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10주년 확대개정판
쉐인 클레어본 지음,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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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일명 바이블 벨트 지역에서 태어난 작가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상한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빛나는 신앙을 배운다.


대학 시절 가난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 작가의 삶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선교회에서 몇 달 간 머물며 사역에 참여한 경험이었다. 캘커타에서의 사역은 몇 개월 후 끝났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귀국해서 “심플웨이”라는 공동체 사역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심플웨이는 성경의 명령에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한 패”가 되기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증오와 상대의 부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용어로 자신들이 하는 일을 표현하기로 노력하는 애쓴다. 이 책은 그런 심플웨이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일지다.





쉽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보통을 넘어서는 묵직함이 전해져 오는 책이다. 십수 년 전 읽었던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이라는 책을 떠올리게도 하고. 실제로 이 책에도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보통은 “급진적”이라는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용어로 번역되는 단어지만, 사실 “래디컬”은 “근원적”이라는 의미(식물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일각에서 자주 주장되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래디컬한 사람들이 되자는 말과 같다. 2천 년 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면서, 가끔 행해지는 안전한 기부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급진적이라고 하기에 앞서,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의미에서의 급진적인 도전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무엇보다 외치고 있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 신학자들의 서재에서 나오는 깊은 통찰과는 조금 결이 다른, 날것이지만 역동적인 통찰이 읽는 내내 가슴을 뛰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설교하셨던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설교에 갈채를 보내고 그 설교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에 누가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작가와 그 동료들의 이런 급진적인 실천과 순종이 (역사적으로 많은 급진적 운동이 그러했듯) 영적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본인들이 아니라도,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 의해 숭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삶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순종적 삶의 길이라는 식으로 강요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그런 종류의 전체주의는 수많은 새들이 깃든 큰 나무라는, 기독교가 가진 오래된 비전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가 급진적 순종을 누그러뜨리는 완충재가 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절묘한 균형과 임기응변적 적응능력이 필요하다. C. S.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조언하듯, 신앙의 삶이란 즉흥댄스와 비슷한 면이 있는 법이니까.


기독교 신앙이 지루하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반론이 담긴 책. 우리의 신앙은 원래 이런 역동성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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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브라이언 채플 지음, 안정임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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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이름을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아마도 신학대학원 시절 설교학 강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와 함께 설교학의 대가 중 하나로 배웠던 것 같다. 사실 그 시절에는 배워야 할 것이 워낙에 많았기에 하나하나에 집중해 가며 읽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물론 내 관심을 끄는 책들은 도서관에서 잔뜩 읽긴 했지만...)


사실 설교학은 실천신학 분야 가운데서도 가장 실천적인 학문이다. 설교는 모든 목회자들의 어깨에 지어진 고달프면서도 영광스러운 짐이니까. 특히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담임목사의 경우 매주 적지 않은 수의 설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설교문을 탁월한 수준으로 준비하고 설교하는 건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워진다.


때문에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는 목회자로 훈련받을 때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게 어디 고작 한 학기의 과정으로 충분히 갖춰질 리가 없으니, 결국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도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영상이나 글을 보며 따라하는 식으로 스타일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러나 좋은 설교문은 유튜브 영상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 설교의 스타일을 배울 수는 있어도, 내용을 배우기에 동영상은 사실 쉬운 매체가 아니다.


결국 쉴 새 없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틀이라고 해서 모든 본문을 같은 형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본문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포인트에 집중할 것인가,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떤 식으로 회중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이 없다면, 그때그때 설교자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본문을 읽고 적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채플은 이른바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틀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그 틀을 따라 하는 열두 편의 설교문을 실제로 실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물론 단순히 설교문을 옮겨 놓기만 한 것은 아니고, 각 문단들이 전체 원고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왜 그런 내용이 그 자리에 위치하는지 등을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론적인 부분 역시 간략하게나마 각주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건, 내가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틀로 성경 전체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실제로 유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식의 접근이 모든 본문을 설명해 내지 못하거나, 종종 견강부회 식의 적용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건, 결코 모든 본문에서(이를 테면 구약의 어떤 임의의 본문에서도) 바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방식의 해석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책에 실린 일부 설교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거나 그분의 교훈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과 역사의 중심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죄성(여기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드러난다)과 이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 은혜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리고 새로운 거룩한 삶(이건 그리스도와 연합을 할 때 가능하다)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분명한 ‘틀’ 안에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 매번 비슷한 느낌의 설교만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설교가 각각 다양한 방식과 유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려보다 훨씬 흥미롭고, 또,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순서가 좀 뒤집어 진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의 이론서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책이 아닌가 싶다. 설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대한 건전하면서 안정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독자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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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제자도 - 진리와 의미를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인의 길
앨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노진준 옮김 / 죠이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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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이성은 서로 배치되는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로 한 동안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 왔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떤 이들은 철 지난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긴 하다.(특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격한 언사로 신앙을 조롱하던 신무신론자들이 활개 치던 영국에서는 더욱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종종 이런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자신들의 신앙을 공공의 영역에 드러내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 맥그래스는 그런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로 대표되는 신무신론자들의 과격한 신앙에 대한 조롱은 실은 그들 자신이 가진 논리의 빈약함에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사적인 뻥카에 불과한 것이고(21),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비판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는 것도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신앙은 비이성적인 이들이나 스스로 변론하지 못하는 단순한 태도라는)를 갖게 만들 수 있는 부족한 태도다(22).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지성과 제자도, 즉 그리스도인됨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강조다. 1장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2장에서는 기독교 신조가 가진 중요성(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좋은 지도가 될 수 있다), 3장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동체, 즉 교회의 중요성을, 4장에서는 좋은 책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를, 그리고 5장에서는 제자도가 지닌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2부에서는 지성과 제자도 사이를 멋지게 구현하고 설명해 낸 네 명의 인물(도로시 세이어즈, C. S. 루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에 관한 소개가 나오고, 마지막 3부에는 저자가 여러 자리에서 했던 설교문들을 네 편 모아두었다.





소위 덮어놓고 믿는 식의 맹신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이성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지에 관한 집요한 강조가 인상적인 책이다.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C. S. 루이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니 더욱 편안하게 읽힌다.


확실히 오늘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성적 사고를 북돋는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기독교인”이라는 단어가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떤 면으로도 그리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특히나 요즘에는 “음모론 신봉자” 따위의 좀 더 추접스러운 이미지까지 씌워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책이 그런 일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살짝 아쉽기도 하다. 전반적인 구성이 탄탄하게 서로 장별로 연계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고, 각 장별로 별개의 내용들을 그냥 하나로 긁어모은 것 같은데, 실제로도 장별로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강연이나 연설, 대답 등을 정리한 것이기도 하다. 덕분에 구성에 있어서 좀 산만하다는 느낌을 주고, 특히 3부에 실린 설교문들은 물론 각 원고들은 깊은 통찰이 보이기도 하지만 꼭 여기에 실려야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물론 여러 장들에서 단편적으로 중요한 통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는 책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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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된다는 것 -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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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로완 윌리엄스의 또 다른 책이다. 이번 책은 제목처럼 “제자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이 아주 작고 얇은데(그래서 글자 수도 얼마 안 되는데) 어쩜 이렇게 쉴 새 없이 깊은 통찰을 쏟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다. 어디 물이 넘치듯 통찰이 다 담을 수 없이 줄줄 쏟아지는 걸까.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첫 장에 이어지는 나머지 다섯 개 장들은 모두 제자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산다는 것, 용서, 거룩함, 세속 사회 속에서의 제자됨, 성령을 따르는 삶이 차례로 설명된다.




제자도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특별교육 같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지적이다. 제자가 된다는 건 “쉬지 않고 바라보며 귀 기울여 듣는 삶의 상태”라는 것.


제자됨의 정의를 이렇게 할 때, 제자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건 “기독교적이기만 한” 어떤 덕목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그리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들로 채워지게 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거룩함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거룩함과 세상 속에 참여하는 일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그 사이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 본문에 관한 독특한 관찰도 흥미로운 부분이 잔뜩 보인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부활 에피소드에서 저자는 마리아가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만을 듣고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면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해 주소서”라고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또,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주님이 “도시 밖으로” 나가시는 장면에서, “도시 밖”을 사람들이 멸시당하고 고난받는 자리로, 물건과 묶여 사람들까지도 버려지는 자리로 정의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우리 또한 그분이 가셨던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핵심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물론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이런 요절에 가까운 책으로도 충분히 불은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여기 저기 밑줄을 긋다 보면 어느새 책이 끝나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읽어 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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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무신론자 -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마치 그분이 없는 것처럼 잘 사는 그대에게
크레이그 그로셸 지음, 최종훈 옮김 / 비전북(VisionBook)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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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눈에 띤다. 크리스천과 무신론자라는 말이 이렇게 붙을 수도 있는 걸까? 오래 전 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용어 중에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있었다.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모습은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아마 이쪽이 좀 더 학술적인 용어에 가까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명칭이 어떻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고백하는 신조와 그의 삶이 불일치하는 경우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초기 기독교의 여러 논쟁들은 이런 우리 삶 속의 불일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것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나 펠라기우스 등과 했던 논쟁도, 그보다 후에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갈등도, 나아가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의 결별도 그리스도인의 삶/행동이 그들의 고백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중요하다. 그건 그들의 신앙이 맺는 열매이기도 하고, 종종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입으로는 무엇을 외치든 돈과 명성만을 좇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에게 신은 돈이고 명예일 뿐이니까. 이 책은 그런 삶의 중요성을 강하게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또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의 독특한 부분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도전하고 있는 과제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보다는,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킬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저자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수치심을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나(2장), 근심과 걱정에 눌려서 다른 꿈을 꾸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8장) 하나님의 크심을 설명한다. 물론 여전히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10장), 전도를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사람들(11장), 변화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이들(7장)처럼 좀 더 익숙한 내용들도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조금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저자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될까 싶을 정도의 내용들인데, 생각해 보면 저자가 책에서 쓴 것처럼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자신을 꾸미는 식으로 쓰고 말 텐데 말이다.


다만 열두 개의 장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전부 “(크리스천) 무신론자”라고 불릴 만한 일일까 하는 의문도 살짝 들긴 한다. 물론 이런 부분은 수사적 도전이라고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1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이미 절판이 되어버렸다(난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각 장의 내용은 의미도 있고, 제대로 된 도전을 하고 있다. 전자책으로라도 좀 다시 내면 좋지 않을까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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