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술
제프 고인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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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의 삶에 참 중요한 요소다. 그건 우리 삶에 활력을 주고, 때로 우리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은 일을 그저 고되고 힘든 것, 가능하면 적게 하면 좋은 것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뭐든 뒤집어 보는 게 “일”인 현대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아예 노동에 대학 악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기인 분위기도 보인다. 물론 여전히 일에 담겨 있는 좀 더 숭고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자기실현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생각하는 쪽이 좀 더 많긴 하지만.


기독교적 차원에서 일은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다. 이른바 “소명”이라는 개념이다. 영어(calling)든 한자어(召命)든 의미는 같다. 그건 우리가 어떤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주로 이 단어는 특정한 일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양의 오래된 표현으로는 천직 같은 표현도 있는데, 이쪽은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게 주어진 일 정도의 수동적 의미라면, 소명은 하나님에 의한 능동적인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좀 더 강하다.


중세에는 이 소명이 단지 특수한 직업군, 즉 성직자들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각자의 자리로 부르셨다고 교정했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일을 하면서, 그분과의 교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그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관해서 다양한 종류의 오해와 오류들이 널리 퍼져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과정에 관해 훌륭한 조언을 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소명에 관한 신화들 중 하나는 “그것은 운명처럼 우리에게 나타난다(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뿐)”거나, “일단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별 훈련을 하지 않고도) 곧 그 일에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다” 같은 내용들이 있다. 저자는 소명에 관한 그런 어설픈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뜨린다.


저자에 따르면 소명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행동하려는 의지가 없이 소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해 왔던 일들과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성과, 그리고 그것을 대할 때의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도제 기간에 상당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단번에 새로운 곳으로의 전환보다는, 단계별로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이를 수 있다.





“소명”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책이 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이다.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을 예시로 들면서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풀어낸 고전이다. 이 책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일단 소명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소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독자에게 좀 더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책 중반까지 성경인용이 거의 없었다. 후반부에는 두 부분 정도를 발견한 것 같은데, 기독교 출판사인 걸 생각하면 살짝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과 소명이라는 것이 일반은총의 영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은 기독교 신앙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책을 권해 줄 때 장점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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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만나다 - 신약성서 신학의 정점,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 비아 만나다 시리즈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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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성경비평적 관점에서 쓰인 요한복음 입문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의 특징과 저자, 저작 연대와 배경 등 개론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주요 주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요한복음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간략히 살피면서, 요한복음을 읽어나갈 때 집중해야 할 부분에 관해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비슷한 관점을 지닌 나머지 세 복음서들(공관복음)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얼개와 사건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그 인상적인 시작구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언행을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만든다.


덕분에 많은 학자들도 요한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주장들을 해왔다. 특별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만이 진리추구의 유일한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견해들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것이 본인의 학문적 수준의 높음을 드러내는 증표인양 여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이런 부류의 결과물들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근 1년 간 매일 성경을 읽는 모임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주 아주 근본적이면서 강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자신을 신앙을 발견하고 싶은 초심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질문은 꽤나 묵직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그리고 신학이라는 “놀음”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이 책의 논의를 따른다면,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누가 쓴 책인지 확실치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과도 상관이 없다면,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저자의 주장(78)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성령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확인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훌륭하기 때문에(그 훌륭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에 따라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결국 책의 신뢰성, 심지어 영감성까지도 그것을 읽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주체성에 대한 현대주의적 신봉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책의 구성은 나름 알차다. 현대의 비평적 관점을 잘 정리해 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인다. 다만 그 논리 과정이 어떻게 일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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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성경을 읽을 적에도 요한복음이 나머지 3개의 성경과 성격이 좀 달라서 의아한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그런데 성경은 노란 가방님 말마따라 저자가 불분명해서 (실제 4복음만해도 에수님의 12제자가 직접 저술했는지도 아라송함),그 당시에도 계파마다 읽던 성경이 제 각각이었다고 하지요.그건 아무래도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로마에 박해를 박고 30세 전후로 일찍 돌아가시고 12 제자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에 비해 꾸란이나 불경의 경우 마호메트(62세)와 부처님(80세)이 오래 사신데다가 살아생전 어느 정도 교세도 있어서 (많은)제자들이 두 분의 말씀을 모두 암기했다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성경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것 같아요.
 
오리게네스 성경해석학 서사기 - 해석·상징·드라마
곽계일 지음 / 다함(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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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는 초기 기독교 시기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교리문답학교를 운영하기도 했고, “헥사플라”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6개 성경 본문을 비교/대조한 대작을 펴내기도 했던 성경연구가이자, 수천 편의 저작을 남긴 정력적인 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비운의 신학자인데, 최근에는 그 이단 정죄의 근거에 대해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오리게네스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성경해석학에 기여한 독특한 공헌 때문인데, 그는 이른바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 책은 오리게네스의 성경해석법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지 그 과정을 서사적으로 되짚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오리게네스 이전에도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문헌을 해석하는 시도는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에 상징(그리스어로 “심볼론”)은 BC 6세기에서 4세기 사이 인간과 신 사이를 이어주는 신성한 증표로 여겨졌고, 이 시기를 거치며 호메로스 같은 이들을 시인에서 선지자로, 그들의 작품은 서사시에서 신탁을 감추고 있는 상징으로 격상되었다.


플라톤 사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이런 상징을 전면에 들고 나온 인물이 암모니아스였다. 그는 텍스트 상징을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플라톤이 물질계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던 천상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런 암모니아스의 1세대 제자가 바로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 주창자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리게네스가 등장한다. 오리게세네스 역시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암모니아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동기인 플로티노스와는 다른 문헌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바로 구약성경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신적 비밀이 가득한 일종의 텍스트 상징으로 보았고, 이른바 비유 해석법, 즉 알레고리를 통해서 그 상징 속 본래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저자는 우선 이렇게 오리게네스의 학문적 계보가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책은 흥미롭게도 오리게네스의 개인적 삶의 연대기와 그의 신학적 작업을 매치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을 통해서(그러니까 오리게네스의 저작이 나온 순서와 배경을 아울러 살핌으로써)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와 사상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함께 살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역시 주된 주제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 방식이 어떻게 나왔고,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정치적인 이유로 쫓겨난 후 정착한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아(가이사랴)에서 그의 작업은 유대 랍비들과의 토론을 통해 새로운 장으로 접어든다. 흥미로운 건 성전이 파괴된 시대를 살고 있던 랍비들 역시 일종의 알레고리로 구약을 해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월절의 핵심적인 상징인 “피”를, 유대인들은 모리아산에서 흘린 이삭의 피나, 그에 앞서 할례를 행할 때 흘린 아브라함의 피로 해석하곤 했다. 이에 반해 오리게네스의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고.



국내 저자 가운데 교부 신학을 전공하고 이렇게 책(원래는 논문이었지만)까지 내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책의 내용 역시 흥미로운 설명들이 잔뜩 발견되어서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 1장 “상징의 시대”와 4장 “텍스트 상징으로 지은 성전” 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 많아 집중해서 읽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준다. 작고 얇은 볼륨이기도 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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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Church Member - 당신은 교회의 고객입니까, 성도입니까? I 시리즈
톰 레이너 지음, 김태곤 옮김 / 아가페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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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책은 교회의 회원됨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책 자체가 작고 얇기 때문에 장황한 설명 대신, 짧은 예화와 직접적인 주제 제시가 이어진다. 총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말미마다 일종의 멤버십 선언이 하나씩 붙어 있고, 해당 장의 주제를 바탕으로 나눌 수 있는 질문이 몇 개 함께 실려 있다. 딱, 교회에서 그룹 나눔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문장도 그리 어렵지 않고, 제시하고 있는 내용도 분명해서 교회 내에서 누구와도 사용할 수 있는 교재가 될 듯하다.



예전에 비해 교세가 감소하는 추세가 역력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교회다.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로서의 교회 말이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예화 중 하나는, 저자가 어린 시절 살던 작은 시골 마을에 새로 생긴 “컨트리클럽”에 관한 내용이었다. 매달 일정한 회비를 내기만 하면, 클럽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들―수영장이라든지, 매점의 햄버거라든지, 미팅룸에서의 생일파티 같은 것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멤버십 클럽이다. 저자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런 컨트리클럽과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일정 회비(헌금)을 냈으니, 나에게 맡는 서비스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황당하게 느껴지겠지만, 벌써 오래 전 교육전도사로 일하던 시절, 비슷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담당하던 부서는 아니었는데, 한 초등생 아이가 부서 담당 전도사에게 꾸중을 듣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낸 헌금으로 월급 받으면서 왜 나를 꾸짖느냐”는 내용. 아이의 당돌한 발언도 발언이지만, 그걸 누구한테 배웠을까 하는 생각에 더 씁쓸해졌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교회의 회원됨이 단순히 회비를 낸 만큼의 서비스를 받는 것뿐이라면, 그건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님이 고작 새로 열린 테마파크의 입장권을 돈 받고 교환해주는 매표소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마 그 사람은 예수님과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멤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요구를 채워주고 섬기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가 성경의 교리 못지않게 중요해진 이 시대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목표다. 하지만 정말 교회가 그런 곳이라면, 세상의 주류 문화가 뭐라고 말하든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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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스비의 기도 세계기독교고전 55
오 할레스비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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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기도에 관해 이렇게 담백하게 핵심만을 모아 놓은 책도 없는 것 같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에 관한 이야기만을, 매우 집중해서 풀어놓는다. 기도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기도에 관한 오해의 교정, 우리가 좀 더 자주, 좀 더 잘 기도할 수 있는 요령까지 알차게 모았다.


저자는 기도를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게 아니라(한 때 “하나님의 보좌를 (감히!) 움직이는 기도” 따위의 책이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행위라는 것. 기도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반응이라는 말은, 여기에 우리의 어떤 공헌이나 노력이 들어갈 여지를 지워버린다. 오히려 우리의 무력함이 기도의 가장 좋은 자세라고도 저자는 덧붙인다. 그건 우리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를 맡겨드리는 태도니까.


일단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할 때 떠오르는 의심들, 기도를 제대로 해 내기 위한 온갖 방법들은 더 이상 우리의 시야를 사로잡지 못한다. 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뭔가를 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니까. 기도에서 중요한 건 “나”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저자는 기도를 매우 쉬운 일, 아니 정확히는 ‘자연스러운 일’로 만든다. 그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말 그대로 호흡과 같은 일이다. 물론 기도를 할 때 갖가지 의심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기도에 관한 바른 지식으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기도에 대해 부담이나 염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듬뿍 채워주는 책이다.


사실 뭐든 그렇다. 순전한 무엇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장식들이 여기 저기 붙으면서 지나치게 무거워지고, 나중에는 쉽게 가까이 가기도 어려워진다. 안타까운 건 기도가 그런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다. 기도가 부담스러워지고, 기도가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기도가 뭔가를 잔뜩 준비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리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열한 개의 장에 걸쳐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그냥 한 장만 읽고 나도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오른다. 쓰인지 100년이 된 오래된 책이지만, 기도에 관해 알아야 할 대부분을 담고 있는,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신학적 내용 없이 쉽게 설명해 내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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