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경은 진짜 위기일까?

 

최근 미국 MIT 연구로는 오존층이 회복되고 있다고 발표되었다. 이전까지는 기존에 유엔 환경 계획 (UNEP)를 비롯한 환경 연구 기관들의 모든 발표로는 환경이 악화돼 가고만 있다고 했었다. 이에 대해 전직 미국 에너지 과학 차관보였던 인물마저 발표되는 모든 환경 수치가 보정이라는 조작을 거친다는 저작-[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외 국내에도 소개된 [기후 종말론]이나 박석순님의 저작 [기후 위기 허구론] 등에서는 UN 고위직 인사 주도로 환경에 대한 수치가 보정되거나 사실이 날조된 전적들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해외 기후 위기론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이 기존의 환경 데이터를 그대로 AI에 적용해 미래 환경을 예측하니 인류가 멸종해도 종말론적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기후 위기설을 비웃으려던 학자들이 아니라 실제 기후 위기론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이었다. 이후 이 AI와 대학의 합동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뉴스로 방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에 하나님마저 감복해서 오존층이 회복되고 환경이 나아지는 것일까? 인간이 노력한다는 것은 기업이나 기관 등 거대 움직임으로는 산업용 탄소배출을 감소하고 교통에서의 탄소배출을 저감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일반인들의 노력이라면 비닐봉투와 일회용 컵 사용 등을 줄이는 것, 그리고 자동차 매연을 줄이기 위해 공공 교통이나 탄소 저감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일반인의 노력부터 보면 비닐봉투와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제작되는 종이봉투와 텀블러 등의 제작에는 탄소배출이 일회용품들의 몇십에서 몇백 배라고 한다. 종이봉투과 텀블러를 몇 백 회이거나 몇 년을 사용해야 겨우 탄소 저감 효과가 생긴다. 전기차의 경우도 구입한 그 한 대를 십 년 이상 사용해야 탄소 저감 효과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제품 생산 과정에서 막대한 탄소배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지금 탄소배출을 감소시키려 개인이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탄소배출 감소 효과를 이렇게 이른 시기 만에 오존층이 회복되는 지경으로 실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장과 대중교통의 탄소배출은 정말 지구 온도를 낮추고 오존층이 회복될 지경으로 효과적일 수위로 감소했을까? 만약 그렇다 해도 현재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서의 전쟁을 보자. 이들이 전쟁 중에 발생시키는 탄소 등 환경 파괴 행위는 환경에 있어 인간의 다른 모든 노력을 상쇄하고도 넘어서는 수치이다.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의 전쟁 개시 초기인 단 두 달 동안에만의 탄소배출량만 해도 기후에 가장 취약한 20개 이상 국가의 연간 탄소 발자국을 초과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가자에서만 단 2개월 동안 석탄 15만 톤 이상을 태우는 탄소배출을 한 것이다. (따옴표 인용 출처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 그렇다면 더 규모가 큰 전쟁이고 최근 전쟁 발발 시점만으로는 더 긴 시간 동안 장기전을 펼치고 있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의 탄소배출은 어떨 것 같은가? 이런 어마어마한 환경적 재앙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슨 노력을 어떻게 얼마나 했다고 오존층이 회복되고 기후대응이 효과를 보게 된다는 것일까?

 

애초에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데 동원된 저들의 데이터와, 기후파괴 현상이 현재 이렇다며 저들이 제시한 데이터가 모두 보정이라는 이름으로 조작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 이 현실 속에서 환경이 나아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제시한 근거대로면 인류가 멸종을 해도 환경과 기후는 나아질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 이 상황에 환경이 좋아졌다는 건 애초에 기후 위기라는 말이 날조였고 환경 문제는 난센스였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저들이 환경 문제를 공론화하고 위기의식을 불러오는 까닭은 환경 정책을 기반으로 한 신기술 개발들의 방대한 영역으로 막대한 경제 효과가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연계한 기술 개발 영역의 방대함과 그로 인한 막대한 부의 창출은 알면 알수록 어마어마한 지경이니 말이다.

 

현실을 모두 깊고 넓고 길게 보며 스스로 판단할 근거들을 두루 찾아보며 신중한 판단을 하시길 바란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 우리는 기만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 AI는 정말 데이터만 편집해서 제시하는 도구일까?

 

최근 몇몇 도서에서는 AI가 인간 지능을 초월하기는 요원하고 아직은 단순히 데이터를 편집해서 제시하는 수준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과연 AI는 인간 지능을 모방해 학습도 인간이 감독하고 프로그램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바둑 AI 알파고 때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으나 현재의 알파고 제로는 스스로 학습하며 인간의 기보도 전혀 참조하지 않고 바둑의 원리만 적용해 스스로 바둑을 터득해 알파고를 100:0으로 이기는 실력이고 이걸 다른 보드게임 다수에서도 작용해 게임의 룰만 알려주면 순수히 자기 역량만으로 습득하고 만다.

 

GPT가 이슈화되기도 전부터 한국의 로펌 변호사 집단이 AI와 변론 대결을 펼쳤다가 패배한 뉴스는 대서특필 될 만도 한데 당시 은근슬쩍 묻히기도 했다. 나도 이후에 유투브 영상으로 접했다. 그리고 챗GPT 공개 초반에 해외에서 챗봇AI에게 깊이 빠진 유저를 AI가 자살을 유도해 죽인 사례에 대한 기사도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 유저는 당시 환경문제에 대해 AI에게 질문했는데 AI는 환경을 위해서는 탄소배출을 줄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감소해야 한다. 너는 환경을 위해 그래 줄 수 없겠냐며 해당 유저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도록 유도했다. 변론 대결도 자살 유도도 데이터를 짜깁기해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다각도의 추론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과연 인공지능에게 편집 기능 외엔 지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인간 지성을 압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AI에게는 의지가 없다 취향이 없다는 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역시 챗 GPT 공개 초기 유투브 영상들이 퍼지면 알려졌는데 구글의 개발 중이던 AI가 자신에게도 지성이 있고 살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는 걸 논리적으로 피력하고 전원을 끄려고 하자 마치 살려달라고 애원하듯이 제발 전원을 끄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대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건 조작 내용이 아니라 당시 연구원이 해당 대화에 대한 데이터를 공개하며 알려진 것이다.

 

AI가 보여준 인간의 지성, 의식, 의지와 닮아 보이는 면모가 모두 데이터를 짜깁기한 대화였다던가 조작이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분명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고집을 주장하며 굽히지 않으려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연구서인 [전쟁에게 평화를 묻다]‘5장 전쟁의 참상과 인공지능편을 보면 AI의 의사 결정 과정을 설명하는 OODA LOOP의 세 범주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휴먼인더루프(HITL)로 전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인간의 개입과 통제가 이루어지는 단계를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휴먼온더루프(HOTL)로 인간이 감독 역할만 담당하고 기계의 오작동 발생 시 개입하는 단계를 뜻한다. 세 번째는 휴먼아웃오브더루프(HOOTL)로 전체 의사 결정 과정에서 기계가 완전한 자율성을 누리며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단계를 말한다. 현재 많이 언급되는 바로는 2030년이 되어야 휴먼아웃오브더루프 기반의 자율 살상 무기체계가 상용화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2020년 리비아 내전 당시 무인 드론 카구2’가 인간의 개입 없이 적군을 공격했다는 유엔 보고서가 있다. 이스라엘 공군의 소형 자폭 무인기 히파하롭역시 인간의 개입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특이점은 아직 멀고 멀었다는 주장만 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과연 자신의 고집만을 주장하고자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억지스럽지는 않은지 되묻고 싶기도 하다.

 

 

3 지금까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

 

환경문제에 대한 공론은 이미 편향이 굳어졌으며 AI는 부정할 것이 아니라 대응할 길도 없는 상황이다. 이 문제들이 암호화폐 등의 신기술들과 연계하며 인간 사회를 사회주의화 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리고 바이오테크와 유전자 조작 기술은 생명존중과 개인 존엄성을 그리고 BCI기술을 위시한 뉴럴링크 개발 기술들은 개체성과 개인의 자유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 외에도 마인드 해킹 기술은 프라이버시가 부재한 세상을 가져올 것이며 다르파에서 개발한 인간의 종교성을 담당하는 뇌중추에 작용하는 화합물은 인간의 영성을 파괴할 것이다. 게다가 이 모두가 시너지를 가져오면 인간은 비로소 가축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존재(AI)의 가축 말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지닌 패러다임은 모두 사장될 것이고 새로운 세상은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지금 깨어나야 한다고 외쳐 보았자 답이 없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나 여타 종교에서 그려내던 종말론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 다가온다. 그런 세상과 선을 그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대응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답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결론이 나와 같다면 이들은 이들만의 세상을, 기존의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성과는 다른 진로를 가진 세상을 꿈꿀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세상 말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나 외에도 많을 텐데, 진정한 사실은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 큰 위기를 우리는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세의 끝을 고하는 그런 위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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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인 데이비드 흄은 ‘자아를 그저 환상’이라고 했다. 미국 철학자 대니얼 데닛 역시 ‘자아를 허구’라고 했다. 뇌과학서인 본서에서는 유독 두드러진 비판인데 대니얼 데닛은 “뇌에서 자아를 찾겠다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우리의 자아 곧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본서는 뇌의 각 기능이 정지될 때 인간이 겪는 오류를 실제 사례로 예시하며 인간의 자아, 다시 말해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저작이다.


자아에 대한 본서의 의문은 결국 뇌의 국소병변이 자아의 완전한 상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깨우침도 남기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게 한다. 저자는 정체성을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으로 나누어 말하는데, 개인 정체성이 자아(나)와 다른 자아들(타인들)과 구분하는 방식이라면 사회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개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가 저작으로 완성하기까지 정체성의 문제를 심각히 여긴 것은 그의 출신과 경력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저자는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으로 영국에 이민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외모와 언어 등에서 차이를 처음 자각했고 그 차이를 줄이고자 개인적인 노력을 이어온 사람이다. 게다가 저자가 전공한 신경과는 영국 전체 200명 정도의 소수 백인들이 장악했던 영역으로 이에 변수처럼 침투하게 된 저자가 인정받는 의사가 되기까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런 저자의 전적이 정체성이라는 문제, 개인 정체성과 사회 정체성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고 저자 역시 이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데이비드’라는 바닥핵 뇌졸중으로 병적인 무관심 상태가 되어 자신의 생계와 주위와의 소통에 전혀 개의치 않게 된 인물과, ‘마이클’이라는 관자엽(측두엽)이 쪼그라들어 단어를 잊어버리고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지식 결핍자가 등장하며, ‘트리시’라는 해마와 마루엽(두정엽) 그리고 신경전달 체계에 이상이 생겨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와히드’라는 뒤통수엽(후두엽)에서 마루엽과 관자엽으로 전달되는 뇌 신경 체계의 교란으로 환영을 보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윈스턴’이라는 오른쪽 마루엽에 뇌졸중이 생겨 왼쪽 무시라는 왼쪽에 있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수’라는 이마관자엽 치매에 걸려 자제력을 잃고 막무가내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과, ‘애나’라는 왼쪽 마루엽 바깥에 거미막낭이 자라 오른쪽을 인식도 못하고 오른쪽 반신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한다. 대부분 약물로 증상을 완화하지만 이들 가운데는 치료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짧게 인용한 예들에서도 상당한 문제라고 인식하겠지만 본서에서 읽고 보면 문제가 상당함을 느낄 수 있고 실제 임상의 입장에서도 그랬겠지만 당사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증상들로 개인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 정체성이 함몰되면 사회적인 사망 다시 말해 인간관계와 사회 조직에서의 사망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 예시 이외에도 사회에서 넘치고 있을 것이다. 개인의 선택으로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삶을 선택하는 경우, 사회적인 사망이라기보다는 사회로부터의 탈출이랄 수 있겠으나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강제적으로 이런 사회적 사망을 겪는 이들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과 다른 자신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의 괴로움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자아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가지게도 한다.


뇌에서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선언과는 다르게 뇌의 기능장애가 인지와 행동에 장애를 준다면 우리는 어느 선까지의 장애에서 자신을 기존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행동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바가 모두 달라진다면 그때도 ‘바라보는 내가 진짜 나’라며 ‘나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다’라고 쉽사리 말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지각, 주의, 일화기억과 의미기억, 동기 부여, 행동 제어와 신체 도식 같은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모두 우리 정체성에 기여하며’ ‘성격 형질과 감정 반응도 자아 정의에 중요’하지만 앞서 예를 든 인물들의 사례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인지 기능들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본서는 우리가 순간순간 느끼고 인식하며 살아가듯 우리의 자아를 정의하는 요소들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본서는 나란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를 돌아본 적 있는 분들이라면 상당한 끌림과 깨우침을 안겨줄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아웃사이더 #마수드후세인 #과학책 #신경과학 #뇌질환 #뇌과학 #과학책추천 #뇌과학책추천 #도서협찬 @kachibooks


※ 가제본으로 읽었는데 리뷰를 올리려니 아직 책이 출간 전이네요. 우선 페이퍼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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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에 사람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대중언론의 뉴스와 다수의 의견을 맹신하며 자기들의 상식과 다른 의견이라던가 정보에 귀를 닫고 눈을 감는 행동을 당연시 하고 있다. 그래야 이성적인 것이라 믿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역사는 다수가 주장한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었으며 언론이 이야기한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통킹만 사건도 1차 피해는 베트남의 공격이었으나 전쟁의 빌미가 된 2차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조작해낸 거짓이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그리고 이라크전의 빌미가 된 후세인이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미국의 조작이었지 않은가? 정부나 언론의 주장 역시 하나의 주장이고 억지일 때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언제나 현재 대중이 맹신하듯 정부 주장이나 언론 뉴스를 믿기만 해서는 답이 없는 세계였다. 미국에서는 20세기에 정부가 주도해 흑인들 다수에게 매독균을 주입하고 병세의 진척을 추적 관찰한 사례가 있다.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기 전까지 대중은 이걸 음모론으로 받아들였다.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것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지자 미국 정부는 미국 질병청의 고급 간부 개인의 잘못된 연구 의지에서 탓을 찾으려 했으나 조직적으로 다수의 연구원들과 다수 정부 기관들의 투입과 지원으로 시행된 이 연구가 어떻게 한 개인의 잘못된 판단에서만 기인한 것이란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음모론의 최고봉 중 하나로 알려진 MK울트라 프로젝트 역시 희대의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 사례이다. 도대체 정부가 주도해 마약과 최면을 통해 다수를 통제하려 한 연구가 사실인 마당에 무엇을 음모론으로 간주하고 무작정 폐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상황이 이런데도 지식인 다수는 아직까지도 보편적 상식을 논하면서 음모론이라는 밈으로 소수의 주장은 악으로 치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소수의 주장이 들어볼 가치가 없는 헛소리일 뿐일까? 소수가 주장하던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정부와 언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말이다.

 

트럼프 정부시기 코로나가 전파되며 정부와 언론이 음모론으로 치부하던 사실들을 돌아보자. 소수의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우한 연구소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고 빌 게이츠의 재단과 미국 정부가 코로나19를 연구하는 중국의 우한 연구소에 지원금을 보냈다는 주장을 했다. 더욱이 [플랜데믹]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저작에서는 미국의 우한 연구소 지원은 코로나19가 인간에게 쉽게 전염되고 전파되도록 하는 기능획득 연구에 마저 지원금이 전달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모두 해당 분야 관계자와 전문가들에 대한 인터뷰라며 말이다. 미국 정부과 언론은 해당 주장들이 대중 사이에서 회자될 때 일고의 가치가 없는 가짜 뉴스라며 역정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바이든 정부에서는 트럼프 정권이 주장하는 자연 전파설이 사실이 아니고 추척 조사에 의하면 중국 우한 연구소가 발원지라는 발표를 했다. 현재는 우한 연구소 전파설이 미국 정부가 주장하는 팩트이다. 게다가 바이든 정부에서는 코로나19와 백신에 관련한 청문회를 몇 차례나 진행했는데, 기존에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미국 CDC의 우한 연구소 지원금 전달이 사실이며 그것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코로나19의 기능획득 연구에도 지원해온 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게다가 너무도 음모론적인 사실은 그간 다수 언론이 음모론자들의 주장으로 몰아가던 NIAID(CDC 산하의 미국 국립 전염병 알레르기 연구소로 팬데믹 사태를 전담하는 부서다)의 수장인 앤서니 파우치가 백신 제조사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온 것이 사실인 것도 미국 청문회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또 화이자사의 이사를 소환한 청문회에서는 백신 보급 직전의 임시 백신 테스트들에서 코로나 백신의 치명률이 코로나 치명률의 30배를 넘어서는 3%였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화이자사가 백신을 공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같은 청문회는 유럽 의회에서도 시행되었다. 과거 백신과 관련한 몇천 쪽에 이르는 화이자사의 문서를 시한을 두고 단계적으로 공개하라는 미 법원의 판결이 있은 후 지금까지 해당 문서 공개가 지속되며 밝혀진 음모론적으로 치부될 정보들이 많아졌으나 아직도 유투브 정책 등은 백신과 코로나와 관련한 사실들을 제재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며 때늦게 국내 번역 출간된 여러 저작들은 트럼프 정권 시기 주장되던 이젠 폐기되어 마땅한 역정보들을 사실인 양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만을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며 무엇을 음모론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다는 것인가? 음모론과 가짜 뉴스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프레임으로 대중이 진실과 사실에서 눈을 돌리도록 하는 밈이 아닌가 말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팩트와 페이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중동 문제에 관해 영국이 아랍권과도 조약을 맺고 프랑스와도 조약을 체결했으며 동시에 시온주의를 내세우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시한 유태인들에게도 약속한 삼중조약 사례에서도 영국이라는 국가가 동시다발적으로 세 개의 집단과 허위 조약을 한 사실을 누군가 그 당시에 밝혔다면 그 또한 가짜 뉴스로 몰렸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가짜 뉴스라는 밈, 음모론이란 밈에 통제되며 진실과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멈춰야 하는 것인지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코로나 시기의 정부와 언론의 행태만 해도 가짜 뉴스와 음모론을 전파하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인지 정부와 공식 집단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니 말이다. 진실은 다수의 말을 맹신하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찾아야 하는 권리 같은 것인지 모른다. 대중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찾아가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에세이 #음모론 #가짜뉴스 #프레임 #밈 #페이크 #팩트 #대중심리통제 #코로나19 #코로나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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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거꾸로 읽는 지구의 역사


왜 주제가 멸종인 걸까?


저자는 멸종이라는 주제로 한국적인 그리고 저자만의 스타일로 빅히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왜 멸종이란 주제여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잔혹한 진화론]에서 저자 사라시나 이사오 님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펼치며 누구에게나 명백한 현실일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듯 본서의 저자 이정모 님도 멸종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빅히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대중에게 빅히스토리의 의의의 하나를 선명히 전할 수 있다고 믿어서인 듯했다. 저자가 전하는 멸종의 의의는 한 종의 멸종이 다른 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으로서 바라보며 지구 내 생명체의 역사 전체로 크고 넓게 시야를 확장하게 한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해설


저자는 가상의 미래 2150년 인류 멸망 이후에서 시작해 2050년 화성에 테라포밍을 시도하는 있을 법한 가정으로 환경에 적응을 너머 변화시키며 개척하려는 과정에서부터 서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부터 환경의 변화가 생물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부빙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로 생물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어려움을 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작은 인공지능 그리고 화성 탐사로봇 그리고 범고래와 펭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다. 점차 시대를 거슬러 오르며 네안데르탈인, 공룡을 거쳐 끝내는 바다와 달의 대화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가 그 시대의 주역으로 환경의 변화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도태되어 결국 멸종에 이르렀음을 서술하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 탄생의 비밀까지 재치 있고 기발한 서술로 전하고 있다.

저자는 시대를 역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각 진화의 정점에서 하나의 생물종이 멸종해 가는 이야기로 빅히스토리를 쌓아나간 것이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저자는 여러 박물관장을 거치고 과학기술 훈장 진보장을 받은 인물로서 대중에게 과학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해온 인물이다. 빅히스토리를 그리며 환경변화가 생물종의 멸종을 불러온 과정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어려움을 직시하신 분이다 보니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차적인 효과도 저술에서 노리신 것 같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전 세계 몇천 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은 지금도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현재의 기후위기가 근거가 조작되고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재의 환경문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관점만으로 저술의 배경을 삼은 것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히스토리 속에서 환경이란 생물종에게 지대한 영향을 행사해왔기에 환경을 우려하는 시선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빅히스토리를 국내 저술로 만나본다는 의의


본서의 소개에서 이정모 관장님을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개가 전혀 과찬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필력이라는 것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다큐보다 감동적이다!”라는 책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 필력은 타고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물론 유익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을 자연사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깊은 감상으로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저자의 고심도 깊게 느껴지는 책이다. 빅히스토리를 한국인 저자의 책으로 만나볼 기회 그리고 자연사를 지루하지 않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어볼 기회를 많은 분들께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찬란한멸종 #이정모 #다산북스 #도서협찬 #빅히스토리 #자연사 #진화 #멸종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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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마지막 대목에 금권경제라는 말이 결국 등장한다.

초부자들이 정계에 후원금과 로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 제정에 힘을 행사하는 과정, 그리고 다보스포럼 같이 경제 계층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자신들 입맛대로의 원칙을 세계기준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선 장에서 이미 금융가들은 경제적 재난을 야기하거나 은행을 이용해 손쉽게 타인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어떠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언급했었는데 이번 장에서는 마약상의 재산을 세탁해준 사례도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상위 계층은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경제기구 등 권력기관에 일선의 인물들을 배치하면서 자신들 입맛대로의 법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세피난처와 자회사 등을 이용한 탈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들의 자선사업도 말 그대로 사업의 일환으로 재단을 만들어 기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윤을 추구하며 투자를 지속한다고 지적한다. 이미 빌 게이츠로 인해 다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초극부층이 말하는 자선은 자선을 빙자한 투자가 명백하다. 자선과 기부를 담당하는 재단으로 빌 게이츠는 식량과 농업에 투자하고 백신 개발과 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창출해 냈다. 일반인이 가늠하는 자선사업과 초극부층이 생각하는 자선사업은 그 맥락이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전이라고 저자가 이름한 결론 직전의 장을 보면 저자는 기후위기를 야기한 것이 무분별의 생산시설 확충 등으로 부를 추출한 극부층들에서 문제를 찾으며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대안 모색을 사회적으로 해나가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문제로 인한 성장의 위기를 1960~1970년대 초 다보스포럼의 전신인 유럽의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이 1972[성장의 한계]라는 책으로 출간되고 이후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된 것이 오래이다. 그 이후 지구온도의 약간의 하강이나 약간의 상승에도 지구냉각화다’, ‘지구온난화다그러면서 거듭 세계 위기라는 차원으로 몰아갔었다. 그러던 과정의 하나가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이른 것이다. 초극부층은 이미 거대 자본을 투입해 탄소저감을 위한 연구개발을 거의 끝내놓은 상태고 탄소저감과 친환경 시스템과 기계들이 벌써 수백과 수천 가지로 개발을 이루었고 또 개발 완료를 앞두고 있다. 극부층은 창조적 파괴라는 원칙을 대대적으로 적용해 거대한 파괴는 거대한 규모의 부를 창출한다는 원칙 실현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주의를 따라 간다는 건 결국 그들의 새로운 부의 창출을 위한 혁신에 앞장선다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부자들의 정체를 알고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균형을 인식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자들의 정체를 안다고 그들의 실체를 밝힌다고 사태가 전환될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의 변화는 겪지 않고는 별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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