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