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1 - 7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7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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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를 암살한 자칭 “해방자들”을 궤멸시킨 후,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지를 두고 벌어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싸움은 간신히 두 번째 “삼두정치”라는 형태로 봉합되었다. 제국의 서방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나누어 지배하는 식이었다. 사실 이 선택부터가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감각의 부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분명 동방이 서방보다 재정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는 서방에 포함되어 있는 “로마시”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마지막 일곱 번째 시리즈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동방과 서방으로 나뉜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는 안토니우스가, 다음으로는 옥타비아누스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리즈 제목도 그렇고, 책 표지는 안토니우스로 추정되는 로마식 복장의 남성과 (클레오파트라로 보이는) 파라오 복장의 여성이 서로 안고 있는 가운데, 그들을 거대한 뱀이 둘러싼 일러스트가 큼직하게 박혀 있다. 아마도 뱀은 로마에서 출산을 담당하던 여성들만의 여신이었던 보나 데아의 제단에 산다는 뱀이 아니었을까. 이번 권에서 그 뱀은 옥타비아누스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얼마 전, 제단에 제물을 바치던 리비아 앞에 나타난다.





흔히 그저 근육만 잔뜩 있지만 지력이 따라오지 못하는 힘캐로만 알려져 있는 안토니우스에 관한 입체적인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안 그랬다면 진작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을 게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에게 휘둘리다 자멸한다는 역사 기록에 맞춰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그늘 안으로 몰려온 다양한 사람들을 부리며 세력을 유지해 가는 모습은 나름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여자에게 약한 부분에서는 남의 부인을 강제 이혼시키고 자기 부인으로 삼은, 또 그러기 위해서 거짓 사유로 자기 부인과 이혼까지 했던 옥타비아누스도 뒤지지 않긴 한다. 몇 편 전부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세상에! 이후 로마 황제 3인의 이름이 다 모였다)가 종종 등장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좀 야박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이 책에서는 “제2의 카도이되 지성이 없는 카토”라는 표현으로 평가한다), 이번 편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후에 옥타비아누스가 뺏은 리비아의 남편이었고, 옥타비아누스를 옹호하기 위해선 네로를 무능하고 인격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묘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달랐던 결정적인 부분은, 대국을 읽어가는 능력이다. 그는 언제나 안토니우스보다 더 멀리까지, 그리고 더 오랜 후까지 보고 있었다. 이 부분은 옥타비아누스가 20년은 더 젊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이기도 했으나, 그처럼 젊은 나이에(겨우 20대 초반이었다) 그 정도의 정국을 구상할 수 있었다는 건 확실히 천재적인 면모이긴 하다.





이번 권에서는 두 사람의 정면대결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옥타비아누스의 상황이 퍽 위태로웠고(동쪽에는 안토니우스가, 남쪽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삼아 바다를 장악해 곡물수입을 막고 있었고,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는 소규모 반란까지..) 이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옥타비아누스의 결단이 특별히 인상적이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와의 평화를 위해 누나인 옥타비아를 그에게 아내로 주기까지..(과거 카이사르가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던 것처럼)


국가적 단위의 사건들과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들이 쉴 새 없이 서로 얽히며 복잡한 무늬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확실히 이 시리즈의 장점인 것 같다. 캐릭터 하나가 버려지지 않고 있다가, 몇 편이 지난 후 작가가 왜 그 인물을 그러게 묘사했는지그 꿰어맞춰지는 걸 보는 게 퍽 재미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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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3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소시민들은 눈앞의 이익만 쫒아가기도 매우 힘든거같아요

노란가방 2025-04-30 09:54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가진 자질은 다 다르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도자의 자질이라는 것도 분명 있는 것 같고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1974-75년 일제전범기업 연쇄폭파사건
마쓰시타 류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힐데와소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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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시기였다. 익히 알려진 프랑스의 68혁명이 그 중 하나이고, 미국에서는 히피들의 반전운동의 기세가 강렬했다. 4.19 혁명으로 60년대의 문을 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곧 박정희의 장기독재 아래 들어가지만 독재자의 암살로 70년대의 마지막 해를 장식했다.


바로 그 시대 일본에서도 한창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 적국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은 유명하고, 전공투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학생운동도 연일 이어졌다. 이들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일제가 벌인 만행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들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잘못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모습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자민당 장기집권 아래서도 제대로 된 항의나 반발 없이 굴종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 책은 전공투가 소멸되고 그 파생조직 중 하나였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단체와 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옮긴 책이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재구성한 일종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글이다. 사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이름과는 달리 조직원은 겨우 네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 자신들이 이 이름의 투쟁을 독점할 수는 없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기다리며 “늑대”라는 이름의 활동조직명을 따로 취한 이들이다.(후에 “대지의 엄니”와 “전갈”이라는 또 다른 자발적 조직들이 같은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이 당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특징은 과격성에 있었다.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색깔의 하이바를 쓰고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은 전공투를 상징하는 형상이었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조직원들이 선택한 방식은 폭탄테러였다. “전선”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범기업들과 전후 경제침탈에 나선 여러 기업들의 사옥에 폭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주고자 했다. 저자는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왜 그런 방식의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투쟁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민한다.


“전선”은 이들이 단순히 일제가 벌인 침탈에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 당시 저항 대신 일제의 계획과 명령에 복종했던 보통의 일본인들마저 함께 범죄의 당사자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은 이들이 보기에 헛소리였다. 당시 시점에서 “일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죄책을 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폭탄 테러라는 방식은 강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상정하지 않았던 부작용이었다. 그들은 폭탄을 터뜨리기 전 반드시 사람들을 피신하도록 경고하는 전화를 걸었다. 다만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빌딩에 설치한 최초의 폭탄은, 5분 전 경고 전화에도 불구하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많은 인명이 사사당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조직원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비록 폭탄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지만 젊은이 특유의 단순함과 과몰입, 그러면서도 순진한 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인명피해를 일으킨 행위는 분명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같은 행위라도 우리는 상황과 목적에 따라 조금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척은 우리에게 “의거”로 남아있고,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나마 친일파들을 권총으로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환희를 느끼지 않던가.


그래서 이 책이 좀 더 어려웠다. 일제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민족의 후예로서 우리는 “전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일으킨 가공할 만한 전쟁범죄의 최종 책임자이자 S급 전범이었던 일본 천황까지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의 시도가 정당하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리고 희생된 민간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감상주의적 태도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과연 "정의로운가" 묻는다면 그 답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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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투 참 오랜만에 들어보내요.6~70년대 과격학생 운동탓에 이후 학생세대가 현실참 여에 소극적이 된거 같습니다

노란가방 2025-04-17 18:22   좋아요 0 | URL
저는 책으로만 흘깃 들어본 개념이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는 이것저것 좀 찾아보면서 읽었더니 그 시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5, 60년 전 일들 때문에 온갖 비리와 무능을 보이는 일당독재 정권에 군소리 한 번 못하고 사회 전반이 반 세기 동안 조용하다는 건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더라고요.
 
홀로코스트의 공모 -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신의 생명사 시리즈 1
로버트 에릭슨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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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그 부역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무려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이 외에도 5백 만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더 있었다. 전쟁 중 사망자 이외에도) 이른바 “홀로코스트”다. 가히 인류가 행한 가장 잔혹한 범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홀로코스트에 단지 나치와 정신 나간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고생해 보이는 교회와 대학의 구성원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해 모았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목사들과 교수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경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매우 중요하고, 옳은 일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나치의 이상에 동조하거나 찬동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다수가 여기에 동조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의 우리나라 정국에도 빗대 볼 수 있는 부분인데,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겁박하고, 최종적으로 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쿠데타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의 탄핵을 막고 오히려 내란을 옹호하던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목사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다수는 중국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인에 대한 격렬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나치와 그 부역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만약 그들에게 나치와 같은 힘이 있고, 중국이 작은 나라였다면 실제로 행동으로도 옮겼을지 모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교회 내 나치 반대세력의 활동과 노력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대표적으로 본회퍼 같은 인물인데, 저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본회퍼나 고백교회의 활동범위와 영향력이 좁았음을 이유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려고 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정량적인 기준만을 사용하겠다는(혹은 중요하다는)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네가 뭘 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노력 따위 의미 없다는 식의 사고가 옳을까?


그리고 이 정도의 책을 내면서 교회나 대학 당국의 나치 부역행위에 관한 증거 수집이, 단순히 연설문이라든지, 입장문 같은 ‘말’이 주가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 볼만하다. 물론 이들의 주요 도구가 ‘말’이긴 하지만, 그리고 선전선동 역시 분명한 잘못이긴 했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도 그들이 직접 홀로코스트에 개입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치 당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저자가 교회를 비판하는 지점 중 하나는 히틀러와 나치가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 그러니까 초기에 교회의 저항이 단지 교회의 자유(종교활동의 자유)에 국한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좀 애매한 것이, 그렇다면 교회와 (아직 실현되기 이전의) 정권의 정치행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야 했다는 말일까? 그건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비판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사실 정책이라는 건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고, (이번 친위쿠데타 사건처럼) 그 정도가 과도할 때가 아니면 교회는 정치와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 두 장에는 히틀러와 나치가 몰락한 뒤, 급히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던 교회와 대학 당국의 행태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때로 그들은 나치활동에 꽤나 깊숙이 개입했던 이들마저 구해내려는 시도를 했고, 이 과정에서 명백한 거짓이 동원되기도 했다. 끝까지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래도 이즈음 우리네 비슷한 이들은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적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그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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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제국의 역사 - 점토판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철의 제국. 3000년 만에 그 역사적 봉인이 풀리다! 더숲히스토리
쓰모토 히데토시 지음, 노경아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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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숲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고대 역사 세 번째 책은 히타이트 제국에 관한 내용이다(참고로 첫 책은 바빌론이었고, 두 번째는 동로마였다). 개인적으로는 바빌론의 역사에 꽤 감동을 받아서 이 시리즈는 나올 때마다 하나씩 구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역시 첫 책이 중요하다.


바빌론의 역사 때도 그랬지만, 고대 근동의 역사에 관한 책은 사실 그리 많이 나와 있지도 않고, 그래서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쉽지 않다. 물론 요새는 어지간한 내용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손에 잡히긴 하지만(어차피 그 내용도 다 어딘가의 책이나 논문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래도 이렇게 책으로 잘 엮어서 나오면 소장하는 느낌이 또 다르다.


이번에 다루고 있는 히타이트의 역사 역시 비슷하다. 바빌론이나 아시리아에 비해 잘 알려지지도 않은데다가, 어지간히 고대사에 관심이 있지 않으면 이름도 모를 게 당연한 그런 이야기. 이렇게 정리를 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장부터 6장까지는 히타이트가 어떻게 시작되고 멸망했는지의 과정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두었다. 그런데 워낙 기록으로 남은 내용이 적은 쪽의 역사라 이렇게만 쓰고 나면 책이 너무 얇아져 버린다. 그래서인지 7장부터 13장까지는 본편의 역사보다는 다양한 히타이트의 문화적 측면들에 관한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해 두었다. 법과 군사, 종교, 도시 건축과 일상생활 같은. 물론 이런 내용들 역시 남아있는 기록 자체가 적기 때문에 아주 자세한 학술적 연구물이라기보다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정해 나가는 스케치 정도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그 중에서도 9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사람들이 히타이트라는 이름을 좀 아는 이유는 (거의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제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히타이트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던 저자는, 남아있는 유물의 양과 질로 볼 때, 고대 히타이트가 특별히 철기 문명을 앞서서 세웠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당시의 철기는 일종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히타이트는 사실 청동기 제국이었다는 것. 흥미로운 설명이다.


또 하나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성경에 나오는 헷 사람들과의 연관성 부분인데, 이쪽은 성경 기록 이외의 다른 문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학문적 입장에서 저자는 히타이트와 “헷 사람”의 연결 가능성을 좀 낮게 보는 느낌이다. 물론 그게 관련이 없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고, 연결지을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들 헷사람을 가나안 종족 중 하나로 묘사하는데,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가 바로 이 헷 사람이었다. 연대상 다윗 왕국이 BC 11세기 말에 해당하고,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것이 BC 1200년 경이었으니, 멸망 후 여러 갈래로 흩어진 히타이트의 일족이 가나안 쪽으로 남하해 살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히타이트의 왕들과 도시들의 이름들이 잔뜩 나온다. 우리와 전혀 다른 지역의 역사를 접할 때 조금 어렵게 느껴지도록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전쟁과 정복 이야기를 집중하다 보면 마치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을 타고 쭉 지나가는 것처럼 신이 난다(물론 모든 사람에게 이런 식의 반응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다음 책은 또 어디를 비출까?


덧. 이런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부럽다. 역사, 인문학 분야에서 은근 일본 저자들의 책들이 자주 보이는데, 그들의 저력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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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그려진 이야기 - 그리스인들의 별자리 신화
데이비드 W. 마셜 지음, 이종인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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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보며 별들에 주목해 본 게 언제일까. 연중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으로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어지간히 밝은 별이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긴 하지만, 오래 전 군 생활을 하던 강원도 화천에서 우연히 바라봤던 하늘은, 말 그대로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수천 년 전 시인들도 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이야기들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만들어냈던 다양한 신화적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정리라고 해서 학술적인 느낌은 아니고, 그냥 이야기책처럼 48개 고전전적인 별자리 이름에 얽힌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다.(이야기 속 연대 순을 따른 건 아니다)


책 곳곳에 적지 않은 수의 삽화들과 별자리만을 따로 떼어서 그려놓은 부분 등 친절하게 관련 내용을 익힐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별자리라는 별들을 늘어놓아도, 이게 왜 사자인지, 이게 왜 쌍둥이인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 놓으면 조금은 다르게 볼 여지가 생긴달까.


내용상 자연스럽게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주된 설명의 레퍼런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참 읽다 보면 이게 별자리 책인지 그리스 신화 책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 내용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름 잘 짜인 별자리 이야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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