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 이번 책에서는 키케로가 집정관이었을 당시 벌어졌던, 공화정 말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카틸리나 반란”이 중심 소재다. 파트리키 출신이었지만 좀처럼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방 출신으로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키케로는 그런 파트리키 카틸리나를 체제전복세력의 수장으로 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질투만 작용했던 건 아니고, 키케로 자신은 정말로 자신이 공화국 로마를 (말로) 지키는 수호자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카틸리나의 “음모”를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적었고,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했던 키케로는 결국 로마의 법체계를 넘어서는 초법적 방식인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계엄령과 비슷한 조치였다. 현행 법률보다도 상위에 있는 특별한 명령. 키케로는 이 조치를 근거로 카틸리나의 공모자 다섯 명을 기존의 법에 규정된 재판 과정 없이 살해해버렸다. 물론 그들이 아예 혐의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유지해왔던 원로원 계급 대다수보다 특별히 더 부패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건 그저 동족혐오나 근친살해와 비슷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조치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모자들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모자 격이었던 카틸리나는 북쪽으로 도망쳐 병력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키케로는 최종권고를 카틸리나 사건이 끝날 때까지로 연장시켰고, 그 동안은 원로원 독재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런 조치에 반발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시리즈의 주인공 카이사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제대로 된 힘이 없었고, 오래 전 호민관 사투르니우스를 원로원 최종권고로 살해했던 사건을 들어 한 늙은 원로원 의원을 재판에 회부하는 식으로, 그 조치가 가진 법적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권고”가 유효한 상황에서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한 자잘한 음모를 꾸미지만, 노련하게 위기를 빠져나간 카이사르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떠난다.
이번 책의 핵심은 “원로원 최종 권고”의 적법성이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편법을, 아니 법적 근거가 없는 특별 조치를 감행해도 상관없다는 뒤틀린 확신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채, 혹은 자신이 나라를 구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온갖 권력기관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소시오패스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호헌파였으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당시의 현존 체제의 불완전성을 느끼고 그걸 해속하기 위해 나섰으니까. 역사를 아는 우리야 훗날 그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종신 집정관이 되어 사실상 제정을 수립한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뭐. 하지만 그런 결단은 어쩌면 기존의 원로원 계급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볼 수도 있고.
쉴 새 없는 정치적 대립과 머리싸움을 보는 맛이 있는 시리즈. 다음 권 이야기가 기대되는 작품.
자본주의가 풍요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것은 확실하지만
자본주의만으로는 풍요의 땅을 유지할 수 없다.
- 뤼트허르 브레흐만,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중에서
사회학 분야의 고전이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볼 때면 이런저런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옛날식 사고의 한계로 인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오늘날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 지난 내용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은 책을 먼저 읽었던 지라, 처음부터 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장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오류가 있으면 단번에 잡아내면서 ‘그럼 그렇지’, ‘역시’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한 채로. 그런데 저자는 앞서의 내 선입관을 상당부분 흔들어버리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우선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쉽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번역의 이슈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 주장이 어떤 한계 안에서 주장되는 것인지, 또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 같은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폭넓게 인정한다. 사실 이렇게 써 내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우선은 공격적인 태도도 좀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또, 많은 고전들이 오늘날의 글쓰기 방식과는 좀 달라서 읽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드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 (물론 확실히 예스러운 글쓰기 방식이 묻어나오긴 한다) 의외로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건 글의 구성이 괜찮았다는 의미다.
책의 내용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노동관)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나오기 이전에도 자본주의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자본주의와 이후의 자본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기준은 탐욕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인 것 같다.
무제한적인 탐욕은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한 동인일 수도 있으나, 필연적으로 전체 시스템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신교의 노동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금욕주의’는 이런 문제를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꼽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주로 칼뱅주의와 그 영향을 짙게 밭은 청교도 쪽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윤리는 애초의 칼뱅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특정한 요소가 강조되거나 약화되면서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칼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저자가 말하는 개신교 노동윤리의 핵심 중 하나는 예정론인데, 정작 칼뱅 자신은 이 예정론을 자신의 신학의 말미의 ‘송영’으로 사용하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핵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예정론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그렇지 않을 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여기에서 일종의 예정 판별법이 생겼다.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그것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즉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그건 (구원으로) 예정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사실 칼뱅이 들었다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반문했을 만한 이야기지만(cf. 60), 아무튼 그런 식으로 칼뱅의 주장은 사용되었고, 이 또한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다만 이 모든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과학적인 통계나 분석 작업이 부족했다는 점은 지적될 수밖에 없다. 책 전체에 걸쳐서 통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건 처음의 몇 개의 장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헝가리의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들 사이의 각급 학교 진학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었는데, 물론 종교에 따라 어떤 분야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통계이긴 하나, 헝가리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아니다.
또,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어떤 지역에서 소수파는 상대적으로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49),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한 지역들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지역이라 자본주의 발달에 유리한 정황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독일의 경우)라는 주장(43)도 무엇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강한 반론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생각해 볼만 한 부분은, 어떤 지역이 특정한 종류의 개신교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주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에를 들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주류였던 시대 영국의 시민들이 정말로 일상생활에서도 국교회 신앙에 충실하게 살았을까?
오히려 남아 있는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시민들의 교회 출석률부터가 매우 낮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인 내용에 무지하거나, 오히려 교회를 조롱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지역의 주류 신앙에 따라 그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이 달라졌다는 저자의 주장의 타당성은 상당 수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면은, 이 책이 사회학 분야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역사신학 쪽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개신교 각 분파들의 주장에 관한 세밀한 비교와 대조, 그 차이점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고찰 같은 면들은 훌륭하다. 사실 이 책이 근대의 다양한 개신교 분파들의 노동윤리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면 오히려 신학 쪽에서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물론 “사회학 분야의 고전” 쪽이 좀 더 유명해 지는 데 유리했겠지만)
이 책의 주장과 관련해 많은 종류의 오해들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책의 결론을 아주 살짝 비튼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저자와는 상관이 없는데, 우선 저자가 책에서 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체 개신교회중 매우 일부(후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신앙)에 한하며, 다른 종류의 금욕주의적 개신교 분파들은 비슷한 노동윤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개신교 윤리를 만들어낸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변화를 겪었기에, 오늘날 그 신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이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책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저자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여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