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독교를 믿든 믿지 않든,

기독교의 진짜 메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 것이 희극이라면,

자기가 무엇을 믿지 않는지도 모르고

믿지 않는 것은 비극일 수 있다.


홍종락, 『C. S. 루이스의 인생 책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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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시대 - 로맨스 판타지에는 없는 유럽의 실제 역사
임승휘 지음 / 타인의사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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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특권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잘났든 못났든, 키가 크던지, 얼굴이 못생겼는지, 정치의식이 바르든지, 아니면 왜곡되고 심지어 삐뚤어진 사고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모두가 한 표씩 행사하는 제도니까. 물론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두에게 한 표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법률에 따라 선거권이 제한되는 경우도 있으니.(주로 범죄관련)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이런 종류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별한 계급, 나면서부터(이점에서는 시대에 따라 다른 관점들이 좀 있지만) 평민들과는 다른 이른바 고귀한 계급이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그런 척 했다). 바로 귀족이다. 이 책은 유럽의 귀족에 관한 다양한 상식들을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책이다.





1부는 가볍게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흥미를 돋우고, 2부에서는 귀족들의 일상을, 3부에서는 유명한 귀족들의 이야기를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놓는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4부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전반적으로 교양역사서라고 할 만한 구성 가운데서 그나마 조금은 학술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귀족이 되고, 귀족이 된 후에 했던 일은 무엇인지 같은 내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실 그들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피를 따로 타고났겠는가. 오히려 그렇기에 블루 블러드니 프랑크족 전사의 혈통이니 하는 것들에 집착을 하고, 엄청난 양과 진기한 향신료를 들이부은 음식을 준비해 파티를 열고, “수준”을 맞추기 위해 과시적이고 소비적인 삶을 살고 하는 것들은 그런 허구를 둘러싸서 깨지지 않게 하려는 포장재였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그 안에는 단순히 허위의식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가치들, 이를테면 명예와 충성,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책임감과 자선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까지 함께 내다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우리 시대의 문제는 다분히 왜곡된 겉치레를 버리면서 그 안의 선한 가치들마저 무시하는 데 있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그런 외피가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귀족”들이 민주사회 안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귀족의 특권이라는 건 국가의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받고, 범죄를 저질러도 종종 무마되거나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고, 자기들만의 혼맥과 학맥을 통해 특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계급을 공고화 한다는 부분일 것이다. 우린 이런 무리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귀족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혈통에 따라 전통적으로 귀족으로 인정되었던 이른바 대검귀족이고, 다른 하나는 국왕의 임명으로 주로 법관이 됨으로써 귀족계급의 문 안으로 들어갔던 법복귀족이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얼마 안 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소수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 국민이 노예화되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대검귀족에 해당되는 신분은 거의 사라진 것 같지만, 이제 그 자리를 막강한 권력을 지닌 새로운 법복귀족들이 차지한 것 같다.


당연히 이런 존재는 민주공화정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인데, 이들을 해체하는 일이 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제 혈통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자본에 기반해 그들의 권력은 점점 더 공고해져만 가는 것 같다. 중세의 귀족 이야기야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귀족들의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넘어갈 수 없으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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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만나다 - 신약성서 신학의 정점,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 비아 만나다 시리즈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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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성경비평적 관점에서 쓰인 요한복음 입문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의 특징과 저자, 저작 연대와 배경 등 개론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주요 주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요한복음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간략히 살피면서, 요한복음을 읽어나갈 때 집중해야 할 부분에 관해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비슷한 관점을 지닌 나머지 세 복음서들(공관복음)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얼개와 사건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그 인상적인 시작구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언행을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만든다.


덕분에 많은 학자들도 요한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주장들을 해왔다. 특별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만이 진리추구의 유일한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견해들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것이 본인의 학문적 수준의 높음을 드러내는 증표인양 여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이런 부류의 결과물들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근 1년 간 매일 성경을 읽는 모임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주 아주 근본적이면서 강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자신을 신앙을 발견하고 싶은 초심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질문은 꽤나 묵직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그리고 신학이라는 “놀음”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이 책의 논의를 따른다면,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누가 쓴 책인지 확실치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과도 상관이 없다면,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저자의 주장(78)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성령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확인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훌륭하기 때문에(그 훌륭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에 따라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결국 책의 신뢰성, 심지어 영감성까지도 그것을 읽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주체성에 대한 현대주의적 신봉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책의 구성은 나름 알차다. 현대의 비평적 관점을 잘 정리해 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인다. 다만 그 논리 과정이 어떻게 일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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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6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 성경을 읽을 적에도 요한복음이 나머지 3개의 성경과 성격이 좀 달라서 의아한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그런데 성경은 노란 가방님 말마따라 저자가 불분명해서 (실제 4복음만해도 에수님의 12제자가 직접 저술했는지도 아라송함),그 당시에도 계파마다 읽던 성경이 제 각각이었다고 하지요.그건 아무래도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로마에 박해를 박고 30세 전후로 일찍 돌아가시고 12 제자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에 비해 꾸란이나 불경의 경우 마호메트(62세)와 부처님(80세)이 오래 사신데다가 살아생전 어느 정도 교세도 있어서 (많은)제자들이 두 분의 말씀을 모두 암기했다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성경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적은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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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랑을 진정으로 ‘쓰고’,

마음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은

혼자만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는다.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사랑을 상대방을 통해 확인하고,

새로운 경험과 교훈을 얻고 있으니까.

그래서 혼자 하는 사랑은 때로 슬프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삶은 더 풍성해진다.


- 허유선, 『나는 너와의 연애를 후회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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