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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인 데이비드 흄은 ‘자아를 그저 환상’이라고 했다.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 역시 ‘자아를 허구’라고 했다. 뇌과학서인 본서에서는 유독 두드러진 비판인데 대니얼 데닛은 “뇌에서 자아를 찾겠다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의 자아 곧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본서는 뇌의 각 기능이 정지될 때 인간이 겪는 오류를 실제 사례로 예시하며 인간의 자아, 다시 말해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저작이다.


자아에 대한 본서의 의문은 결국 뇌의 국소병변이 자아의 완전한 상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깨우침도 남기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게 한다. 저자는 정체성을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개인 정체성이 자아(나)와 다른 자아들(타인들)과 구분하는 방식이라면 사회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개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가 저작으로 완성하기까지 정체성의 문제를 심각히 여긴 것은 그의 출신과 경력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저자는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으로 영국에 이민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외모와 언어 등에서 차이를 처음 자각했고 그 차이를 줄이고자 개인적인 노력을 이어온 사람이다. 게다가 저자가 전공한 신경과는 영국 전체 200명 정도의 소수 백인들이 장악했던 영역으로 이에 변수처럼 침투하게 된 저자가 인정받는 의사가 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전적이 정체성이라는 문제,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고 저자 역시 이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데이비드’라는 바닥핵 뇌졸중으로 병적인 무관심 상태가 되어 자신의 생계와 주위와의 소통에 전혀 개의치 않게 된 인물과, ‘마이클’이라는 관자엽(측두엽)이 쪼그라들어 단어를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지식 결핍자가 등장하며, ‘트리시’라는 해마와 마루엽(두정엽) 그리고 신경전달 체계에 이상이 생겨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와히드’라는 뒤통수엽(후두엽)에서 마루엽과 관자엽으로 전달되는 뇌 신경 체계의 교란으로 환영을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윈스턴’이라는 오른쪽 마루엽에 뇌졸중이 생겨 왼쪽 무시라는 왼쪽에 있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수’라는 이마관자엽 치매에 걸려 자제력을 잃고 막무가내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과, ‘애나’라는 왼쪽 마루엽 바깥에 거미막낭이 자라 오른쪽을 인식도 못하고 오른쪽 반신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한다. 대부분 약물로 증상을 완화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치료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짧게 인용한 예들에서도 상당한 문제라고 인식하겠지만 본서에서 읽고 보면 문제가 상당함을 느낄 수 있고 실제 임상의 입장에서도 그랬겠지만 당사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증상들로 개인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정체성이 함몰되면 사회적인 사망 다시 말해 인간관계와 사회 조직에서의 사망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 예시 이외에도 사회에서 넘치고 있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삶을 선택하는 경우, 사회적인 사망이라기보다는 사회로부터의 탈출이랄 수 있겠으나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강제적으로 이런 사회적 사망을 겪는 이들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과 다른 자신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의 괴로움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자아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도 한다.


뇌에서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선언과는 다르게 뇌의 기능장애가 인지와 행동에 장애를 준다면 우리는 어느 선까지의 장애에서 자신을 기존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행동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바가 모두 달라진다면 그때도 ‘바라보는 내가 진짜 나’라며 ‘나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다’라고 쉽사리 말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지각, 주의, 일화기억과 의미기억, 동기 부여, 행동 제어와 신체 도식 같은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모두 우리 정체성에 기여하며’ ‘성격 형질과 감정 반응도 자아 정의에 중요’하지만 앞서 예를 든 인물들의 사례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본서는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고 인식하며 살아가듯 우리의 자아를 정의하는 요소들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본서는 나란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돌아본 적 있는 분들이라면 상당한 끌림과 깨우침을 안겨줄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아웃사이더 #마수드후세인 #과학책 #신경과학 #뇌질환 #뇌과학 #과학책추천 #뇌과학책추천 #도서협찬 @kachibooks


※ 가제본으로 읽었는데 리뷰를 올리려니 아직 책이 출간 전이네요. 우선 페이퍼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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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거꾸로 읽는 지구의 역사


왜 주제가 멸종인 걸까?


저자는 멸종이라는 주제로 한국적인 그리고 저자만의 스타일로 빅히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왜 멸종이란 주제여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잔혹한 진화론]에서 저자 사라시나 이사오 님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펼치며 누구에게나 명백한 현실일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듯 본서의 저자 이정모 님도 멸종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빅히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대중에게 빅히스토리의 의의의 하나를 선명히 전할 수 있다고 믿어서인 듯했다. 저자가 전하는 멸종의 의의는 한 종의 멸종이 다른 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으로서 바라보며 지구 내 생명체의 역사 전체로 크고 넓게 시야를 확장하게 한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해설


저자는 가상의 미래 2150년 인류 멸망 이후에서 시작해 2050년 화성에 테라포밍을 시도하는 있을 법한 가정으로 환경에 적응을 너머 변화시키며 개척하려는 과정에서부터 서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부터 환경의 변화가 생물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부빙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로 생물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어려움을 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작은 인공지능 그리고 화성 탐사로봇 그리고 범고래와 펭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다. 점차 시대를 거슬러 오르며 네안데르탈인, 공룡을 거쳐 끝내는 바다와 달의 대화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가 그 시대의 주역으로 환경의 변화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도태되어 결국 멸종에 이르렀음을 서술하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 탄생의 비밀까지 재치 있고 기발한 서술로 전하고 있다.

저자는 시대를 역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각 진화의 정점에서 하나의 생물종이 멸종해 가는 이야기로 빅히스토리를 쌓아나간 것이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저자는 여러 박물관장을 거치고 과학기술 훈장 진보장을 받은 인물로서 대중에게 과학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해온 인물이다. 빅히스토리를 그리며 환경변화가 생물종의 멸종을 불러온 과정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어려움을 직시하신 분이다 보니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차적인 효과도 저술에서 노리신 것 같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전 세계 몇천 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은 지금도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현재의 기후위기가 근거가 조작되고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재의 환경문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관점만으로 저술의 배경을 삼은 것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히스토리 속에서 환경이란 생물종에게 지대한 영향을 행사해왔기에 환경을 우려하는 시선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빅히스토리를 국내 저술로 만나본다는 의의


본서의 소개에서 이정모 관장님을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개가 전혀 과찬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필력이라는 것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다큐보다 감동적이다!”라는 책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 필력은 타고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물론 유익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을 자연사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깊은 감상으로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저자의 고심도 깊게 느껴지는 책이다. 빅히스토리를 한국인 저자의 책으로 만나볼 기회 그리고 자연사를 지루하지 않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어볼 기회를 많은 분들께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찬란한멸종 #이정모 #다산북스 #도서협찬 #빅히스토리 #자연사 #진화 #멸종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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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마지막 대목에 금권경제라는 말이 결국 등장한다.

초부자들이 정계에 후원금과 로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 제정에 힘을 행사하는 과정, 그리고 다보스포럼 같이 경제 계층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자신들 입맛대로의 원칙을 세계기준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선 장에서 이미 금융가들은 경제적 재난을 야기하거나 은행을 이용해 손쉽게 타인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어떠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언급했었는데 이번 장에서는 마약상의 재산을 세탁해준 사례도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상위 계층은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경제기구 등 권력기관에 일선의 인물들을 배치하면서 자신들 입맛대로의 법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세피난처와 자회사 등을 이용한 탈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들의 자선사업도 말 그대로 사업의 일환으로 재단을 만들어 기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윤을 추구하며 투자를 지속한다고 지적한다. 이미 빌 게이츠로 인해 다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초극부층이 말하는 자선은 자선을 빙자한 투자가 명백하다. 자선과 기부를 담당하는 재단으로 빌 게이츠는 식량과 농업에 투자하고 백신 개발과 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창출해 냈다. 일반인이 가늠하는 자선사업과 초극부층이 생각하는 자선사업은 그 맥락이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전이라고 저자가 이름한 결론 직전의 장을 보면 저자는 기후위기를 야기한 것이 무분별의 생산시설 확충 등으로 부를 추출한 극부층들에서 문제를 찾으며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대안 모색을 사회적으로 해나가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문제로 인한 성장의 위기를 1960~1970년대 초 다보스포럼의 전신인 유럽의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이 1972[성장의 한계]라는 책으로 출간되고 이후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된 것이 오래이다. 그 이후 지구온도의 약간의 하강이나 약간의 상승에도 지구냉각화다’, ‘지구온난화다그러면서 거듭 세계 위기라는 차원으로 몰아갔었다. 그러던 과정의 하나가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이른 것이다. 초극부층은 이미 거대 자본을 투입해 탄소저감을 위한 연구개발을 거의 끝내놓은 상태고 탄소저감과 친환경 시스템과 기계들이 벌써 수백과 수천 가지로 개발을 이루었고 또 개발 완료를 앞두고 있다. 극부층은 창조적 파괴라는 원칙을 대대적으로 적용해 거대한 파괴는 거대한 규모의 부를 창출한다는 원칙 실현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주의를 따라 간다는 건 결국 그들의 새로운 부의 창출을 위한 혁신에 앞장선다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부자들의 정체를 알고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균형을 인식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자들의 정체를 안다고 그들의 실체를 밝힌다고 사태가 전환될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의 변화는 겪지 않고는 별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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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부자들을 제자리에 두기]를 읽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저자의 부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공유부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자원과 자원을 이용한 부의 창출 그리고 제도를 포함한 부를 공유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로소득이 가능한 세계에서는 부 자체가 소유권이자 권력이 되어 기여도 자체가 불공정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부라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고용을 불공정하게 만들어 인턴제도라던가 비정규직 같은 제도가 생겨나며 이를 악용하여 피고용인을 쓰고 버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원 활용과 저자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지대에 대한 공유로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타파가 가능하다.

 

[3부 부자는 어떻게 더 부유해지는가]를 읽고

저자는 브레턴우즈 체제 때는 이자율이라던가 환율이라던가가 안정적이며 고용과 노동환경에서도 안정성이 있었지만 이후 상당히 불공정하고 불균형적인 부라는 권력의 편향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는 불로소득자들이 경제의 균형을 좌우할 수 있어서이고 잉여자본을 가진 그들이 경제적 재난들을 야기하고 그를 통해 부의 균형을 깨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구제금융의 수혜는 결코 수혜가 아닌데 민영화와 규제철폐 그리고 노동환경의 유연성 등을 요구하는 자체가 부의 균형을 상당히 심각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CEO들의 인센티브 등이 지급되는 양식을 보면 회사 망하고 다른 회사에 인수 합병되는 상황에서도 막대한 인센티브를 받는데 이는 애초에 회사의 발전이 주주들의 목적이 아니라 회사 발전과는 다른 양식의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망하게 하면서도 타 회사에 인수되며 타 회사의 주가 상승에 유익하면 이들은 그를 노리는 것이다. 회사의 사원들에게는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상황이 되는데 부의 불균형은 이렇게 불공정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반강제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에서의 기여도에 따른 부의 분배를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한 장들이 엿보이는데, 내가 생각해도 잉여자본을 가진 이들이 자본을 투자한다면, 능력을 갖춘 이들이 발상하고 기획하고 생산하고 마케팅을 하는데 기여도에 따라 부가 분배된다면 현재의 경제 제도하에서의 분배와는 다른 양상을 띠어야 하지 않나 싶기만 하다.

 

저자의 지적들로 그간 문제라고 생각해 오던 것들에 대해 구조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것 같아 참 유익한 독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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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부층에 대한 비판이 담긴 본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소개하는 1부에서는 벌이, 투자 등을 정의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벌이를 즉 돈을 번다는 개념을 가치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으로 본다. 극부층은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기반을 얻고 타인에게 노동을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인 돈을 획득하니 극부층에게 번다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투자라는 개념도 사회 인프라나, 교육, 기술 개선 등과 같은 미래에 투자하는 것과 투기적 투자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저자는 불로소득도 정당한 불로소득과 추출하는 불로소득으로 나누어 보는데 기초생활비와 같은 복지비용과 태생적(부자의 자녀로 태어남)으로 얻은 자산을 통해 이후 쉽게 버는 것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저자는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얻는 방법으로 지대, 이자, 생산에서 나오는 이윤으로 세분화한다. 지대를 소프트웨어 제작이나 지적재산권 같은 개념까지 확대하고 있기도 하다. 디즈니사는 지적재산권이 없는 [피노키오], [신데렐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해당 애니메이션의 판권을 더욱더 연장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고, ‘우리의 모든 성취는 이전 것들을 훔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한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 소프트웨어들의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을 거듭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이자에 대해서는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이자를 많이 받는데 내가 보기에도 이건 니 담보 내놔라로 보였다. 대출 이자를 갚기가 부담스러울 사람에게 담보를 빼앗을 요량이 아니면 더 갚기 어려워지라고 이자를 높일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더 부유층일수록 이자를 많이 받아야 할 텐데 이자율은 임금이 낮은 사람일수록 높다는 게 불합리해 보인다. 그리고 나이지리아가 1985년까지 국제 금융기구들에 받은 대출이 50억 원 일 뿐이었는데도 160억 원을 갚고 나서도 280억 원의 빚이 남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복리 제도는 빈곤국가뿐만이 아니라 빈곤계층 전체의 골수를 빨아 먹는 정책이 아닌가 싶다. 이자를 받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회상도 비판하는데 기회비용을 볼 때 당연히 이자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다른 데 투자했으면 벌었을 가능성만 있는 게 아니라 벌었을지 잃었을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생산에서 나오는 이윤도 그저 비용 투자만 해서 아이디어와 제작, 마케팅, 노동력 모두를 동원 받으며 이익의 절대다수를 자본가가 자기자본(사실 법인에서의 자본금은 공금이 아닌가 싶다. 자본가의 주식도 증여와 상속이 되는 자체가 문제이지 않은가 싶다. )으로 삼을 수 있는 경우가 이전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본서에서는 자본가의 생산에 대한 투자도 불로소득과 다르지 않게 보았다.

 

여타의 투자 같은 경우도 극부층은 내부자 거래와 시장 조작할 능력이 된다는 데 문제가 크게 인식되었다. 이를 테면 팬데믹 채권같은 경우 팬데믹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가에 기존에 없던 것이 창조된 것이고, 초극부층들은 용케도 코로나19 백신 제작 제약회사에 투자를 했으며, 미국 CDC는 용케도 중국 우한 연구소에 코로나19 연구에 비용을 지원했으며 인간이 더 걸리기 쉽게 변이하는 기능획득 연구비까지 지원했다.(미국 청문회에서 이미 확인된 사항을 언급하는 것이다) 대중의 죽음까지도 어쩌면 기획되었을지 모르는 시대라는 말이다. 대량 살상으로 초극부층이 떼돈을 벌 수 있는 시대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부층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냐는 옹호론에도 저자는 맞불을 놓는데 대부분의 일자리는 (근로자인) 대중이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창출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스타벅스, 맥도날드, 롯데시네마, 리바이스, 나이키 등등등 어느 매장이든 어느 서비스든 대중이 지불을 하니까 고용을 하고 생산과 판매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자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의 필요와 소비가 모여 일자리는 창출되어 온 것이다.

 

부자들이 대대적으로 대중의 골수를 뽑아 자기 이익만을 극대화하면서 이윤대비 약소한 기부만으로 명망을 얻는 것이 본서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힌 현실이라고 와닿게 된다. 부자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을 주장하는 책인데 대부분이 깊이 와닿는다. 이런 시각도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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