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로완 윌리엄스 선집 (비아)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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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 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재판에 관한 기록들에 관한 긴 주석이다. 아니, 주석보다는 일종의 탈굼이라고 해야 하나. 탈굼은 원래 유대 랍비들이 구약 성경의 내용에 길게 해설을 붙여둔 글을 말하는데, 이 책은 그 본문이 신약 복음서로 바뀌었을 뿐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또 주석과는 다른 게, 주석은 주로 학문적인 연구와 비평을 하는 데 반해 이 책의 경우 그런 종류의 접근을 하지는 않는다. 굉장히 자유롭게 다양한 글을 인용하면서(꽤 자주 문학 작품을 언급하기도 한다) 본문에 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돕는다.





네 권의 복음서에서 공통적인 장면을 각각 한 개의 장으로 구성을 했으니, 자연스럽게 각 복음서에 실린 서술의 차이점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마가복음에서는 침묵으로 초월의 세계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태복음에서는 참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전문지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누가복음에서는 배제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의 선택을 요구하는 내용을 읽어 낸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심판의 한 결과인 순교에 관한 내용을, 여섯 번째 장에서는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대답의 내용에 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전반적으로 딱 제목에 나온 것처럼 심판 행위 자체에 집중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을 드러내 주는지, 또 그 본문들이 우리가 어떤 존재임을 가리키는지를 설명하는 책.


개인적으로는 고난주간을 앞두고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책일까 하면서 폈지만, 그런 내용은 아니었던 셈이다. 저자는 심판의 과정과 결과로 일어난 고난과 나아가 부활이 중요함을 언급하면서도 여기에서 그 부분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로완 윌리엄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읽어가는 맛이 있는 글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를 신앙생활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탁월하다. 다만 이번 책에서 아쉬운 점은 복음서의 공통 본문의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생각보다 본문 자체에 천착하는 부분이 약했다는 부분이다. 저자가 각각의 복음서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그리스도의 재판을 다룬 각 복음서의 서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각 복음서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인데, 저자가 각각의 복음서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얼마든지 다른 복음서와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복음서를 그저 빌려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드는 정도. 물론 그 내용이 전혀 엉뚱한 건 아니지만.


C. S. 루이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서 쓴 책 “헤아려 본 슬픔”에서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말한다. 극심한 고통은 카드로 만든 우리의 집을 허물어 진짜를 드러낸다는 의미다. 그리스도가 서셨던 심판대는 그분에게 임해 있는 심오한 진리를 드러냈고, 나아가 우리에 관한 진리 또한 드러낸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선택한 주제는 꽤 의미가 있었다고 봐야 할 터. 조금은 현학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있긴 해서 살짝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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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감각 - 경외, 기쁨, 진리, 희망의 회복을 위하여 비아 시선들
돈 샐리어스 지음, 이광희 옮김 / 비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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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인 오늘 전국의, 아니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해진 자리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슬픈 예상이지만) 아마도 그중 상당수는 큰 감흥 없이 (하지만 나름의 정성을 다해) 예배 시간에 참석했을 것이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한 때는 예배에 관한 어떤 종류의 기대감 비슷한 것을 가졌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를 접은 상태일 것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이 수십, 수백 번 참여했던 예배에서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적 고양 이외의 다른 것들이 느껴지지 않은지 너무 오래된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예배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된 (어쩌면 처음부터 배우지 못한) 것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이 작은 책은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만나고, 경험해야 하는 네 가지의 단순하면서도 시원적인 주제들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건 경외와 기쁨, 진실함과 희망이다. 저자는 우리가 예배할 때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미 예배에 관한 중요한 감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각각의 주제들에 관해 짧지만 좀 더 깊은 분석을 담고 있다. 문장들이 마치 로완 윌리엄스의 글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들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하는 식이다.





우리의 예배에서 경외가, 기쁨이, 진실함과 희망이 사라진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이 책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며 되새겨 볼만하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보다는 그저 예배의 구성에 더 신경을 쓰고 있고, 기쁨보다는 의무감과 피곤함이 먼저라면, 남들 앞에서 나를 가리기에 급급한 시간이라면, 하늘의 소망보다 그저 한 주의 안도감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예배가 정말로 이렇게 초라해져있다면, 서둘러 책장을 넘겨보자. 분명 좋은 처방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나 그래서 이런 것들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구체적인 사례들과 지침들일 텐데, 생각해 보면 애초에 다양한 전통과 형식을 가진 수많은 그리스도교 전통들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 방식이 공통적으로 유효할 리 없다. 중요한 건 바른 방향을 기억하고 그곳을 향해 나가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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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칼뱅주의 - 풍성한 신학으로의 초대
코리 브록.나다니엘 수탄토 지음, 송동민 옮김 / 다함(도서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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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받고는 엄청나게 두꺼워 보였는데, 사실 종이가 아주 얇은 게 아니어서 정작 본문은 600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됐다. 그래서 그랬는데, 반쯤은 속독으로 읽었지만 책장이 꽤 빨리 줄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 외형만 보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는 책이라는 거.


책은 신칼뱅주의를 정립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을 각 항목별로 정리하는 내용이다. 주요 내용은 3장부터 9장까지의 일곱 개 장에 담겨 있고, 여기에는 성경관에 기초해 창조(재창조), 타락, 일반은총, 교회 같은 주제들이 차근차근 소개된다.


2장은 칼뱅주의와 신칼뱅주의 사이의 차이점, 관계에 관한 내용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장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으나, 일부 상황의 변화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고 분석한다. 그 중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역시 일반은총에 대한 강조일 듯.





신칼뱅주의는 역시나 전포괄적인 신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말은 특별히 성경관에서 잘 드러나는데, 카이퍼는 학문세계에서 성경의 권위를 대단히 강조하면서, 성경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지식을 성경에서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이 모든 지식의 근본 체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나는데, 신칼뱅주의는 성경을 “일종의 누룩처럼 다른 학문들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부분이다. 여전히 각각의 학문 영역은 상대적인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그리고 이 독립성에서는 일반은총이라는 신칼뱅주의의 중요한 신학적 강조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실 이런 종류의 방대한 정리는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고, 관련된 주제가 나올 때마다 한 번씩 찾아봐야 할 그런 책이다. 언젠가 한 번은 칼뱅주의에 관한 내용들을 정리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책도 긴요하게 사용될 듯.


두 명의 저자들은 이 주제를 충실하게 잘 정리해 두었고, 학자답게 인용구도 정확하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다가, 편집도 직접 인용 부분은 좌우로 단을 안쪽으로 넣어서(폰트도 달리 해서) 확실히 구분이 된다. 이런 종류의 책에 잘 어울리는 방식이다.


신학이 확실히 관심이 떨어지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바른 신학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목적 없는 항해를 떠난 배처럼 이리저리 헤매기만 할 뿐이다. 신앙생활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책도 비단 신학자나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좀 더 넓게 유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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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 - 그리스도인을 위한 길 위의 신학
요르그 리거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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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종교에서, 특히 기독교에서 여행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그건 상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과 40년 동안의 광야 여행은 민족 형성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복음서의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끊임없이 갈릴리와 유대 지역을 오고가는 과정에서 복음을 가르치셨고, 바울은 지중해 동부를 반복적으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편지를 통해 신학적 정리를 이루었다.


여행에 대한 이런 강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어 이어졌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순례라는 위험한 여행을 자발적으로 나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회개와 신적 은혜를 추구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광범위한 여행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 여행의 성격은 다시 한 번 바뀌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개인적인 성장이나 자아실현과 같은 지극히 내적인 동기, 나아가 자기 과시를 위한 관광에 집중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관광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다. 저자는 그 가장 큰 이유가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의 권력의 격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행자는 돈을 지불하고 현지의 자원을 가져가거나 훼손시키고, 이 과정에서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현지인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 전통을 상품화하도록 부추긴다.


이건 여러 형태의 종교 관광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소위 단기 선교나 성지 순례라고 불리는 많은 종류의 종교적 여행들에서, 여행객은 현지인들보다 권력의 우위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말이다. 개인적으로 단기선교 과정에서 들었던 뭔지 모를 불편함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에 기인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이에 관해 “자신이 해결책 일부가 되기에 앞서 자신이 어떻게 문제 일부가 되었는지 깊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기독교 신앙에서 여행의 모티브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한 집을 짓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자리는 여행지에서 보내는 일정일 것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 뽑아버릴지 모르는 텐트의 고정못을 마치 보물처럼 여기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야곱이 파라오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평생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다.


책의 저자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약자들의 위치에 서보지 않는 종류의 여행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나 도전을 줄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로 살지만 그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진정한 나그네의 입장(연약하고,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구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비는 입장)에 서 볼 때에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떠나는 종교 관광을 떠올려 보자. 여행 내내 무슨 성경 이야기가 나오고, 가끔 기도를 한다고 해도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결국 돈을 내고 현지의 자원을 소진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소비자(Consumer, 소진시키는 사람)로 다녀오는 것뿐이라면, 그저 휴대폰 사진첩 속 자랑용 여행이었을 뿐일 게다.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사람들과의 어떠한 교류도 없다면, 굳이 그 비싼 돈을 들여서 온갖 환경오염과(비행기의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은 어마어마하다) 자연파괴, 쓰레기 생산을 일으킬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진정한 순례란 무슨 유명한 건축물이나 자연물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히 그 은혜를 여전히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과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가 되어 보는 것, 과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경험을 했던 자리를 밞으면서 동시에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여행이라는 주제에 관한 본격적인 인문학적, 신학적 해석을 담은 책. 물론 정치, 경제적인 부분에 좀 치우친 면이 있지는 않나 싶지만, 그래서 오히려 신학적인 면이 좀 밀려나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그 부분은 읽는 사람이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읽으면 되는 부분이다. 분명 좋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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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10주년 확대개정판
쉐인 클레어본 지음,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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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일명 바이블 벨트 지역에서 태어난 작가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상한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빛나는 신앙을 배운다.


대학 시절 가난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 작가의 삶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선교회에서 몇 달 간 머물며 사역에 참여한 경험이었다. 캘커타에서의 사역은 몇 개월 후 끝났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귀국해서 “심플웨이”라는 공동체 사역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심플웨이는 성경의 명령에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한 패”가 되기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증오와 상대의 부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용어로 자신들이 하는 일을 표현하기로 노력하는 애쓴다. 이 책은 그런 심플웨이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일지다.





쉽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보통을 넘어서는 묵직함이 전해져 오는 책이다. 십수 년 전 읽었던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이라는 책을 떠올리게도 하고. 실제로 이 책에도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보통은 “급진적”이라는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용어로 번역되는 단어지만, 사실 “래디컬”은 “근원적”이라는 의미(식물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일각에서 자주 주장되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래디컬한 사람들이 되자는 말과 같다. 2천 년 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면서, 가끔 행해지는 안전한 기부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급진적이라고 하기에 앞서,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의미에서의 급진적인 도전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무엇보다 외치고 있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 신학자들의 서재에서 나오는 깊은 통찰과는 조금 결이 다른, 날것이지만 역동적인 통찰이 읽는 내내 가슴을 뛰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설교하셨던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설교에 갈채를 보내고 그 설교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에 누가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작가와 그 동료들의 이런 급진적인 실천과 순종이 (역사적으로 많은 급진적 운동이 그러했듯) 영적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본인들이 아니라도,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 의해 숭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삶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순종적 삶의 길이라는 식으로 강요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그런 종류의 전체주의는 수많은 새들이 깃든 큰 나무라는, 기독교가 가진 오래된 비전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가 급진적 순종을 누그러뜨리는 완충재가 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절묘한 균형과 임기응변적 적응능력이 필요하다. C. S.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조언하듯, 신앙의 삶이란 즉흥댄스와 비슷한 면이 있는 법이니까.


기독교 신앙이 지루하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반론이 담긴 책. 우리의 신앙은 원래 이런 역동성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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