발생한다.
이 불로 마굿간 소실되고, 말은 죽게 되며, 옥수수밭은 전체가 타버린다.
랜스의 협박에 매슈는 자신과 랜스의 행동을 고백하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평소 하인들을 믿으면 안되고, 그들은 언제라도 주인을 배신하고 마우마우들과 한패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 랜스의 아버지는 이일로 매슈의 집에서 일하는 모든 하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조사를 하게 된다.
결국 매슈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의 형이 마우마우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매슈의 아버지는 무고의 가족과 다른 모든 하인들의 결백을 믿지 않게 된다.
이 책은 결말이 없다.
매슈는 그 뒤 어떻게 되었고, 무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하지 못했던, 주춤했던 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마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과연 두 소년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이가.
함께 어울렸지만 근원에는 그 차이가 항상 존재했던 두 소년에게 그 누가 잘못을 말할 수 있겠는가.
친구였지만 친구가 될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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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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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 책이였다.
인간이 타인의 삶에 얼마나 무관심할 수 있는가, 내가 아니여도 누군가는 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다.


제노비스가 모즐리의 습격을 받고 살해당하고 뒤이어 강간당하기까지 무려 38명이 보고 있었음에도 실제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단 세명 뿐이다.

처음 모즐리의 공격을 받는 제노비스를 보고 모즐리에게 소리쳐 그가 달아나게 한 남자 모제,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 계단 아래에서 다시 돌아 온 모즐리에게 재차 죽임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제노비스의 옆집에 사는 소피에게 전화 한 남자 로스, 그리고 그 전화를 받은 후 적극적 조치로서 경찰에 신고한 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준 유일한 사람인 여자 소피.

이 사건은 그냥 신문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고 넘어 갈 사건이였으나 관할 경찰서장 머피가 자신의 친구인 뉴욕타임즈 뉴욕 지역 편집장인 로젠탈에게 이 사건의 진짜 모습을 알려 주면서 제노비스 사건은 다시 재조명을 받게 되고, 재취재 결과 무려 38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유지함으로서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국 전체는 충격과 공포로 빠져 들게 된다.

실제 모즐리도 처음 그녀를 길에서 칼로 찌른 후 누군가의 외침에 도망을 갔다가 분명 그 이후에 나타나야 할 경찰자가 없다는 것과 주변의 아파트 몇몇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다른 조치가 없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다시 제노비스에게 범행을 가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그 사이, 제노비스는 차디찬 죽음과 끔찍한 공포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개개인의 이기주의적 성향을 볼 때 분명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려 38명의(추후 조사결과 그 이상이였다는 보고가 있음) 사람이- 단 3명을 제외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어이상실이 아닐 수 없다.

제노비스 사건은 미국에 911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방관자효과 [傍觀者效果, bystander effect :구경꾼효과라고도 한다. 방관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경우, 곁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현상이 방관자효과이다. 방관함으로써 생기는 여러 현상 가운데서도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낯선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때 흔히 쓴다.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는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나 성격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그러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와줄 확률은 낮아지고,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도움을 주겠지 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인데, 이렇듯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가리켜 심리학 용어로 '책임분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관자효과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일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도 있는데, 보통 정치가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의학 용어로도 쓰이는데, 이 경우에는 세포에 방사선을 쬐면 방사선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주변 세포도 방사선을 직접 쏘인 세포와 비슷한 영향을 받는 현상을 가리킨다.


출처-방관자효과 [傍觀者效果, bystander effect ] | 네이버 백과사전] 라는 범죄 학술 용어까지 생겼다.

내가 아니여도 누군가가 나서서 도와 줄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는, 이 사건의 밖에 서 있는 나는 과연 그때 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하고 말이다.

"나단, 당신이었다면 정말 내려가 봤을까?"(p.221)

제노비스의 죽음 후, 그녀의 가족들은 법원에 그녀의 묘에 대한 접근금지 신청을 했고 허가 신청을 받아냈다고 한다.
묘지관리인은 그녀의 묘에 대한 묻는 사람들에 대해 정중한 거절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진정 그녀가 관심이 필요하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절박했던 그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미루었던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묘를 찾는 것일까?

과연 그녀의 살인앞에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들은 과연 무죄일까? 유죄일까?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그 악행을 보고도 저지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다."(p.229)

제노비스 살인사건(1964.3.13)


1964년 3월 13일 새벽 3시 15분 미국 뉴욕 퀸스 지역 주택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 여성이 쓰러졌다.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27살의 이 여성은 술집에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자신의 승용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우고 집으로 걸어가다 괴한의 칼에 찔렸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이웃 집들에 불이 켜졌다. 누군가 "그 여자를 놔줘!"라고 소리치자 괴한은 달아났다.

그러나 아파트의 불이 꺼지고 어두워지자 괴한은 다시 제노비스를 덮쳤다. 다친 몸으로 집으로 향하던 제노비스는 다시 괴한의 칼에 수차례 찔려 비명을 질렀다. 다시 아파트에 불이 켜졌고, 괴한은 도망쳤다. 그리고 불이 꺼지자 괴한은 다시 돌아와 제노비스를 난자했다. 세 차례에 걸친 끔찍한 범행에 제노비스는 절명했다.

범행시간 35분 동안 사건 목격자는 모두 38명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노비스를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목격자들의 이 같은 행태가 신문에 보도되자 도덕성 결여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내재된 본성임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걸 주저하게 되는 방관자 효과(제노비스 신드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라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한다.

제노비스 사건은 인간 본성의 숨겨진 일면을 들춰낸 사건이다. 한편으로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노비스를 살해한 윈스턴 모즐리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에 있다. 그는 뒤늦게 죄를 뉘우치고 가석방 청원을 내기도 했지만 제노비스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출처 : 부산일보| 기사입력 2009-03-0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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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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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무라는 경찰 조사결과 그녀가 무려 1년 가까이 자신의 집 손님용 방의 이불 넣는 미닫이 벽장 속에서 살았던 것을 알려 준다.
시무라는 그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된다.
자신은 잘 살아 온 듯 하지만 알고보면 그녀와 마찬가지로 외로운 한 사람이였던 것이다.
과거와의 연결고리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류 속에서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살았던 것이다.
시무라는 진심으로 그녀의 처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가 처벌받는 걸 원치 않게 된다.
4개월 가량을 실형을 살고 나온 그녀는 그를 찾아간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왜 그의 집에서 살았는지에 대한 사실을 그에게 들려줘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곳은 그녀의 옛집이였다.
어쩌면 그녀가 모든 가족을 잃기 전까지 행복했던 기억 속의 8년을 보낸 추억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녀가 자신의 과거 속 행복했던, 따뜻했던 그곳을 찾아 간 것이다.
그녀는 그저 따뜻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놀랍도록 기묘한 이야기는 실화이다.
실제 2008년 5월 일본의 실린 기사를 바탕으로 삼았다.
자신이 유년기 시절 살았던 집에서 현재의 집주인 몰래 무려 1년 가까이를 살아 온 58세의 실직 여성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섬뜩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모든 공간과 나의 모든 물건들을 그녀와 공유한 셈이지 않는가.
실제 시모라는 얘기한다.
"이젠 도무지 내 집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라고 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 보게 만든 그녀로 인해서 그의 온전한 삶이 파헤쳐 져서 그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으로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 집은 시모라보다 그녀에게 더 어울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2칸으로 분리된 이불장 안에서 그가 내는 모든 삶의 소리를 들으며 함께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만약 자신의 부주의로 들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런 삶을 살았을까?
그녀의 삶이 서글퍼지면서도 한편으로 그녀는 진정한 삶의 안식처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책이다.
처음엔 기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글을 읽어가면 갈수록 서글픔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책이였다.
나가사키에 사는 시무라는 56세의 독신남이다.
가족이라고는 거동이 불편한 나이 많은 아버지와 결혼한 여동생 내외가 전부이다.
그마저도 따로 산다.
결국 시무라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사는 독신남인 것이다.
시무라의 일상은 거의 틀에 박힌 듯한 생활이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일정한 시간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 온다.
다른 동료들과 같이 퇴근 후 한잔도 없다.
시무라는 자신이 다르게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시무라의 삶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강박증 환자이리만치 정리된 삶을 살던 그의 일상에 확실히 단정지을 순 없지만 미묘한 변화와 차이가 생기는 걸 어느날 시무라는 감지한 것이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착각이나 실수이리라 여긴다.
그러면서 자기 이외에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음료수에 눈금이 적힌 자를 담궈둔다.
다음날 냉장고 속 음료수는 줄어 들어 있다.
확실하다.
누군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자신의 집에 들어 온 것이다.  
시무라는 급기야 집안 곳곳에 비디오캠을 설치하고 회사로 출근해서 자신의 집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부엌에서 움직임이 관찰된다.
여자가 있다.
그녀는 거실창의 햇볕을 감상한다.
시무라는 결국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경찰은 출동한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무방비상태로 체포될 것을 떠올리자 시무라는 집으로 전화를 건다.
하지만 그녀가 받을리 만무하다.
결국 그녀는 잡혀 가고,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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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이름 1 왕 암살자 연대기 시리즈 1
패트릭 로스퍼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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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책으로 읽진 않았다.
책을 보기 전에 이미 영화로서 더 유명해졌고, 영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책을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떨까 했다.
읽는 내내 생각한 것이지만, 정말 그 어떤 문학 장르들보다 판타지 소설은 작가의 역량을 평가하기에 적합한 분야가 아닌가 싶다.
기존의 두 시리즈의 성공으로 많은 아류작들이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두 소설을 능가하는 이렇다할 성과는 낸 소설은 없는 듯 하다.
책 속의 주인공들과 배경 하나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작가가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이젠 더 이상 특이하고 독창적인 인물들과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 내기가 많이 힘들어진 듯하기 때문이다.
책의 시작 부분에서는 등장인물과 새로운 배경 설정에 대한 익숙함을 가지기 위해 다소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판타지 소설의 특성상 이 책의 줄거리나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먼저 얘길 해버리면 시시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람의 이름>이라는 판타지는 이전의 두 시리즈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아이들을 위한 마법같은 이야기도 아니며, 괴물과 싸워서 이기는 왕과 요정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시작은 분명 어느 중세 어느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서커스 단원의 일원이였던 소년의 모습부터였다.
평범함을 가장한 채로 살아가던 코보스(소년)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과 새로이 등장한 연대기작가의 출현으로 자신의 과거로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소설은 시작되는 형식이다.
읽어 가는 순간마다 지루함이란 전혀 없다.
다른 소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도 없다.
그래서 새롭고 흥미로웠다.
벌써부터 이 책이 영화화 된다면 "크보스는 누가 맡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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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새 날다
구경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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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유쾌하고 즐거웠다.
작가 특유의 위트가 느껴졌다.
말로만 광고가 아니라 정말 글을 읽는 내내 웃음 짓게하는 문장들이 제법 나왔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묘하게 웃기는 순간들이였다.



출처 : © encyber.com

이미 8년 전에 위암으로 죽은 엄마의 복수를 하겠다는 설정 자체가 아이러니 하면서 독특했다.
더군다나 그 복수의 대상(국제상사 주인 여자)이 엄마의 죽음에 연관성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말이다.
그때부터 아버지, 딸, 아들은 각자의 맡은바 역할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사격장을 다니며, 어딘가에서 구한 리볼러를 안방 깊숙히 간직하고 다닌다.
아들은 국제상사에 취직해서 여주인의 동태와 모습들을 파악한다.
그런 와중에 딸은 과연 이 복수가 정당한가에 대한 자신만의 명분을 찾기 위해 여사장을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복수를 한다는 명복으로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게 뭔가 비밀을 간직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딸은 자신들의 복수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러 갔던 만남에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과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아들은 염탐하러 취직한 국제상사에서 오히려 그 능력을 인정받고 좋아하는 사람까지 만나게 된다.
이렇게 상황은 애초에 그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딸과 아들은 점점 더 복수에 대한 명분과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차에 겨울이 되고, 첫눈이 오늘날 아버지가 불현듯 사라진다.
리볼버와 함께...
결론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제 그만~~

저자는 왜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까?
소설 속에 나오는 아버지, 딸, 아들, 국제상사 여사장 모두는 어쩌면 틀에 박힌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현 모습에 불만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들에 익숙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이상 날지 못하는 키위새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 가족에게 있어서의 복수는 자신의 일상에 대한 최초이자 최고의 일탈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키위새는 날았다고 봐도 좋을까?
아님, 여전히 뒤뚱거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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