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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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영화를 극장에 직접 가서 보는 사람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보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 같지는 않은데, 요컨대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를 구독하면 수천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무제한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고도 휴대폰이나 컴퓨터 등을 통해 충분히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장소적, 도구적 변화와 함께 나타난 관행이 이 책의 제목에도 나오는 “빨리 감기”(그리고 중간 중간 뛰어넘기)다. 이 책은 그런 빨리 감기 관행을 초래한 외적, 내적 원인을 밝히고, 나아가 이런 관행이 사람들에게 일으킨 결과에 관해 인문학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이유는 뭘까? 우선 너무 바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리고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봐야 하는 영상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바쁜 현대인들은 시간마저 가성비를 따져가며 사용하기를 원하고,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빨리 넘겨버리는 시청 행태를 갖게 되었다.


OTT의 발달로 초래된,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는 영상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기술적인 외적 요인이지만, 문제는 두 번째다. 그렇게 바쁘면 빨리 넘기기까지 하면서 보지 않으면 그만일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보는 이유에 관해, 저자는 SNS의 확산으로 공감을 강요당하고 ‘나도 요새 인기를 끄는 그것을 봤다’고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 이런 유행에 끼지 못하면 자칫 사회적 관계에서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읽어낸다.


이런 식의 시청이 감상이 아닌 소비이고, 영화의 관객보다는 콘텐츠 소비자로서의 위치에 서게 만든다. 대사 중심의 시청은 행간을 읽는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 게 뻔하다. 10초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청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이 깊이 있는 관람을 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 건 전문가가 대신 해 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게 정말 전부일까?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새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대두하고 있는 문해력 결핍도 다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조금 멀리 간 것일 지도 모르지만, 글자는 읽을 줄 아나 문장은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건 최근 우리나라에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음모론 신봉자들의 집단적 탄생과도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런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영상 또한 그런 성향에 맞춰 변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예컨대 요새 나오는 영상들에는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량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늘었다. 사람들은 단지 눈빛을, 얼굴의 잔근육의 움직임을 통해서 전달되는 감정의 변화에 집중하지 않으니까. 그냥 보여주면 될 일도 이제는 일일이 말로 설명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빨리 감기로 보면 감정 이입이 덜 되어서 좋다”는 대답을 읽다 보면 살짝 어질어질 하기까지 한다. 이유인즉 감정의 소비를 절약하기 위해 작품에 너무 깊이 빠지기를 꺼린다는 말이다. 기분이 상하는 것이 싫으니 결말까지 빨리 미리 본 후 마음에 들면 비로소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말도, 이미 본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는 이유도 다 비슷하다. 결말을 알고 있으면 감정의 소비가 적으니까, 새로운 것을 보려면 감정 소비가 많아지니까.(여전히 그럼 안 보면 되지 않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 차오르지만..)


빠른 속도로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야기가 어려운 것을 견디지 못한다. 영화고 드라마고 이른바 “설명충”이 등장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알려주어야 하는 이유다. 심지어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어려움이 닥치는 것조차 견뎌하지 못한다. 이른바 “공감성 수치”가 높아서 주인공의 고난이 자기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그 결과 요새 수없이 등장하는 양산형 이세계물들처럼, 주인공은 먼치킨적 능력을 지니고, 주변 인물들은 별 이유 없이 주인공을 좋아하는,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전한 이야기만 늘어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지적했던 “매끄러움에 대한 (거의 숭배에 가까운) 집착”, 이른바 포르노적 탐닉만 남게 된다.



꽤 재미있게 읽었다. 그 원인을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빨리 감기” 현대인들의 마음속의 불안감이 반영된 현상인 듯하다. 책 말미 이제까지 대체로 약간 비판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던 저자는, 이런 관행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일종의 적응일 지도 모른다며 살짝 발을 빼지만, 글쎄.... 그렇게 보고 넘어가면 그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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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31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옥스포드가 뽑은 단어가 뇌가 썩었다는 말이라는데 관련있는 현상이겠죠? 그래서 아날로그적 감성도 필요한데 걱정입니다. 책 읽어보고 싶네요.

노란가방 2025-03-31 10:33   좋아요 1 | URL
ㅋㅋ 옥스퍼드에선 별 걸 다 연구하네요. 칼럼에 실은 글이라 어렵지도 않으면서 생각할 꺼리를 주는 괜찮은 책이에요.

stella.K 2025-03-31 10:58   좋아요 0 | URL
왜 각 나라나 단체에서 올해의 단어 뽑잖아요. 실제로 뇌가 썩었다는 말이 있대요. 저도 몰랐는데.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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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3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다행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국회의 빠른 대처로 금세 무산되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사법 절차의 진행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동시에 폭동까지도 조장하면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또, 심지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당은 자신들도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내란을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대통령 탄핵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이 책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쥐고 흔드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든 극단적인 무리는 더 눈에 띄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대 대표되기 마련이니까.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가끔 남미나 아시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깨드린 예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행되던 초기에는 참고할 만한 예도 부족했고, 그래서 정권교체라는 것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굉장히 겁을 냈던 것 같다. 정권을 이대로 넘겨주면 자기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당한 선거의 결과마저 부정하고자 하는 내적 요인이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체 하고 있지만 내심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프랑스의 보수정당이었던 “공화연맹당”은 점차 극우 단체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공식적인 정당의 구성원과 폭력적인 활동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나중에는 청년애국당이라는 극우 폭력집단을 당의 “돌격대”로 지칭하더니, 1934년 2월 6일 발생한 폭동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건 남 일 같지가 않다.






책의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애초에 미합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었고,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덕분에 민주적인 절차나 제도보다는 합중국에서 이탈하려는 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도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렸고, 저자들은 그것들을 가리켜 “미국은 언제나 반(反)다수결주의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책의 제목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反)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소수의 종신 대법관 제도(의회의 다수가 통과시킨 법안을 소수의 지명직 판사들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가 있고, 비슷한 제도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강력한 권한을 지닌 상원의 존재(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 모두에서 다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구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각 주별로 2명씩 배당된 상원의원 제도,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입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 작은 주에 특혜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더 적은 득표를 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선거인단 제도, 상하원 모두의 2/3가 찬성하고 전체 주의 3/4가 비준해야 가능한 어려운 헌법 개정 요건 등이 포함된다.


책 후반에는 이런 미국의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이 등장하지만, 문제는 이런 개혁도 헌법 개정사항들인지라, 앞서 말한 개헌의 높은 문턱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서는 힐러리 보다 적은 수의 표를 얻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리고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도) 명백히 후퇴했다. 책 말미에 저자들은 “미국인들은 지난 7년 동안 탈진 상태에 빠졌다”고 적으며 한숨을 돌리지만, 이제 또 다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깡패 짓을 시작한 지금, 저자들은 뭐라고 할까.



제목이 확 땡겨서 폈지만, 어떤 민주주의 일반의 후퇴와 해법을 제시해 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미국의 정치 상황에 국한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살짝 실망스럽다. 그래도 역사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곤 하는지라, 책 초반에 실려 있던 다양한 반 민주주의적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해 보는데 도움이 되려나(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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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믿음의 글들 395
윤영휘 지음 / 홍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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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는 엄청난 혼란이 시작되었다. 평생 책임이라는 걸 제대로 져본 적 없는 덜 떨어진 정치 지도자가 시도한 친위 쿠데타는 곧 헌법(의 규정에 따라 계엄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야당 주도의 국회)의 요구에 따라 진압되었지만, 거의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탄핵된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궤변을 남발하고 있고, 심지어 국회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마저 쿠데타를 옹호하며 온갖 뻘소리의 저급한 수준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맘 때면 늘 등장하는 양비론자들은 대통령과 여당은 물론 야당도 공동 책임이 있다는 식의 물타기를 시전하는데, 자칭 중립을 가장하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냥 내란수괴와 그 옹호세력의 책임을 은근슬쩍 희석시키려는 교묘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런 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모두까기 평론들이 남발되면서 자연히 정치라는 영역 자체에 대한 회의감, 불신, 적대감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정치란 그렇게 그냥 버리면 그만인 영역에 불과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영역도 늘 우리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기도 하고, 때로 흑과 백의 경계가 모호한 그런 문제들도 있다. 합의라는 기초 위에 진행되는 민주적 정치구조 안에서는 혼자만의 돌출행동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양보는 상시적으로 요구된다.


이 모든 특징들이 우리가 정치라는 영역을 이해하는(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은 극단적인 입장에 줄을 서곤 한다. 선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뤄주겠다는 달콤한 폭력의 맛에 취하는 거다. 과연 정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새해 홍성사에서 처음으로 낸 이 책은 제목에 실려 있는 유명한 영국의 한 정치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노예무역폐지 운동의 기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다.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항로를 결정적으로 수정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기관인 의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어 의원직을 시작한다. 그의 의원직 수행 방식은 매우 독특했는데, 휘그당과 토리당이 맞서는 의회 구도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파로서 직무를 수행했고, 심지어 대학 동기이자 절친인 피트가 수상이 되었을 시절에도 내각에 들어가지 않은 채 때로는 정부를 견제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협력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윌버포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인 노예무역금지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도로 제출한 열한 번의 법안이 상원 또는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개인적인 음해와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 기간이 거의 20년이었으니, 하나의 선을 이루기 위한 한 사람의 열정에 자연히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윌버포스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간다고 여겼기에, 그 과정에서 겪는 방해와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인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국가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던 인물이고, 이 과정에서 사용한 수단도 그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애써왔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지만 현실은...


물론 윌버포스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분명 다르고, 당시의 정치적 제도나 관행, 의회의 운영 방식 또한 오늘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참된 정치인의 모습은, 정치에 대한 환멸이 선을 넘을 것 같은 이 즈음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한 권씩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물론 태반은 읽어보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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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철학 - 몰입과 성장을 이끄는 스탠퍼드 마지막 인생 수업
빌 버넷.데이브 에번스 지음, 이미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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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요새는 좀 다른 이야기들도 나오지만,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직장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비전이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꼭 어떤 종류의 직업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직장이 늘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들어가기 전에는 어떻게든 합격하기를 바라지만, 정작 입사한 후에는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고, 때로 회의를 느끼다가 결국 그만두는 경우는 적지 않다. 예전과는 다르게 평생직장 같은 개념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 이런 과정은 좀 더 빨리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이 별 영향이 없다는 의미는 또 아니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스탠퍼드 대학의 디자인스쿨에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이란 무언가 제품이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디자인한다는, 좀 더 인문학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직장을 재디자인 해보자, 이 책의 주제다.


두 명의 저자들은 우리가 직장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면 실제적인 변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건 우리 쪽의 생각을 바꿔나가고,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도 바꿔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지만, 그게 꼭 상황의 변화까지 이를 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우리는 애초에 수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던가. 그 가운데서 우리의 생각이 변화될 수 있다면 그 또한 분명 유익한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게 우리가 하루 중 1/3이상의 시간을 사용하는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면.


중요한 건 그 생각의 재구성이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건, 돈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고, 최고만을 바라는 완벽집착이 아니라 지금 실행 가능한 최고의 선택지를 고르라는 것과, 회사 내에서 바르게 영향력을 쌓고 사용하는 법, 심지어 잘 퇴사하는 법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향의 조언들이다.





중요한 건 심리적인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시야가 좁아지고 잘못된 생각과 선택을 하기 쉽다. 저자들은 우리의 일을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팁을 제안하면서 이 작업을 돕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대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책을 읽으려는 노력조차 필요 없을 테니까. 말 그대로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들이다.


직장 초년생들에게 권해주면 좋을 듯한 책이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된 이들에게도 제법 와 닿는 지점이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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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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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소비행태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소비는 단순히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차원을 넘어 ‘지위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에 “명품”이라는 말로 잘못 번역되는 “Luxury", 즉 사치품이다. 수백만 원씩 하는 고가의 가방에 물건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 시간을 절약해 주거나 힘이 덜 들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때로 빚까지 지기도 한다(신용카드 할부는 빚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장치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런 종류의 사치품들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소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을 과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세계의 경제적 성장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중간계급’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들이 이전의 상류층이 전유하던 사치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물론 가벼운 결정은 아니라도)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사치품 그 자체는 예전과 같은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여기에서 이 책의 저자가 꼽는 야망계급이 탄생한다. 새로운 시대의 상류층, 즉 “귀족”이 되고 싶었던 그들은 다시 한 번 소비의 형태로 지위를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좀 더 힙한 방식이 사용된다.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지위재는 엄청나게 비싸거나 화려하지 않다. 물론 보통의 물건들보다 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값은 아니다. 대신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이런 것들을 골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서너 배 비싼 유기농 달걀이라든지, 일반 우유 대신 아몬드 우유를 마시고, 아이에게 축구 대신 하키를 가르치고 하는 행위들이 그런 예라는 것.


여기서 책에 아주 흥미로운 문장이 나오는데, “맛대가리 없는 슈퍼마켓 토마토를 먹는 건 정말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그러나 똑같이 맛없고 물만 많은 토마토라도 그게 토종 토마토라면 ‘진짜’ 맛이 된다.”




 

사회학 연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야만계급적 소비의 예를 보여준다. 물론 책에 등장하는 예들은 대개 미국이나 유럽 쪽의 사례들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얼추 맞아들어 간다. 소위 깨어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대표적인 것이 “이념적 채식주의”나 “극단적인 환경주의” 같은 것들이 아닐까도 싶고.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저자는 “소박해지려면 우선 충분히 부자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힙한 소비를 위한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면에서 그들 역시 물질주의적 사고에 여전히 매어있는 셈이다.


저자는 “물건을 아무리 사도 우리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무엇인가를 구입하는 행위로 자신의 지위와 성취를 과시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꽁지깃털의 화려함으로 암컷을 유혹하고자 하는 수컷 공작새와 그 수준에서 별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이들 야망계급의 욕구는 그들이 겉으로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의 정의와 올바른 질서의 해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위선적이기도 하다. 그들이 하고 있는 실천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


물론 대안적 소비라는 게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사치품으로 온몸을 두르는 허영심보다는 분명 나은 면도 있다. 그러나 결국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으로 사회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그런 목표도 없이 그저 자신이 깨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소비로 선택한 것이라면 그 정도의 의미도 없을 테고.



독특한 개념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다양한 연구조사 결과들과 수치들이 언급되지만, 이 부분의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 없이 전반적인 논지만을 좇아가며 읽어도 충분하다. 어떤 구체적인 주장까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 살짝 아쉽지만, 뭐 사회학 연구라는 게 현실을 나름의 논리로 잘 분석한다면 그건 또 그대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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