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말 3 - 6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6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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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이래로, 로마는 벌써 오랫동안 내전 상태였다. 지중해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어졌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그 잔당) 사이의 내전이 간신히 끝났지만, 카이사르의 암살로 다시 한 로마는 내전에 말려든다. 자칭 해방자들은 지리멸렬한 채 암살 이후 정국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결국 유언장에 의해 카이사르를 계승하게 된 옥타비아누스와 힘으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안토니우스의 주도로 결성된 제2차 삼두와 두 번째 내전을 벌인다.


실력과 명분을 가진 삼두 쪽 리더와 달리, “해방자”들 쪽에서는 그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 두 번째 내전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양측을 이끄는 지도자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보인다. 군사적 재능이 제로에 가까웠다는 건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의 공통점이고, 군사적 재능은 있지만 냉정함이 부족했던 건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니까.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브루투스 따위가 지니지 못한 냉철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브루투스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었고, 이런 태도는 전투 중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어버렸다.


양측의 충돌은 필리피 전투에서 사실상 끝나고 만다. 양측의 네 명의 사령관 모두 군사적 재능이 A급은 아니었기에 전투는 깔끔하게 끝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양측 모두 사상자 수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결정적인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공화파의 패배로 끝난다. 그렇게 BC 1세기 로마의 두 번째 내전은 끝나는데, 곧이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세 번째 내전이 또 벌어진다. 이 시대 로마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세상 망하는 줄 알지 않았을까...





이번 권에서 자주 언급되는 건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 부분이다. 마침 당시 지중해 전역에 걸쳐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의 수확량이 매우 줄었고, 단기간에 많은 인원들을 먹여야 하는 군단을 소집한 상황에서 이는 굉장히 큰 문제였다. 소위 해방자 진영은 이 문제를 매우 간단하게 해결하는데,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쥐어짜는 식으로 전비를 조달했던 것.


물론 고대의 제국 운영이란 대체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제국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과도한 수탈은 반발심만을 키우게 되고, 기회만 된다면 오늘의 압제자들에 저항하는 내일을 그리게 될 테니까. 해방자들의 근시안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면 군대는 물론 수도 로마의 시민들에게 나눠줄 밀까지 구해야 했던 삼두파(중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한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후 지중해 서부 해상을 누비던 그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협상을 통해 밀을 구입하기로 했고, 이는 당장의 문제로부터 한숨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쟁은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것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때문에 그냥 겁을 주려고 함부로 운운할 것도, 더구나 한 나라의 최고 결정권자가 전쟁을 쉽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그런 일이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리더가 일으킨 전쟁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어찌어찌 이기더라도 그 과정에서 남긴 상처는 적어도 그 리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정말 최악의 지도자가 있었음이 이즈음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통치자의 자격이 혈통과 돈에서 나왔던 고대 로마에서도 존재해서는 안 되는 지도자가, 하물며 민주적 권력 위임을 통해 통치하는 현대에 그런 망상에 빠진 엉터리가 대통령 노릇을 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위기였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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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기독교
케빈 드영 지음, 홍종락 옮김 / 템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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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사용하는 간략화된 “복음 소개 책자”와는 달리, 이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수많은 요구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목록은 계속 늘어난다. 물론 때로 그런 요구들 중 어떤 것은 별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중요한 게 분명해 보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많은 요구들을 “제대로” 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적 목표를 세우면 세울수록, 우리는 더 자주, 더 크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앙적 패배주의에 젖어들게 된다. 이 패배주의에는 여러 별명들도 붙기도 하는데,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현실주의나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어서 스스로 뭔가 이룰 수 없다는, 좀 더 영적으로 보이는 변명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태도가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죽어라 애쓰다가 결국 실패를 맞닥뜨리고 좌절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제자의 삶은 고난을 동반하지만, 패배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명령(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라는)을 하시는 분일 리 없지 않은가.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기 이전에 일부의 우려에 대한 단서조항을 붙인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니까.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분히 이는 교회 내에서 특정한 사역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선교는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만나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그렇게 앞장서는 사람들을 후원해야만 하는 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도가 신실한 기독교를 규정하는 유일한 특징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목회자들은 자주 자신들도 미치지 못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떠들 때가 있다. 자신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더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교인들의 어깨에 더 무거운 영적 짐을 올려두어도 괜찮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을 내는 헌신보다 성품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진보적인 생각인 것처럼 유행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십자가 처형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여겼지만, 그 책임은 모든 고위직 관리나 모든 유대인, 또는 이후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지 않았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재촉하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매일 그것을 성취할 수 있고, 그 성취의 결과를 맛보며 살 수도 있다. 물론 우리의 성취가 완벽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의 성취물이 예술가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불쾌해하는 부모는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실 만큼은 강하지만 죄로 물든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한 반쪽짜리 구세주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은 기억해 둘만한 문장이다.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같다 붙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좋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쉽게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 같다.


책 말미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성취를 칭찬했는지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분명 지나치게 현실주의,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본문일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은 긍정의 힘 식의 사이비 번영신학과는 분명 다르니 오해하지 말자.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말씀 따위는 내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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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에서 구하옵소서
벤저민 T. 퀸.월터 R. 스트릭랜드 지음, 오현미 옮김 / 좋은씨앗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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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신앙 사이의 연결점을 탐구하는 책은 제법 여럿 나와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도 그런 종류의 책 가운데 하나다. 사실 책 초반의 전개는 여느 책들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직업, 일이라는 것은 소위 영적인 무엇에 비해 열등한 무엇이 아니라는 강조와 함께(1장), 구약과 신약 속에서 일이 어떤 식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를 언급한다(2-3장).


이 책의 독특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건 4장부터이다. 책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경의 언급을 우리의 인생 전반에 걸쳐 필요한 지혜로 연결시킨다. 인생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건 이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를 어떻게 걸어 가느냐이고, 이 기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일터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성경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꽤 흥미로운 논리다.


5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축으로, 제자로서 사는 것과 일터에서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 사이의 연결지점을 살핀다.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제자도는 영성에 관한 일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영역 전체를 포괄한다. 제자는 타락한 세상 속에 살면서, 타락 이전의 모습은 어땠을 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면서 자신이 있는 곳을 회복시켜 나가는 사명을 지닌다는 것.




하나님 나라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 주제와 연결되면서 일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 잘 정리해 내고 있는 책이다. “일은 소명이라는 장갑에 생동력을 불어넣는 손과 같다”는 저자의 말은 일의 중요성에 관한 저자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을 제대로 해 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 가운데 담긴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해봤자 되지 않는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성속이원론은 그렇게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날마다 깊은 자국을 남긴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건 절망을 이기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이다. 여전히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주제인 것 같다.


작고 얇아서 부담이 적다. 이 주제에 관해서 처음 시작한다면 이 정도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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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계급론 - 비과시적 소비의 부상과 새로운 계급의 탄생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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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소비행태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소비는 단순히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차원을 넘어 ‘지위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에 “명품”이라는 말로 잘못 번역되는 “Luxury", 즉 사치품이다. 수백만 원씩 하는 고가의 가방에 물건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 시간을 절약해 주거나 힘이 덜 들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때로 빚까지 지기도 한다(신용카드 할부는 빚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장치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런 종류의 사치품들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소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을 과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세계의 경제적 성장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중간계급’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들이 이전의 상류층이 전유하던 사치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물론 가벼운 결정은 아니라도)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사치품 그 자체는 예전과 같은 ‘지위’를 나타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여기에서 이 책의 저자가 꼽는 야망계급이 탄생한다. 새로운 시대의 상류층, 즉 “귀족”이 되고 싶었던 그들은 다시 한 번 소비의 형태로 지위를 드러내고자 한다. 물론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려는 이들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좀 더 힙한 방식이 사용된다.


그들이 선택한 새로운 지위재는 엄청나게 비싸거나 화려하지 않다. 물론 보통의 물건들보다 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값은 아니다. 대신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이런 것들을 골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어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서너 배 비싼 유기농 달걀이라든지, 일반 우유 대신 아몬드 우유를 마시고, 아이에게 축구 대신 하키를 가르치고 하는 행위들이 그런 예라는 것.


여기서 책에 아주 흥미로운 문장이 나오는데, “맛대가리 없는 슈퍼마켓 토마토를 먹는 건 정말 ‘멋대가리 없는’ 짓이다. 그러나 똑같이 맛없고 물만 많은 토마토라도 그게 토종 토마토라면 ‘진짜’ 맛이 된다.”




 

사회학 연구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야만계급적 소비의 예를 보여준다. 물론 책에 등장하는 예들은 대개 미국이나 유럽 쪽의 사례들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얼추 맞아들어 간다. 소위 깨어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대표적인 것이 “이념적 채식주의”나 “극단적인 환경주의” 같은 것들이 아닐까도 싶고.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저자는 “소박해지려면 우선 충분히 부자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힙한 소비를 위한 정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면에서 그들 역시 물질주의적 사고에 여전히 매어있는 셈이다.


저자는 “물건을 아무리 사도 우리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무엇인가를 구입하는 행위로 자신의 지위와 성취를 과시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꽁지깃털의 화려함으로 암컷을 유혹하고자 하는 수컷 공작새와 그 수준에서 별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이들 야망계급의 욕구는 그들이 겉으로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의 정의와 올바른 질서의 해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위선적이기도 하다. 그들이 하고 있는 실천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택의 기회조차 없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


물론 대안적 소비라는 게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사치품으로 온몸을 두르는 허영심보다는 분명 나은 면도 있다. 그러나 결국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으로 사회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애초에 그런 목표도 없이 그저 자신이 깨어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소비로 선택한 것이라면 그 정도의 의미도 없을 테고.



독특한 개념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다양한 연구조사 결과들과 수치들이 언급되지만, 이 부분의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 없이 전반적인 논지만을 좇아가며 읽어도 충분하다. 어떤 구체적인 주장까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 살짝 아쉽지만, 뭐 사회학 연구라는 게 현실을 나름의 논리로 잘 분석한다면 그건 또 그대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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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 위에서 쓴 편지 -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 전하는 기독교적 삶에 관한 지혜와 통찰의 메시지
D. A. 카슨.존 D. 우드브리지 지음, 노진준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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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도 그 이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인데, 두 명의 저자들은 서문에서 이 책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물론 편지라는 형식으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전달하는 시초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의 저작들에서도 발견되지만, 이쪽은 처음부터 특정한 목적을 갖고 가공의 편지를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연속된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좀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어떤 사안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굳이 서론, 본론, 결론을 완벽하게 맞출 필요 없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만 쑥 들어갈 수 있다는 (저자 입장에서의) 유익도 있으니, 이 장르적 특성을 잘만 사용한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책은 팀 저니맨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친구인 우드슨 교수에게 받은 편지를 모았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는 아니고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가공의 인물인데, 편지를 보낸 우드슨은 카슨과 우드브리지라는 두 저자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저니맨은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하고 금융계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점차 기독교에 흥미를 갖게 되고, 나중에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트리니티와 예일에서 마치고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내용상 십수 년에 걸친 팀의 이 믿음의 여정에서 우드슨은 그에게 필요한 조언을 정성스럽게 편지로 쓴다.


책 초반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기독교가 갖는 독특성과 그 내부의 미묘한 문제들에 관한 내용이고, 후반은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에 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목회적 조언들이 주로 담겨 있다.


사실 두 파트 모두 읽을 만한 내용으로 잔뜩 채워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내용이 더 깊이 와 닿는다(전공을 속일 수 없는 것인지).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안정적인 보수적 관점을 취한다. 특히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든지 자유주의적 신학연구에 대한 경계 같은 부분에서 이런 면이 잘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전통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신 얄팍한 면이 있는 현대 신학의 여러 사조들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는 식이라 읽어볼 만한다.





교회에서 전임사역자로 일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이나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일단 그 즈음에는 뭘 어떤 걸 읽어야 하고, 문제를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큰 프레임이 필요한 법인데, 이 책이 그 부분에 대단히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루이스의 글에 비해 유머러스한 부분이 좀 부족한 게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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