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명상 아리예 카플란의 유대 명상
아리예 카플란 지음, 김태항 옮김 / 하모니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유대민족의 명상 체계에 대해 최초로 접하게 된 기록물이었습니다. 명상이라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인도를 떠올릴테고 동시에 중국의 유교와 도교의 전승을 떠올릴거라 생각됩니다. 또 상식적으로 티벳의 명상체계를 떠올릴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유대민족의 명상체계는 저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도 생소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했습니다.


이런 상식을 깨는 저작이기에.. 더욱이 힌두교나 불교, 유교, 도교의 명상체계만이 아닌 크리스트교와 그 이전 전승을 잇는 명상체계의 전통을 전하는 저작이기에 눈길이 손길이 선뜻 가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저작에서 유대민족 전승의 명상에 대한 접근과 분석은 우리가 익숙한 명상의 정의나 분류, 해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저자가 유대 명상 전반에 대해 서술하기 전 명상에 대해 일반적인 분류와 해석을 내놓을 때 저자 나름의 명상 계통을 분류한 대목에서 나름 분석적으로 접근하려한 면이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것이 오류라 느껴진다는 것이 함정이긴 합니다만..


저자는 명상기법의 사용 수단에 따라 지성, 감성, 육체적으로 각각 분류해 접근 할 수 있다거나 명상기법의 특징에 따라 외부지향적인 명상, 내부지향적인 명상, 비지향적인 명상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명상을 길지 않은 기간이라도 함께 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아시듯 이러한 명상의 분류는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고 일반화한 것일 뿐이지 실제 명상을 수행하고 일상에 적용하는 실제에서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분류는 아무 의미 없어지고 말지요. 더더군다나 비지향적인 방법이라는 분류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지향적이지 않은 명상은 이미 명상이 아닐텐데... 저자의 설명으로는 마음의 고요함을 추구하며 내부와 외부의 모든 지각을 철수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는 요가에서 명상(디야나)의 전단계들인 '프라티아하라'와 '다라나'를 명상에 포함시켜 설명한듯 합니다. 아니라면 저자가 한 비지향적 방법이라는 분류는 명상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명상의 결과인 삼매를 명상이라 분류한 것일텐데.. 오랜 세월 명상을 수행하고 대중에게 교수해온 저자일텐데 왜 이런 이해가 쉽지 않은 방식으로 분류한 것일까 그보다 왜 이렇게 납득하기 쉽지 않은 설명을 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저자가 정통적인 명상의 체계들을 몰라서 그런 분류를 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단순화 시켜 대중이 명상에 쉽게 접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라도 명료하고 체계적인 분류와 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하는 것인데 하는 의구심과 반감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외에는 목차에서 보이듯 유대 명상에 대한 역사와 특징 등을 간략히 주목케 하고는 만트라, 관조, 시각화, 空 이렇게 4가지 분류로 기본적인 유대명상을 설명합니다. 물론 이 기본적인 명상기법이 유대민족이라고 해서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리는 없습니다. 다만 산스끄리뜨어가 아닌 히브리어가 만트라가 되기도 관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 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그 작은 차이점이 실제 얼마나 큰 차별성이며 다른 노선으로 이끌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기도로 가볍게 다가서더니 순식간에 유대의 기도문으로 시작해 유대교 예배 의식으로 이어나가며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유대교 의식의 기본을 짚어 갑니다.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 문자에 대한 기초적인 의미 해석과 기도문의 이해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에서 히브리어 문자와 발음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두루 새기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저작에서 유대교와 천주교, 개신교에서 또 그노시즘과 마법 체계에서 모두 중요성을 인정할 하나님의 72가지 이름에 대해 다 언급하고 있거나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이 책의 분량도 너무 적을 뿐 아니라 애초에 명상에 대한 저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에 대한 해설을 위해 저작되었다고 했어야 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민족의 명상 체계에 대한 사소한 관심에서 비롯한 즐거운 독서가 유대 신비주의와 크리스트교 그노시즘 그리고 백마법 체계 전반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얻는 기회가 되어줄 것입니다.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이 짧은 분량의 저작물에서도 유대 신비주의와 그노시즘과 백마법 체계의 이론적 토대의 기초를 배우는 기회를 분명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미 명상에 대한 상당한 성취와 지식이 있는 이들 그리고 히브리어를 기초적인 수준이라도 공부를 한 이들 또 그노시즘과 마법 체계에 대해 사소한 수준 이상의 지식을 지닌 분들이라면 굳이 <유대명상>이란 이 저작물을 읽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 읽지 말라는 강권이 아닙니다. 그저 구태여 사법고시 2차 시험 대비를 하여 법에 대해 더 깊이 알겠다며 고교과목인 <법과 사회>를 수강하거나,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 수리탐구 영역 점수를 올리겠다며 구구단을 다시 외울 필요는 없을 거라는 취지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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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03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사이트에 2015-07-04 올린 리뷰를 옮겨왔습니다

syo 2017-11-03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이하라님만이 독보적으로 개척하신 영역 같습니다!! 솔직히 내용은 저한텐 정말 모르겠다 싶은 이야기지만 어쩐지 대단하다는 느낌....

이하라 2017-11-04 00:04   좋아요 2 | URL
대단하다고 해주시니 (긁적 긁적) 너무 부끄럽습니다^^;;
관심분야가 이 쪽이다보니 이 분야에 흥미가 없으신 분들께 색다른 느낌을 주게 되었나 봅니다

캐모마일 2017-11-04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국선도를 접한 이후로 명상, 수행에 관심이 생겼고, 요즘 이하라님의 서재글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갑작스럽지만 감사 인사 드리고 갑니다.

이하라 2017-11-04 15:30   좋아요 2 | URL
아! 안녕하세요^^ 저도 단월드가 아직 단학선원이라는 이름일 때 다녀본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아직 수행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관심분야이다보니 글을 종종 올리고 있습니다. 서로 좋은 정보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감시사회 - 벌거벗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한홍구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각 장 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해 대한민국의 감시사회적 면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름의 해결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등 국가 정보기관의 역사를 돌아보며 주요인사의 감시와 개인 사찰의 역사를 돌아 보기도 하고, 기업의 맞춤마케팅과 CCTV의 사회적 감시와 계층화를 논하기도 하며 불안이 자발적 감시를 불러오는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편리함의 이면에 감시의 그늘이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정보화라는 것이 정보를 장악한 주체에게 우리 생활 자체가 종속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세계 곳곳의 테러 위협과 치안 불안이 더더욱 자발적으로 감시사회로 들어서게 하고 있는 현재의 세계상이, 이 책이 집필되었던 2012년 보다 더 사회 감시의 면면이 확장되고 있음이 불안하고 염려된다. 감시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타개할 방법에 대한 담론이 이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 보다 해당 문제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시작 되어야 할 일이다.


감시사회에 대한 공론이 불거져야 할 이때에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저작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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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3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 분야 전문가라고 소개하면서 ˝한홍구˝ 이름 석자를 보니 더욱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이하라 2017-10-31 22:52   좋아요 1 | URL
저는 각 장의 강연자(강연 형식의 저작인지 강연 기록물인지 모르지만)분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제목과 책소개 글만을 보고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깊히 들더라구요..
 
유럽의 신비주의
게르하르트 베어 지음, 조원규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서양 신비주의에 대해서라고는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통해 처음 접한 오컬트화학이나 <<카발라>>가 고작인 나로서는 저자분이 직접 답변을 남긴 어느 분의 리뷰와는 달리 이 책에서 신비주의의 다양성을 읽기보다 동서양 신비주의의 합일점이 느껴졌다. 

성찰을 통한 一者Hen와의 합일을 의미하는 고대의 에노시스enosis나,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나는 길(티쿤)을 추구하는 샤시디즘, 신이 인간이 되는 과정을 뜻하는 러시아 신비주의의 테오시스를 비롯 기독교의 신비적 죽음이라는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앙적 목표성취등을보라. 자아의 전적인 포기를 통해 절대자와 하나되려는 인도철학적 전통이나 비로자나부처의 여러 모습의 현현이 바로 우리라는 밀교전승, 我相 人相 壽者相 등 자신을 한정짓고 세계를 한정짓는 상을 초월하여 깨달음을 이루려는 불교의 가르침과 무엇 다른가? 
자신으로 돌아가 신과 만난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신이 된다는 개념은,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신이라는 측면으로 비약해보자면 동학의 인내천사상과 결코 다른 바를 찾을 수 없으며 진실성을 말한다는 면에서는 불가의 불성론이나 여래장사상과 다름이 아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환희의 절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은 중생들을 두고 차마 열반에 들 수 없어 결코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으신다는 법화경의 부처님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리행을 말하는 것이지 않은가!

금욕적 수행을 통해 자신을 변모 시키려하고 ‘情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 했다는 것도 요가의 금욕과 권계의 실천을 중시하는 부분이나 ‘브라흐마차리아’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불가나 중국과 한국의 선도仙道 또한 금욕과 계율의 철저한 실천을 필수 사항으로 함은 우리문화에서는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문자와 영혼이 내밀한 상호 관련성이 있다며 성서의 탐구를 통해 하나님께 다가서기를 기도하던 오리게네스의 노력은 지성을 갈고 닦으며 학문의 길을 통해 깨달음내지는 신과의 합일을 추구한 갸나요가( Jnana Yoga )나 불가의 성문승과 한맥락이다. 
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박티요가와 같고, 침묵과 평정을 중시하는 면은 선불교와 동일하다. 또한 선도에서도 주천보다는 性(심성,본성,불가의 원성실성)을 중시하는 문파도 있다.

하다못해 영세를 통해 정화와 개명을 추구하였다는 것까지도 불가의 관정, 요가의 관정과도 같지 않은가?

유대인의 카발라 철학 역시 만물이 일자로부터 분화하였음을 말한다는 측면에서는 보자면 우리의 천부경이나 불가의 법성게와 동일하고 또 변화를 읽고자 하는 노력이었다는 측면만으로는 극동의 역철학과도 같다.

항상 지속되는 기도, 마음의 기도라는 것 또한 불교의 염불과 도가의 진언, 요가의 만트라와 그저 이름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들이 희구하는 신적 차원의 황홀이라는 것도 삼매와 다름 아닌 것이다.

글쎄, 서양신비주의에 대해 일천한 나로서는 동서양신비주의에서 차별성을 읽고자 한다해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하고도 정말 의아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전통을 간직한 서양이 왜 대중적 종교의 측면에서는 신과 인간을 그토록 철저히도 분리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서양인들로서는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미가 축소된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느꼈던걸까? 

어쨋건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정신문화를 조금은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서양이 다른 면 만큼이나 합일되는 면모 또한 있음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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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0-26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06년12월06일 타사이트에 올린 리뷰입니다

cyrus 2017-10-26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이하라님이 생각나서 구입했습니다. ^^

이하라 2017-10-26 15:05   좋아요 0 | URL
cyrus님이 이 책을 선택하셨다니까 벌써 리뷰가 기대되는군요^^

cyrus 2017-10-26 15:06   좋아요 1 | URL
제가 책을 사면 바로 안 읽고 보관하는 성격이라서 언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이상한 논문 -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지적 수집품
산큐 다쓰오 지음, 김정환 옮김 / 꼼지락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엔 『이상한 논문』의 13가지 논문 중 「세번째 논문 불륜남의 머릿속」과 여섯번째 논문 여고생과 남자의 눈」, 「열두번째 논문 '가슴의 출렁임'과 브래지어 위치의 어긋남」에 특히나 관심이 갔었다.


하지만 실제로 재밌게 읽은 건 그 외에도 「네번째 논문 하품은 왜 전염되는가?」와 「다섯번째 논문 커피잔이 내는 소리의 과학」이 있다. 


 사람만 하품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었다. 침팬치 사이에서도 하품은 전염되었고 사람이 하품하는 영상을 본 26 마리의 개 중에서 21 마리가 하품을 했다고 한다. 행동전염이라는 남의 행동을 따라하는 심리적 모방성이 사람과 사람 사이나 침팬치나 침팬치 사이가 아니라 사람과 개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거울상 뉴런 이라는 공감과 모방을 불러오는 체계가 생명체 전반에서 모방심리나 반사적 동일행동을 일으킨다면 생명체 전반에서 공감도 불러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니까 고양이가 병아리를 돌보고 동물원에서 같이 자란 개와 호랑이를 커서도 한우리에 넣어 놔도 사고가 없는 거구나 싶었다. 인간만 그린피스 활동하는 줄 알겠지만 '사슴과'의 아기동물을 공격하던 숫사자를, 그 숫사자와 함께 사냥하던 것으로 보이는 어미사자가 공격하는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물론 세상이란게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어쩌면 영역을 침범한 숫사자라 공격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때론 머리 보단 가슴이 느낀대로 믿고 싶을 때도 있다. 


 하품의 전염은 4세 이하에서는 없었고 자폐증을 보이거나 조현증(정신분열)을 보이는 이들에게서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감 능력을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어야 하품이 전염되는 거라고 단정 지은 어느 교수님의 말씀도 싣고 있다. 침팬치와 개가 지성을 갖췄다고 단정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런 단정질에 경의를 표한다. 고인이 된 존 내쉬 박사(영화 뷰리플 마인드의 실제 모델)도 조현증이었고 그런 증상 속에서도 대학 강의도 했었지 않나? 그 분이 조현증을 보였다고 갑자기 지성이 개나 침팬치 보다 저하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할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자폐증(7세 즈음)도 조현증도 유경험자로서 이에 대해 토를 달자면, 자폐증을 보일 때는 자신의 우주 안에 갇혀서 외부세계와 단절이 되기 때문에 주위의 자극도 변화도 자폐증을 보이는 시기에는 거의 대부분 차단되어 있는 상태와 같다. 그러니 이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극과 반응... 즉 피드백의 단절 문제로 보아야지 지성에 딴지를 거는 건 답이 없다고 본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동시에 다른 우주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조현증을 보이는 이들의 경우에는 반응과 자극의 부분적 차단을 보이는 자폐증을 넘어선 것으로 보아야할지 모르겠다. 자기만의 우주에 있거나 다른 우주에 있는 사람에게 지들 기준의 척도만 제시하며 지성이 낮다는 둥 하며 나서면 누군가 제시하는 랩퍼가 아마도 "니들이 뭔대 얠 판단해!" 하며 나설 것이다. 


 커피잔이 내는 소리의 과학편은 처음 읽으면서 부터 처음 스푼을 넣어서 커피믹스가 녹으라고 휘저으며 스푼이 커피잔을 두드리며 내는 소리가 당연히 높낮이가 다를테지 그게 뭔 대수냐 싶었다. 평소 커피를 안마시다 보니 이런 소리의 차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원인이 믹스가 물과 접촉하며 발생하는 기포가 음의 고조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결론이 이르자 약간 소름 돋았다. "아~ 놀라운 과학적 세계!" 뭐, 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게 기포가 있다면 분명히 수면으로 떠오르며 터질테고 그때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이 스푼과 커피잔의 충돌로 일어나는 파동이 전파되는데 교란을 주어서 오히려 음이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저하 되어야 정상 아닌가? 만약 공명현상이라 누군가 말한다면 파동학을 잘 몰라서 공명은 주파수 대역이 유사한 두파장이 합쳐지며 파장이 더 커지는거라던데 커피잔과 스푼의 충돌과는 파장이 다를 기포가 파열되는 파장은 되려 음의 고조가 아닌 저하를 가져와야 논리적으로는 타당할텐데 하며 답나온 연구에 덤덤 거려 본다.




 제목이 『이상한 논문』이다 보니 논문이 수록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 했으나 각 논문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어느 논문이나 원본 논문의 번역본이 수록되어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특히나 열두번째 논문의 원본 논문인 「주행 중의 브래지어 착용 시의 유방 진동과 어긋남의 특성」은 원논문 번역본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중딩 시절 남녀 공학인데도 합반이 아니라 교무실을 중심으로 남녀반이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등하교 시간과 과학시간, 체육시간 외에는 여학생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여섯번째 논문 여고생과 '남자의 눈'」에서 논문의 저자 시라이 유코의 연구결과인 남녀공학에서 남학생의 성적이 향상되는 이적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다만, 그저 열두번째 논문에서 가로와 세로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활동시 여성 가슴의 출렁임에 대해서는 체육시간에 100m 달리기 하던(그 예쁜데 무지 많이 오동통통했던) 여자애를 보며 충분히 깨우쳤던 바다. 명확히 표현하면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동선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성(그러니까 어떠한 패턴적 동선)이 분명히 보였다. 논문 저자는 가로 세로라고 동선을 기록하기 쉽도록 단순화하였는데 좀 더 명확하자면 비대칭적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칭적일 수 밖에 없는 두개의 불완전한 타원형 동선을 그렸더랬다. 미안하다 이름도 기억 안나는 여자동창아! 이제와 얘기지만 나 너 조금 좋아했다. 꼭 가슴 때문만은 아니였어^____^


 저자가 워낙에 재밌게 집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번역도 그 원문의 맛을 놓치지 않고 있는 걸 거다. (그러니 술술 읽히지...)  논문 하나하나에서 해당 논문이 적용하고 있는 연구 방식과 논문 기술 방식 등 사회과학적 원리(?)도 알려주는데 그걸 서술하는 방식이 하나도 딱딱하지 않다. 그것 마저도 재밌는 얘기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각 논문 마다 해당 연구조사 대상에 대해 각 논문 연구자들이 가졌을 관심과 흥미, 문제의식(?)을 유추해 펼쳐내는 저자의 입심이랄까 필력이랄까가 심후하다. 입담에서 고수의 풍격을 느꼈다. 책의 얕은 맛이나 (굳이) 제법 깊이를 느껴 본다면, 세상을 보는 논문 연구자들의 야릇하게 따듯한 관심과 애정이 또 사람을 따스하고 재밌는 존재로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유쾌함과 함께 포근함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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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24 17: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이 책은 논문 리뷰를 모은 것이군요. 대학생 시절에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대학교재가 있어요. 그 대학교재가 강의 담당 교수가 쓴 책이라서 안 살 수가 없었어요. 그때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고 있어서 대학교재를 비판하는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어요.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학술논문을 전문적으로 리뷰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이하라 2017-10-24 17:49   좋아요 3 | URL
게다가 대상논문의 주제들이 정말 흔치않은 주제들이죠. 이런 논문리뷰도 대상논문들도 정말 예사로우면서 예사롭지 않은것 같아요^^;

사마천 2017-10-24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과학도 상식화를 참 잘시키는 것 같아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 ^^

이하라 2017-10-24 20:46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애덤 스미스부터 폴 크루그먼까지, 35인의 챔피언들과 240년의 경제사상사를 누비다
브누아 시마 지음, 권지현 옮김, 뱅상 코 그림, 류동민 감수 / 휴머니스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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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경제학서라고 주눅들 필요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근데 내가 워낙 찌질해서 그런지 책 제목과는 달리 그닥 찌질해 보이는 경제학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참 안타까운 심경이다ㅡㅜ

어떤 학문이건 세상의 부분이던 전체이던 세밀하거나 전체적으로나 조망하게 하는 시야 즉, 관점을 가져다주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일듯 싶다.

본서의 전반적 내용도 고전학파는《국부론》-《국부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의 저자 '애덤 스미스'로 시작한다. 뭐, 읽어본적도 없는 어려울 것만 같은 책인데 제목만 봐도 국가를 국민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적 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있고자 하면 국가 부터 있어야 하며 국가가 부강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하기에 이딴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애덤스미스로 시작해 바로 '토머스 R. 멜서스' 라는 경제학자로 이어지는데 거듭 급증하는 인구로 결국 자원이 고갈될 것이며 인류는 궁핍과 위기를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던 학자라 한다. 근데 아직도 2050년이면 수백억 인구로 인류는 위기라고들 하고 있단다. 19세기 이후 전염성 질병 전파와 기아와 전쟁과 자살로 줄창 인구 조절이 이루어졌기에 멜서스와 그를 계승한 학자들이 예견하던 최악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데, 과연 질병도 기아도 전쟁도 자살도 자연발생적이라고 미더워지는가? 대자연이 "인류의 인구증가가 인류와 지구내 뭇생명들에게 해로울테니 내가 힘좀 써야겠는데..." 라며 인구조절 해주었다고 믿어지는가 말이다. 그리 믿는다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대자연은 하나님도 여타의 신적 존재도 운명 같은 자연발생적 사건도 아닐테지...

고전학파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이 당시 효과적 경영기법으로 인정 받았다는 '공장내 체벌' 을 금지했다는 대목에서 "이건 뭐지?" 싶었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건설 시대에서 시작해 현재 미국이라는 역사상 최대제국이 군림하는 이 시대에 이르기 까지 서양문화가 나름 주도적 역할을 해왔지 않나? 그래서 서양하면 계몽되어선 자유니 평등이니 인권이니 하는 이상적 가치들을 주구장창 주장해왔을듯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19세기에 노동자 체벌을 효과적 경영기법이라고 했다니... 얘네, 미개인이었나 싶다.  

-물론 조선시대에 80대 노비가 4살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아이가 놀다가 다리라도 부러지거나 죽기라도 하면 80대 노인이 4살 어린아이 때문에 부모에게 상해를 입히고 살해한 죄에 입각해 처벌하기에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어이없는 얘기를 들어본적도 있긴하다.-당시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유교윤리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적용해, 나이가 어리더라도 주인인 양반이 부모로 나이가 많더라도 노비측이 자식으로 관계랄까 질서가 설정되기에 이는 당시로는 적법을 너머 상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를 폭행해서 작업능률을 높인다니... 아니다. 생각해 보니 조선시대 노비도 자녀를 낳으면 주인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노비는 노예인 것이고 유럽에서의 당시 노동자 계층도 준노예였던 시대였다고 본다면 노동자 체벌이 납득이 가긴한다. 노예도 준노예도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노예이면서 노예인지도 모르는 시대도 존재하고... 잉태하고 태어나고 먹고 자고 입고 이동하고 자라고 교육받고 때론 병들고 여행도 하고 영화나 연극 취미 문화생활을 즐기고 결혼하고 늙어가고 끝내 죽는 모든 생활 동안 인간은 서로 그 생활을 통해 수입을 얻기도 하지만 지출을 하기도 한다. 이런 경제활동 자체가 부의 불평등을 유지도 아닌 강화하고 있고 달리 말해 배부른 사람들 배불리다가 마치는 삶이 인간의 일생이라는 말이다. 노예이면서 노예인 것을 모르는 시대가 이 시대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더불어 살아가는거지 어떻게 노예냐?"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고? 그럼 로마시대 노예제나 조선시대 노비제나 미국의 노예제를 지속하겠다 우기던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거라는 논리를 안펼쳤을 것 같은가?-

'로버트 오언' 씨는 아이들을 조립라인이 아니라 학교로 보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동 노동이 문제시 되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회문제인데 당시 유럽인들의 인권의식이 어떠했을지 어슴프레라도 짐작이 가니 혁신적이긴 혁신적이었다 싶다. -아동 노동문제는 <21세기 노예제>라고 하여 월~목 오후 6시경 kbs2 에서 방영하는 월드뉴스 프로그램에서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방송한 적이 있다-

1834년 영국 노동운동의 시초가 되었다는 '전국 노동조합 대연합' 을 창설한 것도 '로버트 오언' 씨라고 한다. 또 1826년 7월 4일에는 이민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미국 인디애나주의 오지에 「뉴하모니」라는 마을을 건설하게도 했단다.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건 이런 관점으로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기에 시대를 무척이나 앞서간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머리로 망치질 하고 싶진 않지만 서로 뜯어먹지도 않고 서로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바보 이반의 마을이나 허균의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율도국 처럼 차별도 핍박과 횡포도 착취도 없는 사회를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지금까지 솔찮게 존재해 왔다. 이 시대에도 '톰 하트만' 씨는 그의 저작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점조직적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성장만을 지상의 원리라며 주장하다 서로를 망가뜨리는 이 시대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시대정신>시리즈의 제작 단체 역시 돈이라는 개념이자 제도가 사라진 소규모 공동체 생활로 환원해야만 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세계 만들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고 말이다. 

-나 역시 한때는 돈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다. 사회적으로 공헌했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자신이 미더운 이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일임하는 제도 (투표권을 1인 1표가 아니라 퍼센티지로 분할해 타인에게 몇 퍼센트씩 양도 가능하고 회수 가능하게 제도화해서 신뢰 가능한 이에게 다수가 위임한 영향력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시대는 대의 민주정치가 아니라 직접 민주정치 하이지만 말이다) 로 변화시킨다면 다들 사회적 성취의 척도나 행위의 동인이 부의 축적이 아니라, 사회공헌을 지상의 목표로 삼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포퓰리즘적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다수일 악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시대처럼 능력의 척도가 부이니 어떤 수단으로든 돈만 많이 획득할 수 있으면 된다는 논리로 사회가 인간이 척박해지는 시대는 아닐 것이다. 기만을 하더라도 이타적이며 나누려 하는 시대가 낫지, 지가 살고 지가 올라서자고 타인 쯤은 짓밟아도 되고 그 과정에서 죽든 다치든 상관 안하는 이 시대가 나을리는 없지 않나!

근데 문제는 이런 세계가 가능한 세계이긴한데 이런 시대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미친 기득권층이 '돈'이라는 권력을 버리려 들 것인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세계 모든 기득권층이 그렇게 권력을 내던지고서 새세계를 만들자고 동참할 상황을 어찌 가져오겠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샤를 푸리에' (1772~1837)라는 경제학자의 이상이 적용되어 그의 사후 「팔랑스테르」라는 이상적 소규모 공동체가 40 여개나 프랑스와 벨기에에 조성되었었다고 한다. 1968년 까지도 프랑스에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결론은 역시나 "지금은 흔적이나 있겠냐?" 이다.

- 2005~2006년 경 몇 개월 간 노숙생활 후 돌아와서 '청와대 신문고' 라는 정부 민원사이트에 노숙자 재활을 위한 안으로 노숙자들에게 시골의 감소되는 인구로 남아도는 빈 주택들을 지원하고 국가가 그들에게 농경지나 목장과 가축 등을 제공(당시엔 농경지만 건의했었다)해 생업을 되찾아 주고 몇%의 식량 자원은 비축하면 노숙자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쁘지 않을듯 하다고 건의 하기도 했었다. 당시엔 조만간 세계경제대공황이 오리라는... 그것도 1930년 대 미국발 세계경제 대공황 규모를 능가하는 수퍼울트라 스펙터클 경제대재앙이 펼쳐지리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종말론을 믿는데다가 예언서적들에 10대 초반 부터 심취한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져 지금도 언젠가 러시아와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란이 공모해 이스라엘을 핵폭격할 것만 같고, 분명히 홍채인식기술과 지문인식기술에 스마트폰 등이 개발 적용되고 있어 지불결제 수단으로든 신상정보 획득, 이동경로 파악, 유동인구로 인한 사회이슈 분석 등 빅데이터화의 목적으로든 바코드를 새기거나 생체이식칩을 이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그런 일이 있을 것 같고 그렇다ㅡ,ㅡ;;;) 뭐! 이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약소하게 펼쳐져 다행이다 싶긴 했다. 하지만 현재 서울시 차원에서만 도입하고 있는 노숙자들에게 주거비용을 지원해서 취업 등 재활의 기회를 유도하는 것은 경제적 불안정성이 극단화될 시에는 답이 아닌 처방이다.- 

19세기 경제학자들 부터 '인구'와 '통계' 등 현재까지 아니 나날이 더 주목할 수 밖에 없을 분야들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기득권층이 빅데이터를 악용할 현재와 미래를 감당하고 말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빅데이터화 : 신상 정보, 이동경로 파악, 지불결제 분야에 지문과 홍채 인식기술을 적용하고 초국가적 온오프라인 감시체계의 법적 허용, 행동경제학을 각국 정부 차원에서 적용 등에 방관한다면 향후 충분히 예측가능한 시나리오대로 디스토피아 로의 이행이 진행될 것이다-



행동경제학 저서 [Misbehaving]<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을 읽고서 행동경제학은 최근에야 연구하여 성립된 학문이라 생각했다. 헌데 본서를 읽고서 '소스타인 베블런' (1857~1929)이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행동경제학의 전제조건이다시피한 관점을 과거에 이미 주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그 학문적 견해의 전제일 관점은 전승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 언급한 '리처드 틸러' 씨의 저작을 읽고 행동경제학의 발전 이후에야 신경경제학이 분화된 것이라 여겼었는데, 생몰연대가 1903~1957년인 '존 포이만' 이란 경제학자가 이미 '게임이론'과 함께 '신경경제학' 을 창시했다고 한다-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이 비합리적' 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발전한 행동경제학은 '케네스 애로' (1921~ )라는 경제학자의 '불가능성 정리'-'개인과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이 비논리적' 이라는 논리-와 위의 '소스타인 베블런'의 '소비자의 행동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는 관점을 계승한 전제에서 세워진 학문이었다.

이런 '개인의 선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논리적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 는 전제를 수긍해 버리면 예측가능한 상황과 대중이 통제 가능하기를 바랄 것이 자명한 지배권력 입장에서 순조로운 통치를 위해 '개인의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임은 명백히 합리적인 귀결이다. 행동경제학에서 <넛지>라며 (행동을 촉구하는 약간의 제스처 정도일 뿐이라는) 선택과 판단, 의사결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1930~1940년대 부터 이미 미디어를 통한 대중심리통제를 실천하던 미국을 위시한 서양으로서는 바라마지 않았을 학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영국 캐머런 총리도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행동경제학을 기반으로 하고 행동경제학자들을 관리자로 둔 정부부처를 신설했다고 한다. 이제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합일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합리적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긍정적 개입일뿐이라는 논리로, 정부차원에서 합법적으로 대중심리를 유도할 명분 즉 대중심리통제의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모리스 알레' (1911~2010)라는 학자는 역대 경제학자들의 관점과 갈등을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처럼 펼치며 분열적 양상을 보인 인물이다. 규제 완화를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사용자를 위해 노동시장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그와 동시에 유럽 복지 연합을 꿈꿨다고도 한다. 확고한 자유무역 옹호자이면서 다국적 기업의 탐욕을 억제할 보호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박성호 씨가 울고 갈 다중이 캐릭터다 싶다. 하긴 역대 다중이 캐릭터 최종 갑이라면 예수님이시니 크리스찬이라면 터보의 '검은고양이 네로' 정도는 마스터해야 할 일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장난꾸러기들도 마구 까댈 일은 아니다. 

'아마르티아 센' (1933~ ) 이라는 경제학자는 그분 보다 부인이 압권이다. 영국계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손으로 하버드 대 교수라던데 애덤 스미스 전문가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는 정의를 다각도에서 증명하기 위해 경제학자가 된 것일까?

본서는 '대니얼 카너먼'(1934~ )이란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경제학자에 대한 내용으로 대미를 맺는다. 

전체가 경제학자들이 경제로 시작하여 세상을 향하던 안목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거시적이던 미시적이던 무역을 이야기하건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야기하건 자유를 말하건 개입과 규제를 말하건 결국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면 평등과 불평등 즉 분배를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로봇과 인공지능 적용 시점이 고작 20여년 후 부터라 보고 있다던데 그런데도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근로자들의 재적용을 위한 재사회화(?)라 해야 할까 학습이라 해야 할까에 대한 논의는 저조하다. 대량실업자 양산은 예정된 결론인데 그들의 재취업이나 거대 실업인구의 복지 문제는 감당할 수준을 벗어난 난제이다. 

화성 이주 등을 현실화해 계획하고 실현하더라도 초기 이주 신청자가 이주 직후 적응 기간 맞닥뜨려야 할 문제들로 이후의 이주 신청자들이 정체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다수의 이주 신청자들이 있다한들 기술적 재정적 이유로 모두 이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지구에 남아 있을 인구들은 어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경제란 결국 생존의 문제다.

나 또한 경제학이 그닥 살갑거나 익숙할 삶은 아니었다. 그렇다해도 경제가 생존의 문제라면 경제학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본서처럼 이렇게 삭막하지 않게 어렵지 않게 경제학에 들어서게 해주는 저작으로 경제학에 노크해 볼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 봐야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혹시 경제라는 여성이 자극적이고 열정적인 미녀일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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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24 2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만화가 너무 웃겨서 도서관에서 읽으며 웃음 참느라 한참을 고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하라 2017-10-24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여러모로 재밌는 책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