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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인간은,
갈증은 일주일을,
허기는 이 주일을 참을 수 있고,
집 없이 몇 년을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외로움은 참아낼 수 없다.
그것은 최악의 고문, 최악의 고통이다.
[요약]
꿈 많은 브라질 소녀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몇 번의 풋사랑에서 실패를 했던 마리아는, 그 문제들을 잘 정리해줄 좋은 조언자를 만나지 못한 채 보냈고, 그 결과 사랑에 관한 한 자신을 옭아매는 소녀로 자란다.
19살이 되던 해, 마리아는 휴가 차 갔던 해변에서 한 외국인을 만난다. 그는 스위스의 클럽에서 브라질 식의 삼바 댄스를 출 댄서를 구하던 중이었다. 마리아는 그의 눈에 띄어 스위스로의 여행을 떠난다. 얼마 간 그 곳에서 댄서 생활을 하던 마리아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무단으로 결근을 했고, 가게에서 쫓겨나게 된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마리아. 그녀는 모델이 될 꿈을 품고, 자신의 사진을 여러 곳에 보낸다. 몇 달이 지나서야 온 전화. 하지만 전화의 내용은 그녀가 기대하던 내용과는 달랐다. 전화의 상대는 그녀와의 하룻밤을 사려는 남자였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현명할까? 마리아는 고민을 하지만, 1000프랑이라는 거금의 돈을, 그녀는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리아는 몸을 파는 여자로 살아간다.
코파카바나라는 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마리아. 그녀는 하루에 세 명의 남자에게 몸을 파는 대가로 900프랑의 돈을 번다. 수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도, 오직 돈을 벌어 고향에서 농장을 가꿀 생각에만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마리아에게, 어느 날 랄프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랄프는 화가였다. 마리아에게서 ‘빛’을 발견한 그는, 급격히 마리아에게 빠져든다. 처음에는 경계를 취했던 마리아도, 조금씩 랄프에게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진정한 정신적 사랑을 경험한다.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으로부터 ‘분리’ 시켰던 마리아도 마침내 랄프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감상]
다시 읽게 된 파울로 코엘료. 이번 책은 섹스에 관한 책이었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성행위에 대한 묘사들은, 자연히 이 책에 ‘19금’이라는 등급표시를 붙이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리라. 왜 사람들은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한 책에는 제약을 가하는 걸까? 아마도 코엘료는 충분히 이런 질문을 할만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성(性)에는 성(聖)적인 부분도 당당히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인 ‘11분’이란, 파울로 코엘료가 생각하는 성행위의 지속시간이다. 고작 11분. 사람들은 그 11분을 위해 결혼을 하고, 직장에 나가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다.(저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좀 억울하다고 생각한 걸까? 저자는 이 11분에 좀 더 성스러운 의미를 집어넣고 싶어 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적합일의 상징으로서의 성창(聖娼)을 인용하며, 성행위에 좀 더 신비로운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코엘료의 재능은 이런 주장을 매우 감미로운 어휘들을 사용해, 독자에게 부드럽게 전달한다는 점이다. 그 부드러움을 통해 기존의 가치체계(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독교적’인)의 허위와 가식을 공격한다. 코엘료는 ‘다빈치 코드’ 식의 ‘무식한’ 때려 부수기 식의 공격법을 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해 보인다. 코엘료는 ‘혼동시키기’라는 방법으로 독자의 사고를 뒤흔든다.
상대적으로 성적인 부분에서 개방적인 유럽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쉽게 용납되기 어려운 성에 대한 관념이 책 전체에 걸쳐 매우 자유롭게 써져 있다. 반복은 이상함을 평범함으로 만드는 힘이 있는 법. 책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매춘행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들에게 덜 이상하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고통과 아픔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한다. 무서운 힘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최근에 나온 ‘오 자히르’라는 책에 나온 것과 거의 유사하다. 인물들의 처지와 이름이 달라졌지만, 소재는 달라졌지만 핵심부에 이르러서 두 작품은 매우 유사한 느낌이다. 여기에 코엘료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연금술사’라는 작품에서 말하는 것도 크게 보면 거의 같은 맥락이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의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re is nothing noble, in his no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